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 벌교읍 태백산맥 문학관탐방
벌교읍 서편 부용산에서 내려다본 풍경. 읍내를 통과한 벌교천 갯물이 느릿느릿 여자만으로 흘러 든다. 질펀한 갯벌이 형성된 하천 주변엔 갈대가 한창이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교량은 남해고속도로(순천~영암) 벌교대교다. 보성=최흥수 기자
학관탐방
보성 벌교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소설이 아니라 근현대 역사 교과서다. 벌교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읍내의 다리와 골목, 집과 거리, 강과 제방까지 세세하게 묘사했고 거기에 딸린 인물과 사연까지 생생하게 그렸으니 이보다 풍성한 벌교 역사책이 또 있을까.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쓰기 위해 스물다섯 번이나 벌교를 답사했다고 한다. 소설을 읽지 않았다 해도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걸으면 질펀한 남도 사투리가 뒤섞인 당시의 벌교 풍경이 흑백영화처럼 아른거린다.
◇’태백산맥 문학거리’따라 벌교 한 바퀴
순천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벌교역에 내렸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은 대여섯에 불과해 역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는 또 하릴없이 기다려야 할 처지다. 그도 그럴 것이 벌교읍내는 걸어서 20분 정도면 어디나 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벌교는 보성군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실질적인 중심이지만, 한때 5만명에 이르렀던 인구는 현재 1만2,300명 수준으로 줄었다. 역을 기준으로 홍교와 태백산맥 문학관, 중도방죽까지 거리는 반경 1.5km 안짝이다.
역 앞에서 골목 하나를 통과하면 ‘태백산맥길’이다. 여행객을 위해 일부러 조성한 길이 아니라 법정 도로 명칭이 그렇다. ‘만화세상’ ‘국제세탁소’ 등 허름한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간판도 있고, ‘아즘찬이’ 카페와 보성군 특산물 판매장 ‘매시랍게’ 등 지역 정서가 듬뿍 담긴 간판도 눈에 띈다. ‘아즘찮다’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알맞다’는 뜻이고, ‘매시랍다’는 ‘일하는 것이 빈틈없고 야무지다’는 의미의 전라도 말이다. ‘개구리문구점’ ‘크레파스미용실’도 정겹다.
건물 외관을 근대식으로 단장한 골목에서 상징적인 건물이 ‘보성여관’이다. 1935년에 지어 한옥과 일식이 결합된 2층 목조건물로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묘사된다. 개관 당시에는 5성급 호텔에 비유할 정도였다지만 세월이 흘러 살림집과 상가로 이용하다, 2012년 문화재청과 보성군이 ‘보성여관’으로 복원해 현재 온돌방 7개를 갖춘 숙박업소로 활용하고 있다. 투숙객이 아니어도 입장료 1,000원을 내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1층에는 벌교와 건물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장과 카페가 자리한다. 조정래 작가의 집필실도 조그마하게 재현해 놓았다. 소규모 공연과 세미나실로 활용하는 2층 다다미방도 둘러볼 수 있다.
벌교 중심부에 위치한 보성여관.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등장한다.
벌교에서 가장 흔한 게 꼬막 음식 전문점이다. 정도가 역시 꼬막 요리를 주로 판매한다.
보성여관 맞은편 ‘정도가’도 소설의 무대다. 지식인 청년 정하섭의 본가로 등장하는 술도가가 있던 곳으로 현재 꼬막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으로 운영된다. 일제강점기부터 3대에 걸쳐 실제 술도가였던 식당 안마당에 당시 사용하던 대형 옹기항아리를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소설에서처럼 식당 주인이 정씨인 점도 흥미롭다.
보성여관에서 몇 발짝만 옮기면 단아한 벽돌 건물인 옛 ‘벌교금융조합’이 나온다. 1919년에 지은 건물로 소설 속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 조합에 근무해 온 이력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벌교 농민상담소로 활용하다 현재는 내부를 전시실로 꾸며 작은 화폐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벌교천변으로 나오면 소화다리다. 철근 콘크리트 교량으로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지만, 다리를 세운 1931년이 일제 치하의 소화 6년이라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알려졌다. 태백산맥의 등장 인물 ‘소화’와는 상관없는 이름인데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자연스럽게 소설을 연상하게 된다. 해방정국에서 좌우가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자행됐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태백산맥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벌교천 강변산책로에 ‘태백산맥’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소화다리를 중심으로 벌교천에는 강변산책로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그러나 하천만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듯 갈대가 무성하고 투명하지 않은 탁한 갯물이 흐른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흐름이 바뀌는 바닷물은 소화다리 상류 홍교까지 거슬러 오른다. 세 칸의 아치를 무지개에 빗댄 이름, 홍교(虹橋)의 역사는 조선 영조에 닿는다. 그전까지 이곳에는 뗏목다리가 있었다. 벌교(筏橋)는 바로 뗏목다리의 한자 이름이다. 영조 4년(1728) 대홍수로 뗏목다리가 유실되자 이듬해 선암사 두 스님의 지휘로 공사에 착공해 6년 후에 홍교를 완공했다. 선암사 승선교 근처 홍교비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다. 지금의 홍교는 막 공사를 끝낸 것처럼 말쑥하다. 1984년 외벽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했다.
정설은 없지만 ‘벌교 주먹’도 이 다리에서 연원을 찾는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이곳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낙안 들의 곡식을 외지로 실어내는 곳이었으니 돈이 넘치고, 사람이 몰리고, 자연스레 조직폭력배도 꼬였다는 게 ‘벌교 주먹’에 얽힌 첫 번째 설이다. 시장통에서 횡포를 부리는 일본 순사를 한 방에 때려 눕힌 전설적 인물 안규홍이 두 번째 설이요, 그악스럽던 일본 순사나 조폭도 꼬막만은 뺏어가지 못했는데, 벌교 사람들이 그만큼 억척스러웠다는 게 세 번째 해석이다.
아치형 무지개다리, 벌교 홍교. 18세기 초 뗏목다리가 떠내려간 자리에 처음 세웠고, 1984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소설 속 ‘김범우의 집’. 성채 같이 높은 담장만 봐도 저택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김범우의 집’ 대문.
홍교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마을 언덕에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이 있다. 이 집은 실제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다. 높은 담장이 성곽처럼 둘러진 집안에서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일대에서 곡창이라 할 고읍 들과 낙안 들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나무에 가려져 있다. 대문과 중문을 차례로 지나야 본채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집이지만, 현재 아래채 담장은 허물어지고 창호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방치돼 있어 폐가처럼 보인다. 네 살부터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벌교에서 살았던 조정래 작가는 이 집 문간방에 친구가 있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당시로선 구경조차 힘든 쌀밥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간식으로 주었다니, 친구보다 간식에 더 빠졌을 법하다.
소설에서 ‘김범우의 집’과 대비되는 집이 ‘현부자네 집’이다. 이곳에서는 간척으로 새로 생긴 중도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본래 박씨 문중 소유인 이 집은 한옥에 일본식을 가미한 특이한 구조다. 대문 위에 유리 창문으로 둘러진 누각이 얹혀 있고, 한옥을 기본 틀로 삼은 본채도 일본식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소화의 집’이 있다. 소설을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꾸민 유일한 구조물이다.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도 이곳에 있다. 생존 작가인 만큼 조정래 개인보다는 ‘태백산맥’에 중점을 둔 문학관이다. 전시관 2층에 관람객이 이어 쓴 필사본이 키보다 높이 쌓여 벽을 이루고 있다.
소설 속 ‘현부자네 집’. 실제는 박씨 문중 소유다. 대문 위에 창문을 갖춘 누각이 얹혀 있다.
홍교에서 벌교천 하류까지는 ‘중도방죽’으로 이어진다. 중도(中島)는 일제강점기 제방 건설을 지휘한 일본인 나카시마를 이른다. 조정래는 소설에서 방죽을 쌓은 조선인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개돼지 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 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놈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쩌겄소.’ 조선인의 피와 눈물이 밴 중도방죽 습지에는 지금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갈대 꽃이 눈부시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목재 산책로 주변으로 가을이 절정이다.
중도방죽 안쪽 갯벌에 갈대가 하얗게 피어 있다.
◇태백산맥만큼 소설 같은 이야기, 부용산 노래비
벌교읍 행정복지센터 옆에서 산자락으로 ‘부용산 오리길’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부용산은 해발 100m에 불과한 동네 뒷산 수준인데, 길섶에 세워진 ‘부용산 노래비’는 태백산맥만큼 소설 같은 사연을 품고 있다.
‘부용산 오 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000년 10월 부용산 노래비 제막식에 참석한 박기동 시인. 시인은 뒤늦게 호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보성군청 제공
시인 박기동이 해방 직전 벌교에 시집가서 아이를 낳다 죽은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지은 시다. 동생을 잃은 마음을 담은 애절한 가사는 그가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으로 전근해 작곡가 안성현을 만나 노래로 탄생했다.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안성현 역시 사랑하는 제자(누이라는 설도 있다)를 가슴에 묻은 터였다. 그러나 산으로 숨어든 빨치산이 가족을 그리는 노래로 애창하면서 노래와 시인의 운명은 격랑에 휩싸인다. 거기에 안성현이 월북했다는 사실이 더해져 ‘부용산’은 ‘빨갱이 노래’가 되고, 박기동은 평생 연행과 구금으로 고통 받다 1993년 76세의 늦은 나이에 호주로 이주한다.
부용산 팔각정에 오르면 벌교읍내와 들판, 벌교천 주변 갈대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오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노래는 1997년 안치환이 다시 불러 세상에 알려지고, 2000년에는 부용산 자락에 노래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노래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던 박기동은 53년 만에 덧붙인 2절 가사처럼 그리움만 가득 안은 채 끝내 호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노래비 바로 위 팔각정에 오르면 벌교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읍내를 느리게 흐른 갯물이 벌교의 숱한 이야기를 품고 아스라히 바다로 이어진다.
보성=글ㆍ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