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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 부분 4분 신부님의 묵상글은 8 - 9시 추가 게재하겠습니다.
*** 06:58. 4분 신부님(조명언, 이수철,오상선,이병우) 묵상글 추가 게재하였습니다.
210722. 묵상글 들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 우리는 너무 정상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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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 우리는 너무 정상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가?
성녀 막달라의 마리아 축일에 우리 전례는 독서로 아가서를 들려줍니다.
한 여인이 사랑하는 이를 찾아 밤새도록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를 봤냐고, 봤으면 알려달라고 합니다.
전례가 이 독서를 들려주는 이유는 틀림없이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렇게 주님을 찾은 분이었다고 얘기하려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여인의 모습이 산발이였다면 영락없이 미친 여자의 그것입니다.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 산발인지 아닌지도 신경 쓰지 않고
여기저기 마구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미쳤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똑같지만
미친 여자와 아가의 여인 곧 마리아 막달레나의 차이는 한 가지,
곧 왔다 갔다 하는 이유의 차이입니다.
아가의 여인과 마리아 막달레나는 분명하게 찾아다니는 것이요,
그것도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니는 것인 데 비해 미친 여자는
찾아야 할 대상이 없기에 목적성 없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눈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에 정신이 나갔다고,
그래서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복음에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
무덤에 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만을 확인하고 돌아갔는데
그것은 아마 두 사도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도들도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잃고 난 뒤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알고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오랫동안 마귀에 사로잡혀서 제 정신이 아니었던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미쳤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정신의 기준이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현세의 삶을 망치지 않는 거라면
마리아가 죽은 주님 때문에 현세의 삶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은 주님 찾아다니는 것은 분명 제 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의 짓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미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도 회개한 후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고,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이에 대해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3,21)
친척들은 주님께서 미쳐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베엘제불이 들려서 그렇다고 생각했지요.
제 정신이라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
하느님께 미친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니고, 정상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어제 저희는 공동휴식을 하며 영이 맑은 사람에 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이 맑은 사람이기는 한데 현실 생활은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도 어려움을 겪고 그 사람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데 성인들 특히 오늘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 정상적으로 살려고 하다가 두 사도들처럼 주님 찾기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그래서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 만나기를 실패하는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아무튼,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끝짜기 찾음으로써 주님 찾기를 포기한
사도들에게 가서 자기가 찾고 만난 주님을 증거하였고 그럼으로써
사도들을 위한 사도가 되었기에 우리는 여자들 중에 유일하게
사도들의 축일을 지내며 막달라 마리아를 찬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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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김 레오나르도
내일부터 8월까지 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여기저기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곳과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론을 올리지 못하는 날이 많은 텐데 그렇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강론을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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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 교육을 받았던 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곧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렇습니다. 우리가 울음 울 때,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서 울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아니, 우리보다 먼저 우시고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며,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와 함께 찾고 계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바로 그 어려움과 슬픔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이미’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이 벌어지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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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기구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요, 죄로 얼룩진 상처의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 런지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천국을 그리워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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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양성이 평등한 해방 세상을 위하여
인류의 인지능력이 발달하고 민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생활이 편리해지고 사회 질서가 인간화되며 하느님의 뜻을 더 잘 반영할 수 있게 되는 추세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명은 인류의 생활양식이 변천하는 데 따라서 도시화되고 인간화되어 왔지만, 아직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 역할의 고정 관념과 이에 따른 성 불평등 현실입니다.
짐승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는 일 등 육체적 힘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야외활동은 남자들이 주로 맡아서 했고,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나물을 채취하는 등 지속적이고도 섬세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실내활동은 여자들이 주로 맡아서 해 왔는데, 여기서 비롯된 성 역할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현재도 이데올로기처럼 지속되고 있는 탓에 성 역할 분담에 있어서 불평등이 남아 있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낮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 여성들은 사회 진출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가부장적 문화는 2천 년 유다인들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더 심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시면서 남성들로만 열두 명을 채우신 배경입니다. 하지만 실제 복음선포 활동에 참여한 여성 제자들은 많았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일곱 마귀에 들려 고생하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마귀의 올가미에서 풀려난 후부터 수산나, 요안나 등 예루살렘 부인들과 함께 제자 일행의 시중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시절에도 그 활약상은 대단한 바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여성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뜻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은 부활하시어 그에게 가장 처음 나타나신 발현 사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일컬어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불렀습니다(교령 2006.6.3.). 그가 제자들에게 가서 사도로서 선포해야 할 메시지를 일러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회상을 반영하기도 해야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사회 현실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앞장서 교회 현실을 개혁하기도 해야 합니다. 이미 양성이 평등한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는 흐름이 문명 복음화의 선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 내 여성의 지위와 역할 존중 문제는 여성 사제의 서품 문제로 이어지게 되어 있고, 평신도들의 양성 평등 의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현실을 반영해야 할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질적 도약을 위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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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알라스카를 여행하면서 경비행기를 이용하였습니다. 경비행기의 장점은 수속이 간편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택시 같았습니다. 그러나 경비행기의 단점도 있습니다. 안개가 끼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운항 할 수 없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짙은 안개와 비 때문에 2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책에 나온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김사인)” 경비행기가 결항되어서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비용도 추가 되었습니다. 마냥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었고, 친절한 민박집 주인은 공항까지 데리러 왔고, 맥주도 주었습니다. 낙엽하나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난 것은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합니다. 믿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은전 30닢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갈증과 괴로움에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곁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잠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베로니카는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입니다. 자캐오의 아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캐오와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키레네 사람 시몬과 베로니카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이유는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읽었던 것처럼 막달레나가 주님을 가장 애타게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뒤집어 놓으면 비가와도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그릇은 바로 놓아야 빗물이 고일 수 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으로 오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묵시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언제나 너의 집 앞에 있단다. 문을 열기만 하면 내가 너의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이 마리아에게 전해 졌고, 마리아는 이제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연도를 할 때, 성인호칭기도를 합니다. 천상의 성인들의 도움으로 세상을 떠난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영혼에게 천상의 모든 성인들이 먼 여정의 길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 미움, 멸시, 조롱, 저주의 마음으로 부르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화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 사랑, 자비, 이해의 마음으로 부르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화 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이웃들을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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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일 자체를 즐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울까요? 며칠 전,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어느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이 형제님은 제게 “신부님은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얼마나 좋으십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지못해 회사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입사 시험을 보고서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분명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원이었고, 이를 이룬 것인데도 마지못해 다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분명 이 형제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지요.
사실 일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로 하는 취미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음악이 좋아서 가수가 되었는데, 가수가 된 후 음악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고 말이지요. 취미로 하는 음악에서 일로 하는 음악이 되다 보니 책임이 동반되고 이로 인해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의 마음이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만들기도 있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 가장 벗어나고 싶은 것이 되게도 합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지냅니다. 축일에 맞춰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그녀였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컸기에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바처럼,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라는 고정된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미움의 마음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향해 “라뿌니!”하며 기쁨의 응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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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가진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많은 대가를 얻는다(알렉산드리아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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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의 힘.
2008년의 한 방송에서 ‘부탁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사람 많은 공원에서 짐을 놔두고 아이와 화장실을 갔습니다. 그때 한 도둑이 짐을 유유히 가져갈 때 주변 사람들은 관심을 전혀 두지 않습니다. 훔쳐 가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완전히 방관자 상태였습니다.
이번에는 주변 사람에게 “아이가 급하다고 해서 잠시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혹시 제 짐을 잠시 봐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했고, 사람들은 이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잠시 뒤, 도둑이 와서 짐을 가져가자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둑을 제압했습니다.
부탁 한 마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부탁도 하지 않으면서, 도둑이 짐을 가져가는데도 사람들이 방관만 하고 있다고 탓만 합니다.
주님께도 제대로 부탁하고 있을까요? 그냥 알아서 해 달라는 식은 아닐까요? 물론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우리와 함께하시기란 쉽지 않습니다.
청원 기도가 무조건 나쁠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계속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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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삶, 참 행복
- “사랑하라, 찾아라, 만나라, 선포하라” -
한 번 뿐이 없는 참으로 소중한 유일회적 인생입니다. ‘참으로 진짜 사는 것’은 사람 누구나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의 궁극의 소망 역시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살 때, 참 행복도, 참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참삶에 참행복이요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답은 단 하나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살고자 하는 갈망에서 태어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제 좌우명 시 첫연도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한결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 사랑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아름드리 울창한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온마음, 온정신, 온영혼, 온몸, 온힘으로 늘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숨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참나를 사랑하여 알 수 있고 참으로 정체성 또렷한, 자존감과 존재감 충만한 행복한 참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얼마전 21세의 피겨스케이트 국가대표 차주환의 인터뷰 기사 마지막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이 순간에 몰입하고픈 마음뿐, 저는 제가 너무 좋은데요. 저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하며 삶도 세상도 아름답습니다. ‘사랑-사람-삶’은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불볕 더위중 수도원 피정집, ‘평화의 집’ 전봇대를 타고 오르며 끊임없이 피어나는 능소화꽃들이 참 장관입니다. ‘이열치열’이라 말마디에 ‘치열’한 삶이 연상되어 써서 나눈 시가 생각납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불볕
더위에
참 좋은 처방은
언제나
하늘임 향한
순수와 열정의 치열熾熱한 사랑
능소화꽃처럼!”-
바로 이런 사랑의 불덩이 같은 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성녀는 물론 주님만을 그리워 찾는 구도자들인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시편63,2)
영성체송의 바오로 사도의 주님께 대한 사랑 역시 그대로 성녀는 물론 심중을 반영합니다. 두분 다 ‘사랑의 거산巨山’같은 ‘사랑의 거인巨人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네. 살아있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셨네.”(2코린5,14-15)
오늘 감사송 역시 성녀의 주님 향한 한결같은 불꽃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니 2016년 6월3일 성녀 축일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들을 위한 사도’교령 발표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조처였습니다. 교령에 대한 내용을 잠시 나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분명한 뜻에 따라, 경신성사성은 2016년 6월3일 예수성심대축일에 새로운 교령을 발표한다. 동서양 교회는 모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늘 주님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자 최초의 복음 선포자로 여겨 왔고, 다양한 방식으로 존경해 왔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여성의 존엄과 새복음화와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에 대하여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부름받았으므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범도 신자들에게 제시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며, 그레고리오 성인은 ‘하느님 자비의 증인’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사도들의 사도’라고 불렀던 이 성녀를 이제 신자들은 마땅히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역할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금부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예식이 현행의 기념일을 대신하여 축일의 등급으로 로마 보편 전례력에 들어가도록 제정하셨다.”
참 아름답고 자랑스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모든 구도자들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참으로 성녀의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의 아름다운 면모는 오늘 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에 앞서 참 재미있는 대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에덴동산의 여인과 부활동산의 여인의 대비입니다. 에덴동산의 여인은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을 퍼뜨린 반면, 부활동산의 여인은 죽음의 자리인 무덤에서부터 생명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씀처럼 ‘참으로 에덴 동산에서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면, 한 여자는 무덤에서부터 남자들에게 생명을 선포합니다.’
얼마나 멋진 해석인지요! 에덴동산의 정원지기 아담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하는 부활동산의 정원지기 파스카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감격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우리는 영예스럽게도 주님의 부활동산 미사전례를 통해 부활동산에서 정원지기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생명나무의 열매인 사랑의 성체를 모시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을, 큰 행복을 어디서 맛볼 수 있겠는지요!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성녀의 모습을 넷으로 요약해 봤고 바로 이점을 우리 삶의 귀감으로 삼고 싶습니다.
첫째, 사랑하라!
성녀처럼 참으로 마음을 다해 자나깨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와 열정이요 참 나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사랑할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찾아라!
성녀처럼 늘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연인을 찾는 신부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물론 우리 구도자들을 상징합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참으로 우리 삶의 꼴을 결정하는 것이 찾는 대상입니다. 한결같이 열렬한 사랑으로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만나라!
간절히, 항구히 주님을 찾을 때 만납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매일 평생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부활동산에서 주님과 성녀의 만남이 참 감동적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당신을 애타게 찾는 성녀에게 은총의 선물처럼 나타나신 주님이십니다. 정원지기로 착각했다지만 제대로 본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부활동산의 정원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성녀의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은 즉각적으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고, 전광석화 성녀도 조건반사적으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부르시며 만나니 참 감동적인 스승과 제자. 목자와 양의 만남입니다. 아마 주님과의 이란 감동적 사랑의 만남은 성녀의 평생 삶의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사랑의 샘이 됐을 것입니다.
넷째, 선포하라!
만남의 기쁨은 나눔의 선포로 완성됩니다. 복음 선포는 선교는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로,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참 삶을, 참 행복을, 참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습니까? 성녀가 가르쳐 주십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1.사랑하라, 2.찾아라, 3.만나라, 4.선포하라로 요약되는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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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인 오늘, 미사 말씀은 뜨겁고 열렬한 기도의 여정을 보여 주십니다.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달려가서 말하였다."(요한 20,2)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제자들에게 가서 ...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아침,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이는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왜 그토록 바쁘게 여기저기 다니며 부지런히 움직일까요? 그건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예수님을 만나려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분의 몸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보이지 않자 더욱 분주해집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 알리고, 제자들과 다시 무덤가로 돌아와서는 현장을 확인한 제자들이 떠난 뒤에도 빈무덤 근처를 울며 서성입니다.
가고, 오고, 달리고, 서고 하는 모든 움직임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녀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녀의 움직임은 모두 사랑하는 이를 찾는 여정입니다. 그분을 만나 하나 되려는 사랑의 본능이 그녀를 다그치고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아가 3,2)
제1독서인 아가에서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찾아 안락한 잠자리, 안전한 집을 박차고 나섭니다. 그것도 밤에! 이렇게 위험한 도심을 헤맬 수 있는 힘 또한 사랑입니다. 기도란 우리 영혼이 사랑하는 이를 절박하고 열렬히 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마리아는 사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했지요.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누구를 찾는지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마리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까? 사랑 때문에 애간장이 끊어질 듯 울면서 절박한 마음으로 간절히 찾는 대상이 있나요?
사실 모든 인간은 인생 여정 안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과거야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뻔하지만 미래는 뭔가 꿈꾸어 볼 만할지도 모르니까요. 미래의 불확실성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전의 양면처럼 희망의 불을 지피게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대개 재물과 권력, 지위와 명예, 인맥과 건강을 추구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모상을 지닌 피조물로서 원래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오도록 프로그래밍되었지만, 이를 깨닫지 못했기에 헤매는 겁니다. 뭔가 끌리기는 해서 찾기는 찾는데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겉만 그럴싸해 보이는 껍데기를 죽어라고 쫓아다니는 형국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누구를,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니 기도의 주제 역시 비신앙인과 다를 바 없이 재물과 권력, 지위와 명예, 건강과 인맥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는 일찌감치 기도 밖으로 밀려나고 기복적인 요구만 주술처럼 읊기 일쑤지요. 그런 우리에게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을 향한 열렬한 추구와 지고한 사랑은 커다란 울림이 됩니다.
"그들이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아가 3,4)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행여 연인의 행방을 알까 싶어 물어보아도 성과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야경꾼을 연인으로 착각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이 간절한 사랑이 아가의 여인에게 사랑하는 이를 데려다 줍니다. 그녀는 비로소 사랑하는 이를 찾습니다!
오늘 독서 대목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바로 뒤에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아가 3,4)라는 여인의 외침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이, 주님을 찾은 영혼은 다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습니다. 헤어짐의 아픔과 상실의 공허가 너무 컸던 탓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영혼의 어둔밤을 지나면서 사랑을 향한 갈망이 더,더,더 짙어지고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자기 이름을 부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알아본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마리아의 심정으로 보자면, 당장 주님을 껴안고 꼭 붙들고 싶었을 테지요. 주님은 이를 모르시지 않으시면서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서 ... 전하여라."(요한 20,17)
사랑하는 영혼은 사랑하는 이를 소유한 순간에 고착되어 버리면 안 됩니다. 그저 머물고만 싶고 그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싶은 찰나일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 머무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 일치하는 영혼에게 머무름은 물리적 시간도, 정동의 구분도 뛰어넘습니다. 그녀가 사랑 중에 있으면서 그토록 분주히 움직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주님과 뜨겁게 일치하는 영혼은 사랑으로 기도하고 기도로써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인생 여정 안에서 주님을 더욱 열렬히 찾고 사랑하고 일치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며,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게 전구를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고 기도하는 영혼이 되길 축복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니 그냥 이쯤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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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여인들을 '예루살렘 부인들'이라고 하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마귀에 완전한 지배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고, 이후 예수님의 활동과 십자가 죽음의 순간까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뵙는 영광을 누렸고,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을 알린 첫 소식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일곱 마귀에 걸려 있었을 때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오늘 독서가 전하는 여인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아가3,4)
오늘 독서인 '아가서'는 밤새토록 성읍과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사랑하는 이를 찾은 신부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게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아 돌아다녔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받은 은혜에 보답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구원으로 이끄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삶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아,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꾸준히 애타게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꾸준히 애타게 주님을 찾읍시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 나의 삶이 변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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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리운 노랫소리에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니, 그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아쉬움과 후회에서 한동안 벗어나질 못합니다. 지나치듯 들려온 노래 한 곡에 사랑을 주고받았던 추억이 밀려듭니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사소한 어떤 계기에 수많은 기억이 소환되고는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분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분 곁에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고, 낯선 이들이 서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기억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른 상황 속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비록 처음에는 알아뵙지 못했지만, 그 사랑의 추억 때문에 자신을 부르시는 목소리에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발견하며 의심 없이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려면, 예수님과 나누었던 추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 추억들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합니다. 지나온 삶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기억을 잘 간직해 놓아야만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추억을, 그분에 대한 기억을 잘 간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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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카 8,2),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하나로(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 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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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이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1-13)”
1) 신앙은 항상 ‘현재’의 일이고, 신앙생활은 ‘지금’ 하는 생활입니다.
‘오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내일부터는’ 잘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의 내일’이라는 시간은 하느님만의 권한에 속해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또 ‘지금’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전에는’ 신앙생활을 잘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나도 전에는 예수님을 사랑했었다.”, 또는 “나도 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말은 ‘지금은’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보시는 분입니다.)
바로 지금 이곳에 나와 함께 살아계시는 주님을, 지금 믿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지난 일을 ‘추억’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2)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큰 슬픔에 빠졌고,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려서 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부활 신앙이 없는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해도 인간적인 믿음과 사랑일 뿐이고,
신앙인의 참된 믿음과 사랑은 아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사랑했던 ‘기억’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은
그의 슬픔을 더욱 크고 깊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기억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힘으로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베드로 사도의 첫 설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3-24).”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3) 요한복음에는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라고
묻기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려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왜 그분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고 있느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지 마라. 그분께서는 부활하셨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여인아, 왜 우느냐?” 라고 간단하게 기록한 것은 바로 뒤에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가 만나는 장면을 적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15절에 있는 예수님의 질문,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도
천사들의 질문과 같은 뜻이라고 해석됩니다.
<“내가 부활해서 네 눈앞에 있는데 왜 우느냐? 왜 나를 찾느냐?”>
마리아 막달레나가 천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큰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에 대한 기억,
또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겪었던 많은 일에 대한 기억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을 방해하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복음서에는 ‘마리아야!’ 라고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뜻을 생각하면, “마리아야! 내가 여기 있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고, 갑자기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없었던 부활 신앙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생겼을까?
마리아 막달레나 자신이 무슨 수행을 해서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은총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 말씀을 뜻에 따라 정리하면,
“나를 붙잡지 말고,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여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곧 올라간다고.”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사도들을 위한 사도’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사도들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 신앙이 아직 없었던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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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사랑하면 ‘라뿌니!’라고 부른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가장 큰 죄인 중 하나였다가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완전한 사랑에 반하여 부활한 당신 자신을 당신 제자들보다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본래 복음은 사랑이 높은 사람에게서 낮은 사람에게로 흘러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마리아가 사도들을 앞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가장 완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시신이 사라졌는데도 끝까지 그 시신을 찾으려 하고 그분을 만났을 때 ‘라뿌니!’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라뿌니는 스승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찾고 있었다는 것이 왜 막달레나가 위대한 제자일까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갑자기 보았다면 무엇이라 불렀을까요?
“예수님?”, “주님?”, “오마이 갓?” 뭐 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계속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시신을 통해서도 발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배워서 죄에서 벗어나 더 그리스도다워지기 위해 주님을 찾는 마음, 이것이 마리아의 영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갑자기 만났을 때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킹콩을 들다’(2009)는 전북 순창고 여자 역도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전북 순창고’ 여자 역도부 선수들은 정인영 감독 아래서 실제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5명의 선수가 15개 부문 중 14개의 금메달을 휩쓰는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전국체전이 있은 1년 후 정인영 선생님은 49세의 나이로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근무중 사망하게 됩니다.
조금 각색된 영화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시골 여중에 88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이지봉 선생이 부임합니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역도를 그만두고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하던 중 은사의 도움으로 시골 여중부 역도 코치로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역도로 남는 것은 우락부락한 근육과 부상뿐이라며 역도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도부에 지원자가 하나둘 생깁니다. 시골에서 낫질로 다져진 튼튼한 어깨와 통짜 허리를 가진 영자, 훌륭한 체격을 가진 현정과 보영, 아픈 엄마를 위해 역도선수로 성공하고 싶은 여순, 역도복의 섹시함에 빠진 사차원 소녀 민희.
지봉은 그들의 진심을 보고 역도를 가르쳐보기로 합니다. 그러는 중 과로로 그의 심장질환은 점점 심각해지기만 합니다. 목숨을 걸고 그들을 가르친 덕에 그들은 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며 지봉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게 된 것은 지봉의 후배이자 지봉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던 코치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폭력으로 가르치고 지봉의 제자들이었기에 더욱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지봉은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가던 중 길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합니다. 이때 아이들은 시합 중이었고 지봉의 부고 소식을 듣고는 시합에 집중하지 못하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코치는 선배 지봉의 부고 소식에도 아무런 내색도 없이 오히려 시합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을 폭력으로 몰아세웁니다. 더는 지봉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역도부 학생들은 자신의 여고 마크를 떼어버린 후, 매직으로 유니폼에 ‘이지봉’ 세 글자를 쓰고 시합에 출전합니다. 그들은 스승의 바람답게 좋은 결과를 내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자신 선생님의 관을 역기처럼 들며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선생님은 죽어도 그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선생님 때문에 삶이 변한 사람은,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시체라도 찾으려 합니다. 선생님의 유일한 바람은 제자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스승님’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갑자기 만났을 때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요?
현재 코로나 상황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또 미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분의 시신이 있습니다. 성경도 있고 영성 서적도 있고 유튜브 강의도 있습니다. 찾으려고만 하면 그분에게서 배울 아주 많은 그분의 자취가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무덤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배워야 할 것이 태산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도 찾지 않으면서 성체만 영하지 못하는 것에 슬퍼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리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배우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미사에 참례하지 못해도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스승으로 여겨주는 이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통해 변하는, 즉 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을 가장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같아지기 전에는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스승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라뿌니!’라고 부를 때, 그분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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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은혜롭게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손 내밀어주셨습니다!
시골 살다보니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읍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크게 내걸린 현수막을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자제분의 성공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경축! ○○○옹 장남 ○○○ 박사학위 취득’, ‘○○○ 선생 차남 ○○○ 서기관 진급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요즘은 그런 케이스가 드물지만, 과거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청운의 꿈을 품고 가난한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향했지요.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의 노력 끝에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 이른바 인생 대박 난 사람들은 가난하고 척박한 고향의 자랑꺼리요 자부심이었습니다. 성공한 자녀들이 한번 씩 고향을 방문하면 부모님들은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셨고, 마을 잔치도 열곤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역시 엄청난 인생의 대반전, 인생 초대박을 일궈낸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의 인생은 더 이상 손 써볼 수 없는 인생,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소개할 때 마다 단골로 사용되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란 표현입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7, 12 등의 숫자는 ‘완전한’ ‘꽉 찬’이란 의미입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린 마리아란 표현을 통해서 그녀가 앓고 있던 병고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적당히 마귀가 들린 것이 아니라 완전 마귀가 들렸던 것입니다.
하루에 한 두 시간 마귀에 횡포에 시달리다가 나머지 시간은 잠잠해지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번갈아가며 난리를 치니 그녀의 하루 온종일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죽음보다 못한 삶,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심정으로 마리아는 혹독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였는데, 은혜롭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발버둥 치다가 죽겠구나, 했었는데, 기적처럼 그분께서 다가오셨습니다.
한없는 자비와 연민의 시선을 지니신 분께서 능력과 사랑으로 가득 찬 당신의 손길을 마리아에게 펼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세상 화사하고 따뜻한 인생의 봄날이 마리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마리아였기에,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었습니다. 세상 좋은 것들에 대한 미련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 시간, 재산, 능력, 마음, 영혼,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예수님을 추종하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마리아의 인생 역전이 제 삶의 여정 안에 똑같이 반복되었음이 확실합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비참한 제 인생이었는데, 너무나 삶이 혹독해서 다 때려치우고 포기하고 싶었는데, 은혜롭게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손 내밀어주셨습니다. 일으켜 세워주시고 힘내라고 등을 두드려주셨습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 앞에 취할 행동을 다른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되살려 주신 주님의 크신 은총에 깊이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그분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계획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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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2017년 7월 22일 )
“마리아야!”
마리아라는 이름이 예수님 시대에 많아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인물에 대해서 아무래도 논란이 있습니다.
성경에 마리아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한 카파르나움에서 아래 서쪽으로 위치한 막달라라는 마을 출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마귀를 쫒아내신 마리아 막달레나(루카 8,2)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던 여인(마태 27,6),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다음 첫 번째로 만난 여인((요한 20,11-16)이며
스승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려준 여인(요한 20,18)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줄도 모르고 그분의 시신을 모시고 가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요한 20,15)
2003년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Dan Brown)이 쓴 미스터리 추리소설인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마리의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차원을 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막달레나와 예수님과의 인간적인 사랑이 배경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스승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게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다가 흥미위주의 픽션을 바탕으로 하는 이 소설이 논란에 휩싸이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등장하는 인물이나 단체의 허구성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그 진위가 밝혀진 것이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방향으로 흘러 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친히 뽑으신 12사도에는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주님을 사랑했던 마리아는 스승의 부활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 사실을 전하기는 했어도 사도들처럼 승계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들처럼 복음 선포의 행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는 12세기 이후에 특별한 신앙인의 모범인 성녀로서의 존경과 신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가서가 미사전례의 말씀의 전례에 채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뿐아니라 유대교에서 이 아가서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고 구구절절이 연인들의 표현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등장하는 여인은 사랑하는 님을 찾아 성읍을 돌아 다니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무리는 여인은 연인을 만나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아가 3,1-2)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새벽같이 시신에 기름이라도 발라 드리려고 왔던 마리아와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는 놀라움을 표현해주기도 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중심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께 대한 지극 정성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존경을 받게 합니다.
특히 주님 무덤을 먼발치에서 눈 여겨 보고 새벽같이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 드리려 무덤에 도착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다른 제자들 보다 월등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돋보이기도 합니다.
무덤 앞에서 울고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13ㄱ)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몰라보고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ㄴ)
그러한 마리아를 보시며 “마리아야!”(16절ㄱ) 마리아는 감격하며 대답합니다.
“라뿌니!”(16절ㄴ)
돌아가신 스승께서 나타나신 그 기쁨이 마리아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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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사도
지난 6월 3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뜻에 따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승격하여 지내도록 선포하였습니다. 이 성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역사상 다른 견해들이 있었습니다. 10세기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이날에 “향유를 들고 다니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기념해 왔습니다.
반면에 서방 전통은 대 그레고리오(540?-604) 성인의 해석을 따라,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죄 많은 여인(루카 7,37)과, 마르타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잘못 이해하여 회개의 본보기로 공경해왔습니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에 다른 모든 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의 지적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를 ‘죄 많은 여인’(루카 7,37)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셨습니다(마르 16,9). 그녀는 지독한 마귀에 걸렸거나 중병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마귀들은 그녀가 비도덕적인 생활을 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W. J. Herington).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도시와 촌락을 두루 다니신 예수님과 사도들을 동행한 제자 무리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루카 8,2-3). 그녀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실 때에 성모님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함께 십자가 아래에서 있었고(요한 19,25), 주님의 “무덤 맞은쪽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 27,61).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께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고 그리스도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성 라바노 마우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당신을 그녀의 스승으로 알려 주심으로써(요한 20,11-16) 그녀의 눈물을 파스카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 대한 항구하고 지극한 사랑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하느님 자비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빈 무덤을 본 첫 번째 사람이고 주님 부활에 대한 진리를 들은 첫 번째 사람이 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이었기에 그녀는 사도들에게 그분을 증언하는 첫 번째 사람도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전달자가 되며 사도들의 사도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녀는 사랑으로 충만한 진정한 참 복음화 일꾼, 곧 부활의 핵심적인 기쁜 메시지를 알리는 복음 선포자의 모범입니다(본기도와 새 감사송 참조).
우리 또한 주님께 대한 항구한 사랑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선포했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본받았으면 합니다. 사랑을 품고 사랑을 실행하는 이에게서 부활이 시작되고 부활의 기쁨이 선포됨을 가슴에 새기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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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신앙은 체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어떠한 체험을 한 후에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기쁨을 입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의 움직임과 감정을 잘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이유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강렬한 체험을 보여줍니다. 나의 부족함을 깨달으며 참회의 눈물이기도 하고 하느님 사랑으로 인한 큰 울림의 눈물이기도 하며 하느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빛나는 눈물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눈물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를 깨달았을 때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음에 아파할 때 그럴 때 흘리는 눈물은 두 눈을 가리고 있던 막을 벗겨버리고 있는 그대로 그분을 향하고 바라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바로 그러한 눈물을 흘립니다.
빈 무덤을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은
그녀의 마음 안에 자리하셨던 예수님의 빈자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만큼
그녀의 삶은 예수님으로 채워졌고
그분의 빈자리만큼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첫 사람이 되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흘린 눈물을 우리도 흘릴 수 있기를
그만큼 우리 안에 예수님을 채우고
그분을 향한 온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는
그런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689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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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막달레나의 마음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계실 거라고 생각한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께서 안 계신다는 걸 알고서 눈물을 흘립니다. 무덤 밖에서 서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울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녀가 울었던 것은 돌아가셨다는 슬픈 사실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셨어도 계셔야 할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뵐 수가 없었기 때문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는 이런 말달레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우는 모습을 보면 슬퍼서 운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면 기쁘고 행복해야지 왜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참 미묘한 감정입니다. 어제 제가 올린 글에 언급이 되어 있지만 저는 어머니뻘 되시는 본당에 자매님을 존경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분이 들으시면 무안하실 겁니다. 때로 막연히 성모님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분이라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성모님은 아니십니다. 그만큼 좋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부터는 저도 모르게 그분이 미사에 오셨는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보통 보면 그분이 자주 잘 앉으시는 자리에 앉으십니다.
제대를 향해 묵상기도를 하면서 정면을 응시하지만 간혹 눈과 시선, 마음은 자매님이 앉아계시는 자리로 눈이 가곤 합니다. 미사가 시작되는 시간이 되어 입당송을 하게 되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으시면 오늘 미사 참례하지 않으시구나 하고 미사에 집중을 합니다. 사정이 있으셔서 못 오셨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멀리서나마 얼굴이라도 한 번 뵈면 기분이 좋은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슬프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뵙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전례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이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달래고 전례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전례에 집중을 한다고 해도 제 머릿속 무의식 속에는 아마 그분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면요 영성체 시간에 성체를 모시러 제대로 향해 가거나 성체를 영하고 제 자리로 돌아올 때 제대로 나가는 행렬 속에 그 자매님이 계시거나 자리에서 성체를 영하고 기도를 할 때 마지막 줄에서 자매님의 모습을 볼 때가 간혹 있습니다.
자매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면 그때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제 가슴에 따뜻한 행복한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분의 얼굴을 잠시 뵙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 비교를 할 수가 없겠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막달레나 성녀도 물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을 만나 뵈려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갔지만 계시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어떨지는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 사람도 이런 마음인데 내 모든 마음을 다 바쳐서 사모하고 스승님이라고 따랐던 분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그때 그 심정은 아찔하고 어떻게 표현을 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물론 성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해서 그 느낌이 더 실감났을지는 모르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도 막달레나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방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 미사 참례 하나만 상정해서 한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는 자매님을 나중에 만났을 때 반가웠던 것처럼 우리의 머릿속에는 무의식 속에 전례 속에서 특히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늘 으레 하는 성사라고 생각해 또 늘 습관적으로 하는 영성체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 실제 예수님을 만나 뵈면서도 그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참례할 때 아마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막달레나 성녀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그때 그런 심정으로 미사에 참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미사를 참례한다면 영적으로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라뿌니” 하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뵐 수 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추측하고 상상을 하지만 그때 성녀가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예수님께서 성녀에게 ‘짠’ 하고 나타나시지 않았을까 묵상해봅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우리가 영적으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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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7월22일 토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아가3,1-4ㄴ)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1)
아가서 2장 8절~17절은 오랜만에 재회한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두 연인이 서로에 대한 연모의 노래를 부르는 내용이다.
이어지는 아가서 3장 1~5절까지는 꿈 속에서 솔로몬을 찾아 헤매다 만난 술람미 여인의 애틋한 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앞의 내용은 실제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온 현실 가운데 이루어진 일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아가서 3장 1~5절은 꿈 속에서 있었던 일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이다.
저자가 술람미 여인의 꿈속에서 있던 일까지 기록한 것은 오페라 형식의 사랑의 찬가인 아가서의 다양한 배경 중의 한 부분을 차지하여 그 무대와 등장 인물의 활동 영역의 다양성을 넓혀준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처녀는 혼인식을 올릴 때까지 외부 출입을 삼갔기 때문에 이 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 속의 이야기이다.
밤에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가 있다면 매춘부(잠언7,8~10)로 밖에 볼 수 없고, 아가서 3장 4절에 나타난 대로 이스라엘에서 여인이 남자를 자기 어미의 집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그 남자가 결혼한 남편일 경우에 국한되므로 이것은 꿈 속의 이야기인 것이다.
꿈에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건도 이루어지고, 그녀가 연인을 찾기 위해 밤마다 돌아다니는 것도 꿈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잠자리에서'로 번역된 '알 미쉬카비'(al mishikabi)는 '나의 침상에서' (on my bed)라는 전치사구인데, 본래 동사가 문장의 첫 머리에 배치하는 히브리어 문장 구조와 비교할 때 특별한 강조의 의미로 앞에 나온 것이다.
또한 '밤새도록'으로 번역된 '빨렐로트'(ballelloth)는 전치사 '뻬'(be)에 정관사 '하'(ha), 그리고 '밤'을 의미하는 '라일'(lail)의 복수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렇게 '밤'을 복수형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 어떤 번역본은 '밤마다' (night after night), 또 어떤 번역본은 새 성경처럼 '밤새도록', '온 밤에' (all night)로 번역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연인 솔로몬을 '밤마다' 혹은 '밤새도록' 계속해서 찾았음을 나타내준다.
'마음에'에 해당하는 '나프쉬'(napsh)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목숨', '생명', '영혼'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는 '레브'(leb)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페쉬'가 사용된 것은 술람미 여인의 솔로몬에 대한 사랑이 생명을 건 사랑이며,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온 참 사랑임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앞의 '찾으려 하였건만'에 해당하는 '삑카쉬티우'의 원형 '빠카쉬'(baqash)는 강조 능동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강한 열망과 염원과 밀착되어 무언가를 알기 위해 '묻다', '찾다', 그리고 물건이나 정보를 확보하거나 획득하기 위해 '찾다', '요구하다'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찾아내지'에 해당하는 '메차티우'도 '찾다', '발견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마차'(matsa)의 완료형이다.
두 동사가 모두 3인칭 어미 '우'(u)로 끝맺고 있으며, 3인칭 어미가 한 번만 사용되어도 되는데 두 번 사용된 것은 발음상의 대구를 이룸과 동시에 '그를' 찾고자 하는 술람미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복음(요한20,1-2.11-18)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7)
'나를 붙들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무 합투'(me mu haptu)에서 '붙들지'에 해당하는 '합투'(haptu)는 현재 명령형이고, '메'(me)라는 부정어가 사용되어서 현재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위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합투'(haptu)의 원형 '합토마이'(haptomai)는 '비끄러 매다', 즉 서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매다라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속해서 강하게 붙들고 있는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놓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아마도 부활하기 전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뒤의 예수님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마리아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당시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예수님을 만났으므로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꼭 붙들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곧 만져질 수 있는 상태에서 만져볼 수 없는 상태로 바뀌어야 했다.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과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승천하셔서(사도1,9)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야 했기 때문에, 계속 육신을 지닌 채 머물 것을 강요하는 듯한 마리아의 행동을 자제시킨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당신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며, 나머지 사명들을 그들에게 위임하신 후에 아버지께로 가실 것이라는 사실과 가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점진적으로 깨달아 갔다.
특히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구원사적 계시를 깨닫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이 요한복음 20장 11~18절에서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바이다.
첫번째 부활에 대한 깨달음은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부름에 의해서, 두번째 승천에 대한 깨달음은 17절에서 '나를 붙들지 마라'는 교훈에 의해서 암시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을 말씀을 통해 조금씩 더 풍부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자신의 영적인 귀를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개방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진보는 없다(묵시2,7).
한편, '올라간다'에 해당하는 '아나베베카'(anabebeka)는 '아나바이노'(anabaino)의 완료형 동사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강조함으로써 이렇게 당신이 마리아와 머물러 있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계획을 진행시키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본문은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하는데, 나의 사명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승천을 서로 단절된 별개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구원 사업의 연속선상에서 당신 자신이 이루어야 할 구원사업의 마지막 마무리로 보고 계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아나바이노'(anabaino)가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으로 기록된 사실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승천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승천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을 망각하고 당신 자신을 이 땅에 계속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17절의 마지막 문장은 '(너는)가서 ~전하라'('포류우 ~에이페'; poreuu ~eipe; go ~say)라는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부활하심으로 끝나지 않고 이제 얼마있지 않아 승천해야 할 예수님을 붙들고만 있는 마리아에게 지금 바로 그녀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예수님 공생활 초기를 묘사하고 있는 요한 복음 1장 39절의 '와서 보시오'(come and see)라는 명령과 서로 대구를 이룬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사업은 '데리고 와서 보여 주는 일'로 시작되었고, '내보내서 전하게 만드는 일'로 마친다고 볼 수 있다(요한20,21).
우리도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보고 들은 것으로 자족하지 말고, 그것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사도1,8).
신약의 아가서
“마리아야! 라뿌니!”(요한 20,16).
아 가 서 | 요한복음 |
친구들↘ “그대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아가 5,9). | 천사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3). |
여 자↘ “나의 연인은 눈부시게 하얗고 붉으며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아가 5,10). | 마리아↘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3). |
친구들↘ “그대 연인은 어디로 갔는가?”(아가 6,2) | 예수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
여 자↘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 그이는 나리꽃 사이에서 양을 친답니다.”(아가 6,3). | 마리아↘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 |
남 자↘ “나의 애인이여!”(아가 6,4) | 예수님↘ “마리아야!”(요한 20,16). |
여 자↘ “오셔요!”(아가 7,12). | 마리아↘ “라뿌니!(스승님)”(요한 20,16). |
남 자↘ “그대여, 친구들이 그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려.”(아가 8,13). | 예수님↘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
여 자↘ “일어라, 북새바람아! 오너라, 마파람아! 불어라.”(아가 4,16). | 마리아↘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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