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9(월)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능력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
라며 나가 버렸다. 이렇게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 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결국 링컨은 자기를 미워했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한 진정한 승리자였던 것이다.
- 좋은 글 중에서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에이브러햄 링컨(1809년 2월 12일~1865년 4월 15일)은 1861년 3월부터 암살된 1865년 4월까지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부적 위기로부터 나라를 이끌어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하여 연방을 보존하였고, 노예제를 끝냈다. 당시 미국 서부 변방의 개척지에 사는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기 보다는 혼자서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일리노이 주 의원이 되었고, 미국 하원의원을 한 번 했지만,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두 번 실패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자상한 남편이었고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링컨은 미국의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서 공개적인 반대자였으며, 선거 기간 중 토론과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 결과 그는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는 임기 중 일어났던 남북전쟁에서 북부주를 이끌며 미합중국에서 분리하려 노력했던 남부연합에 승리를 거뒀다.
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군사적, 정치적 양면으로 내전 승리에 집중했으며, 미국 남부 주의 분리 독립 선언 이후, 그 주들과 통합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그는 전례없는 군사 조치를 취했으며, 분리 독립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수감하거나 구금 조치를 취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의 선발에 깊이 관여하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공화당 내 여러 분파의 지도자를 내각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의 분파가 협력하도록 잘 조정했다고 말한다. 링컨은 1861년 말 트랜트호 사건에서 영국과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위기를 잘 해결했다. 링컨의 리더십 아래, 북군은 남북의 경계가 되던 주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 링컨은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다시 승리했다. 공화당의 중도파 수장으로서, 링컨은 모든 방향에서 비판을 받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공화당 급진파에서는 남부에 대해 더욱 강한 조치를 촉구했으며,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에서는 평화와 협상을 촉구했다. 분리독립주의자들은 링컨을 적으로 보았다. 링컨은 반대파에 지원책을 폄으로서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으며, 뛰어난 수사학 이용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게티스버그 연설은 미국의 전통인 자유주의 곧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이 되었으며,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로 손꼽힌다. 전쟁이 종료돼 가면서 링컨은 전후 재건에 대해 신중한 시각을 보이며 관대한 화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남부연합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의 큰 패배가 있은지 6일 뒤에 링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 중에 암살되었다. 링컨은 지속적으로 전문가들에게서 모든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으며 영웅, 성자, 순교자가 된 실제 키(197 cm)만큼 역사의 거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성립 당시의 13주 이외의 지역[6] 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5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에드윈 M. 스탠턴
에드윈 맥마스터스 스탠턴(Edwin McMasters Stanton, 1814년 12월 19일 ~ 1869년 12월 24일)은 1862년부터 1865년의 미국 남북 전쟁 기간 동안 링컨 행정부에서 육군장관으로 복무한 미국의 법률가이자 정치인이다. 스탠턴의 효율적인 관할로 말미암아 북측의 막대한 군사 자원을 정비하고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링컨의 암살 이후 스탠턴은 새 대통령 앤드루 존슨 아래에서도 재건 초기 수년에 걸쳐 육군장관의 직책을 유지하였다. 그는 전 아메리카 남부 연합에 대한 존슨의 관대한 정책에 반대하였다. 존슨은 스탠턴을 추방하려고 애썼고 이로써 하원은 그를 탄핵하기에 이른다.
링컨과 스텐턴
실패라면 링컨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인들이 존경하며 떠받드는 그는 36번이나 실패한 사람이다. 그가 실패와 고통을 처절하게 맛보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자신의 최대 정적(政敵)인 스탠턴을 전시국방장관으로 발탁할 수 있는 자질이 되었을까? 링컨은 기꺼이 임명했다. 요즘으로 치면 오바마 대통령이 라이벌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기용한 것과 같다. 참모들의 반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스탠턴만한 장관 감이 있다면 데리고 오라. 그럼 쓰겠다.”
1850년 미국의 워싱턴에서 애드윈 스텐턴이라는 변호사와 에이브러햄 링컨 변호사가 특허소송으로 맞붙었다. 스탠턴은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똑똑하고 유능해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링컨은 시골에서 태어나 학교라고는 6개월밖에 다니지 않은 촌뜨끼였다. 스탠턴은 미남에 호감을 주는 이목구비였지만, 링컨은 야윈 얼굴에 주름이 많고 어깨는 구부정했다. 스탠턴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오만해 촌뜨기 링컨 변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같은 호텔에 묵어도 스텐턴은 링컨을 무시했다. 링컨인 대통령이 되었다. 같은 정치인이 된 스탠턴은 링컨을 혹독하게 비평했고, 날카로운 라이벌로 10년이나 공격했다.
그해 4월 남북전쟁이 터졌다. 링컨의 북군이 계속 밀리자 링컨은 새로운 장관을 찾았다. 이때 떠오른 인물이 스탠턴이었다. 정적 스탠턴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명장의 이름을 남겼다.
1865년 링컨이 워싱턴 시내 포드극장에서 공연을 보다가 암살범의 권총을 맞았다. 링컨은 길 건너편 가정집 1층 침대에 눕혀졌다. 많은 각료가 침대를 지켰다. 가장 오래 링컨의 곁을 지킨 사람은 스탠턴이었다. 링컨이 숨을 거둔 후 스탠턴은 말했다. '시대는 변하고 세상은 바뀔지라도 이 사람은 온 역사의 재산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그 이름 영원하리.“ 역사 속에 링컨이나 스탠턴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우리는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단점을 보지 않고 장점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단점은 우리를 낙심케 하지만 장점의 희망이 우리의 삶을 전진하게 한다.
5월 8일(일). 황금의 연휴 마지막 날입니다. 날씨도 너무도 화창했습니다. 이런 좋은 연휴를 더 알차게 보내지 못하고 아쉽게도 금방 사흘이 흘렀습니다.
일요일 아침 오늘도 아르바이트생이 못미더워 영등포 cafe로 일손을 돕고자 출근하는 아들녀석이 안스러워 영등포까지 배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깐, ,젏은 청춘인 아들녀석이 집에서 편히 쉬는 것도 어쩜 病이 날 것 같았습니다. 여자 친구가 cafe에서 도와주기에 어쩜 시원한 곳에서 둘만의 멋진 데이트를 하는 것도 좋을 듯했습니다. 영등포에 간김에 돌아오는 길엔 용산성당에 들렸습니다. 12시 미시를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오랫만에 옛날 형제분들의 얼굴도 보고 싶어서 용산성당을 찾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주차장이 꽉 막혀서 정작 옛 형제님들과 인사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것이 더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이곳 용산까지 온 김에 회사에 들려 상가주변을 순찰했습니다. 연휴기간에 쉬지도 못하고 경비근무를 하는 직원들과 또 시설관리부 당직자들도 한번 둘러 보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지요. 때마침 연휴기간임에도 우리 회사 본관건물에는 입점예정인 업체가 내부 공사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잠시 밀린 업무를 하가다 오늘 집에 혼자 있을 마나님이 걱정되어 용산으로 호출을 했습니다. 함께 점심을 나누고자 했는데, 울 마나님은 감격에 겨워 총알 같이 1711호 시내버스로 달려왔습니다.
하여 함께 원효로 소재 '봉평 메밀국수식당'에서 모밀과 모밀전으로 점심을 함께 하여 참을 행복했습니다. 마나님은 시내에 까지 나온김에 아빠의 여름 옷을 사야겠다며 이끌어서 신촌 현대백화점으로 갔지요. 직장생활을 하는 남푠의 여름 셔츠를 좀 고급스러운 것으로 사야한다며 무려 2시간을 백화점에서 죽쳤습니다. 셔츠 2벌, 등산복 상하 1벌을 구입했는데, 정작 마나님은 자기옷을 절대로 안사겠다고 우겨서... 흑~흑~흑~
등산복 바지의 단을 수선해야하기에 약 1시간을 기다리면서 백화점 지하 마켓에서 시장도 보고 또 차도 마시다 보니 어느덧 저녁나절이 되었습니다.
집에 귀가하여서는 TV 복면가왕을 시청했는데, 무려 8연승을 질주하는 '음악대장'님의 놀라운 쾌거에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무적의 대기록 수립"이었습니다.
어떻든 아주 많이 보람있는 하루였습니다. 마나님이 백화점 지하코너에서 구입해온 홍합과 새우 퓨전요리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정말 별미였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