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그 가운데 씨뿌리는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 비유와 겨자씨 비유는
농사와 관련있는 비유입니다.
어린시절 농촌에서 자랐지만
가라지와 겨자씨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수록되었는데
말씀으로 익숙한 가라지를 식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보리와 밀 농사를 많이 지었지만
밀밭에 자생하는 가라지, 학명으로 독보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논의 벼가 자랄 때 피가 자라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벼와 함께 자라는 피를 가라지로 이해하였습니다.
밀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라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요즘처럼 밀 농사를 짓지 않는 시대는 가라지를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가라지 곧 독보리는 원산지가 유럽이며
우리 나라의 벼와 비슷한 피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피는 곡식이 아니기 때문에
추수할 때 반드시 쭉정이로 날려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가라지 신앙, 곧 독보리 신앙에 대한 주의보와 경계령은
진리의 전당을 자처하는 이단의 깨어있는 의식이라는 사실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단의 역발상, 그 깨어있는 의식은
종말론적인 추수마당이 되었습니다.
성서의 뿌리를 둔 모든 종교는
그 주요한 말씀에 대한 주도권을 가졌습니다.
주요한 말씀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 이단의 역발상은
가라지 신앙, 독보리 신앙의 주의보와 그 경계령으로 쉴드를 치고 있습니다.
파수대의 경계에 께어있는 이단에 비해 기성 교회는
가라지 신앙과 독보리 신앙의 경계가 약하거나 없습니다.
어쩌면 농부의 밭에 곡식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에 대한 이해와 분별력이 없어
가라지든 독보리든 피든 모두 곡식의 알곡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서로 다른 교회에 대한 배타적 이해보다
종교 다원주의 가치로 혼합된 의식을 가졌습니다.
WCC가 대세라는 종교 다원주의는
크리슬람과 같은 종교간의 통합과 혼합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합된 종교의식은
종말론적인 가라지 신앙과 독보리 신앙을 우후죽순으로 양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라지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농부의 밭에 가라지를 덧뿌리는 원수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깨어있지 않은
혼미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곡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씨도둑을 할 수 없다는 옛말처럼 원수가 덧뿌린 씨는 곡식이 아니라 가라지입니다.
이단의 뿌리와 그 씨는
곡식의 가라지요, 그 독보리일뿐입니다.
약초와 독초도 비슷하지만 다르듯
곡식과 가라지는 뿌리가 다르고 그 열매가 다릅니다.
약초인 우산나물은 독초인 삿갓나물과 비슷하며
곰취는 동의나물과 비슷하며, 하수오는 박주가리와 비슷하며, 산마늘은 박새와 비슷하며
원추리는 여로와 비슷합니다.
오늘날 강단의 설교는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지 않고
비전과 영성과 치유와 성장과 성공과 번영과 건강과 행복의 다른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도적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교훈을 따르는 인본주의 설교에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밭의 곡식이기를 바라는 것은 가라지의 외식과 그 야성일 것입니다.
목사님, 목사님, 우리 목사님, 그 하시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맹신은
가라지 신앙, 그 독보리 신앙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샤마니즘과 주술신앙과
무속 신앙과 인본주의 신앙의 향연되었습니다.
참으로 외식하는 설교의 현주소는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는 예레미야 경고와 판박이입니다.
☞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