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한 공식적인 북벌은 총 **5차례**입니다. 228년부터 그가 오장원에서 성령을 거둔 234년까지, 약 7년 동안 다섯 번의 거대한 대장정이 펼쳐졌습니다.
각 북벌의 핵심 사건을 요약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1차 북벌 (228년 봄) — '가정 전투'와 읍참마속
* **내용:** 제갈량의 북벌 중 **가장 승리에 가까웠던 순간**입니다. 조운을 미끼로 보내 위나라 본대를 낚아놓고,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격하자 위나라의 3개 군이 싸우지도 않고 투항했습니다. 이때 촉나라의 보물인 **강유(姜維)**를 얻기도 했습니다.
* **결말:** 하지만 요충지였던 '가정'을 지키라 보낸 마속이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사마의(정사에서는 장합)에게 참패하면서,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베고(읍참마속) 후퇴했습니다.
### 제2차 북벌 (228년 겨울) — '진창 전투'와 학소의 방어
* **내용:** 육로 대신 단거리 코스인 '진창'이라는 성을 기습했습니다. 당시 위나라의 명장 **학소**가 단 1,000여 명의 군사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수만 대군이 온갖 공성 무기(충차, 정란 등)를 동원해 20여 일간 맹공을 퍼부었으나 끝내 뚫지 못했습니다.
* **결말:** 군량이 떨어지고 위나라의 구원병이 오자 제갈량은 철수했습니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위나라 장수 왕쌍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 제3차 북벌 (229년 봄) — 무도·음평 석권 (유일한 영토 확장)
* **내용:** 제갈량이 직접 대군을 움직이기보다, 장수 진식을 보내 위나라의 국경 지대인 **무도(武都)**와 **음평(陰平)** 2개 군을 공략하게 했습니다. 위나라의 곽회가 구원하러 왔으나 제갈량이 본대를 이끌고 배후를 위협하자 곽회는 퇴각했습니다.
* **결말:** 제갈량의 북벌 중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위나라의 영토를 빼앗아 촉나라 땅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 작전입니다.
### 제4차 북벌 (231년) — 사마의와의 전면전과 이엄의 배신
* **내용:** 다시 기산으로 진격하여, 본격적으로 위나라의 총사령관이 된 **사마의와 정면 승부**를 벌였습니다. 제갈량은 이 전투에서 자신이 발명한 운송 수단인 '목우류마'를 처음 선보였고, 사마의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압박했습니다.
* **결말:** 승기를 잡아가던 중, 후방에서 군량 수송을 책임지던 촉나라 중신 **이엄**이 비 때문에 수송이 늦어지자 책임을 회피하려고 "황제의 명이 오니 회군하라"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철수했고, 퇴각 중 추격해오던 위나라 최고의 명장 **장합**을 매복 작전으로 사살했습니다.
### 제5차 북벌 (234년) — 오장원에 지는 별
* **내용:**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입니다. 장안 근처의 **오장원(五丈原)**에 진을 치고 사마의와 대치했습니다. 제갈량은 군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둔전책'까지 쓰며 장기전을 준비했습니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뛰어난 전술을 두려워해 성문을 굳게 닫고 여자 옷을 보내 도발해도 절대 싸우러 나오지 않는 '침대 축구' 전술로 버턌습니다.
* **결말:** 과로와 스트레스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제갈량은 결국 234년 8월, 오장원의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촉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비밀리에 철수했고, 사마의는 뒤늦게 추격하려다 제갈량의 목조 인형을 보고 놀라 도망쳤다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일화를 남겼습니다.
> **💡 참고: 촉나라의 북벌이 총 11회라고 하는 이유는?**
> 제갈량이 사후 촉나라의 군권을 물려받은 수제자 **강유(姜維)**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무려 **9차례나 더 북벌**을 감행합니다. 그래서 촉나라 전체의 북벌 횟수를 따질 때는 제갈량의 5차례와 강유의 9차례(일부 소규모 작전 포함 또는 제외에 따라 횟수가 다름)를 합쳐 보통 '11차 북벌'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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