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가 주는 은혜
고린도후서 12 : 1 – 11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체험했습니다(2). ‘14년 전에’라고 한 것은 자신의 체험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정확한 때를 말하며 ‘참말을 함이라’(6)고 했습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은 첫째 하늘은 새가 날아다니고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며, 둘째 하늘은 구름 위에 물을 저장하고 있는 하늘이며, 셋째 하늘은 그 위에 끝없이 맑고 넓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셋째 하늘은 낙원(4)이라고도 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지라’(2,3)라고 두 번이나 거듭 말한 것은 그의 뜻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는 말은 신비한 체험을 ‘몸을 떠나서’ 이루어졌는지 ‘몸을 가진 상태’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영으로 체험한 것인지 육을 가진 체로 체험한 것인지 잘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잠깐 소개하셨던 ‘낙원’(눅23:43)은 죽음 후에 의인들의 영혼이 들어가서 부활하기까지 위로받는 곳으로 바울은 ‘셋째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는 말은 그가 본 낙원이 신적이고 신비적인 비밀들이 너무 신비하여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증집회 강사로 다니는 어떤 분은 자신이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고 말하며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성경 말씀과 다름으로 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듣고 지나치게 신비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자랑하지 않았습니다(6). 그러나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1).
‘사탄의 사자’라고 말한 것은 바울이 ‘가시’로 인하여 당한 고통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가시가 손끝에 질려도 온몸이 아파 괴로워하는 것처럼 바울이 괴로워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가시’가 무엇인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학자들은 그의 육체에 고통을 주는 어떤 질병이거나 장애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빛을 보고 눈이 어두워서 한동안 볼 수 없게 되었던 그 후유증으로 안질로 인한 고통이었을 것으로 말하지만 추측일 뿐입니다.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13권)을 기록했습니다. 그때마다 누가가 대필하고 마지막에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고전16:24)고 말했습니다.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말한 것은 그의 사역에 크게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허용을 받고 사탄이 욥을 시험했던 것처럼 바울에게도 ‘내 육체에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욥1:112).
아무튼 바울에게는 그의 삶에 방해가 되었던 가시가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는 가시를 육체에서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 주님께 간구했습니다(8). ‘간구’했다고 한 것은 그의 고통스러운 질고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던 것처럼 바울도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눅22:44).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이 원했던 것과 상반된 매우 친절한 거절이었습니다.
우리도 기도한 대로 응답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한 것과 상반된 응답으로 나타날 때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 은혜’라는 말씀을 듣고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고통을 그대로 지닌 채 만족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를 ‘은혜’라고 말씀하신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기도한 것과 상반된 응답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이해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더 큰 영광스러운 ‘은혜’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가시가 주는 은혜’ 몇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육체의 가시가 주는 은혜는 ‘자만’하지 않게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
‘자만’은 ‘교만’보다 한 수 높은 스스로 자랑하여 뽐내는 것으로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바울은 어느 사도들도 받지 못한 지극히 큰 환상과 계시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자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은 남들이 하지 못한 것을 했을 때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롬1:30),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는 자입니다(약4:6).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을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자신에게 가시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둘째로 육체의 가시가 주는 은혜는 ‘온전하여 짐’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9).
‘온전하여 짐’이란 책망받을 만한 허물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함께 하심으로 온전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한 것을 자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며 자만하여 매우 불행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자가 될 뿐 아니라 스스로 교만하여 불행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약할 때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허물이나 책잡을 일이 없는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육체의 가시가 주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머물게’란 말은 헬라어로 ‘장막을 펴고 확고부동하게 머물다’란 의미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머물러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머물게’란 ‘장막으로 덮게’ 또는 ‘이적’이라고 했습니다(난하). 하나님의 영광이 광야의 이스라엘 장막 위에 임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넷째로 육체의 가시가 주는 은혜는 강한 자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10).
바울은 자기가 겪은 온갖 박해, 모욕, 고난 등이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당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한 자가 되어 이겼습니다. 그래서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가시와 같은 질고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약한 그때가 곧 강함을 알고 자신의 약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에 참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쳐줍니다.
육체의 가시는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육체를 괴롭히는 크고 작은 가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고 주님께 가시를 떠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가시’ 때문에 자만하지 않게 됩니다. ‘가시’ 때문에 온전하여지게 됩니다.
‘가시’ 때문에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러 덮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가시’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됩니다. 우리도 ‘약한 그때가 강함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고통을 싫어하고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실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함을 강하게 하십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태도를 취하는 순간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오묘한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한 것을 불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시가 주는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신의 약함으로 강해짐을 자랑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합니다.
만약 바울의 간구를 듣고 주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여 주셨다면 바울은 육체의 건강을 자랑하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와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때 바울은 자만하고 온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주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함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체험한 셋째 하늘, 낙원에도 들어갈 수 없는 매우 불행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가시가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육체적인 약함으로 인하여 전능하신 주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가시가 주는 은혜는 자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함께 하심으로 온전하게 됩니다. 성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며 함께 하시는 영광이 됩니다. 약한 그때가 강한 자가 됩니다.
우리 모두 가시가 주는 은혜를 받읍시다. 바울이 이끌려 들어가서 체험했던 셋째 하늘 낙원에서 영생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시는 날 바울에게 환상과 계시로 보여 주셨던 셋째 하늘 낙원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셋째 하늘, 낙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