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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4
믿음의 이정표를 세우라. / 한서노회
우리는 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황홀한 체험을 함께 목격했습니다. 새벽부터 믿음으로 무장한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독려합니다. 제사장들에게는 언약궤를 메고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앞으로 나아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1km정도의 거리를 두고 모든 백성들이 그 뒤를 좇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 앞에 보이는 언약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하나의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앞서 행하시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얼마 후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그들의 발을 들여놓습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둑에까지 물이 가득한 요단강이 좌우로 갈라지고 강바닥이 드러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갈 통로가 열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얼마나 황홀한 체험입니까?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와 같은 체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인생 길에 가로막혀 있는 요단강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갈라주셔서 우리 역시 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요단강을 마른땅처럼 건너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믿고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황홀한 역사가 일어난 직후의 일들을 낱낱이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 말씀을 보세요. 여기에는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행했던 일이 한 가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 하라"
요단강을 건너느라고 잔뜩 흥분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거의 모든 백성들이 허겁지겁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입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12지파로부터 각각 한 사람씩을 선출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아직 갈라져 있는 요단강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제사장들이 서있는 곳까지 다시 가서 그곳에 있는 돌을 하나씩 들고 오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여호수아의 행동은 매우 의아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여호수아가 무엇 때문에 저러한 일을 시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백성들은 그들의 궁금증을 풀게 됩니다. 본문 6절과 7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할렐루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여호수아가 그 바쁘고 분주한 중에 왜 요단강에서 열 두개의 돌을 가지고 올라오게 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 열 두개의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너희의 표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표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오트'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기념', '증거', '표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이 여호수아가 굳이 요단강으로부터 열 두개의 돌을 가지고 올라온 이유입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넜다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요단강을 마른땅을 걸어가듯 건넌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이 일은 그야말로 놀랠 '노'자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꿈을 꾸는 듯 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 일을 위한 기념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음은 요단강 도하의 증거입니다. 요즘은 참으로 편리한 시대입니다.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캠코더를 가지고 원하는 모든 장면들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에는 그와 같은 영상장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열 두 개의 돌을 가지고 요단강 도하의 사건을 증거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표시를 위함입니다. 어린 시절 이런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눈앞에 있을 때 우리는 '찜'이라고 했습니다. 손끝에 침을 발라 '찜'하면서 이젠 내 것이라고 표시합니다. 지금 요단강에서 올라온 돌들을 놓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단강 도하는 바로 내가 경험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는 바로 내가 경험한, 나만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표징'이라는 단어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세요. 궁극적으로 이러한 표징이 필요한 이유, 이러한 표징이 필요한 대상은 누구입니까? 먼저 본문에만 국한해서 그것을 찾아본다면 그 답은 그들의 자손들입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 요단강 도하를 직접 경험한 이들에게는 굳이 어떤 기념비들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체험했으니 그 체험을 잘 간직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경우가 다릅니다. 당시 매우 어린 자녀들을 비롯해서, 앞으로 태어날 세대들에게 요단강 도하는 마치 동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러한 점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 한 세대에게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다음 세대에서는 사장되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열 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그것을 요단강 도하의 표징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표징을 가리켜 오늘 이 시간에 '믿음의 이정표'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운전을 하시는 분들은 종종 '이정표'의 고마움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특히 초행길을 갈 때에 저에게는 '이정표'처럼 고마운 것이 없습니다. 함께 동행하는 분들에게 종종 누가 이런 곳에 이정표를 세워놓았는지 참 고마운 일이라고 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어디를 가든 초행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차를 타고 방향을 정하고 가다보면 제가 목적하는 곳을 가리켜 주는 이정표가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정표가 신앙의 세계에도 있습니다. 특히 부모님들의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는 자녀들에게 이 믿음의 이정표는 두 말할 것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이 어떠한 믿음의 이정표를 세우느냐에 따라서 초행길인 믿음의 길에서 승리할 수도 있고,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열 두 개의 돌을 요단강에서 가지고 올라온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할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이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이 믿음의 이정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와 여러분들보다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된 우리 믿음의 후배들입니다. 이들 역시 믿음의 세계에서 초행길을 달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 초보운전을 경험하신 분들은 그 때의 심정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요즘 세간에 돌고 있는 이야기 가운데 역대 대통령들을 운전에 비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보운전, 박정희 대통령은 과속운전, 전두환 대통령은 난폭운전, 노태우 대통령은 음주운전, 김영삼 대통령은 무면허운전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그 중에서 초보운전 때의 경험을 생각해 보세요. 백미러 보랴, 신호등 보랴, 액셀레이터를 밟으랴, 브레이크를 밟으랴 도무지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정표마저 없어 보세요. 과연 이 초보운전자가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믿음의 이정표를 세우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성경도 이와 같은 사실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3장 15절과 16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p. 380)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보세요.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우리 곁에 다가와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불신자들일 수도 있구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사도 베드로는 당부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이와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왔을 때에 우리가 주저하거나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리나 벅벅 긁고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합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오늘의 본문에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이정표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든지, 그것이 자녀들이든지 내가 전도하는 사람이든지 혹 믿음의 후배든지 간에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이정표가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그것이 밥을 먹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매우 바쁘고 분주한 때에든지 그 때에도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이정표가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그것이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학교에서든지 그 곳에서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이정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호수아에게 이를 위해 요단강으로부터 열 두 개의 돌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일이 마쳐지자 지금까지 요단강 안에 언약궤를 메고 서있던 제사장들이 육지로 올라 왔습니다. 그러자 갈라졌던 요단강이 전처럼 다시금 강둑까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 땅에 들어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문 곳은 길갈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믿음의 이정표의 중요성을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본문 20절부터 24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이것이 믿음의 이정표를 세워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24절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자랑하고 선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분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알려야 합니다. 그 분이 온 세상에 살고 있는 뭇 사람들이 반드시 섬기고 따라야 할 하나님이심을 알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의 이정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 새벽 간절함으로 드려야 할 기도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이정표'는 무엇입니까? 물론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저의 관심은 그 말씀을 기초로 해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 세워져 있는 '믿음의 이정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의 삶 속에 나름대로 우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 이정표들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가리워지거나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 새벽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이정표가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혹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나에게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믿음의 이정표가 없는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번 4이레 작정 새벽기도회가 저와 여러분에게 또 다른, 그리고 새로운 믿음의 이정표로 세워지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작정 새벽기도회 기간동안 내게 응답하시고, 내게 능력과 은혜를 더하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또 하나의 믿음의 이정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친구들,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에 그 믿음의 이정표를 담대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