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㉑ 휴 린튼 선교사(Hugh MacIntyre Linton 1926-1984)
검정고무신을 신고 남도를 활보한 복음전도자
지난 선교사열전에서 우리는 린튼 가문의 복음전도와 한국교회를 향한 헌신을 확인했다. 특별히 이번 호에 소개하는 휴 린튼 선교사(한국명 인휴)는 우리 고신총회와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바로 지금의 고신총회세계선교회(KPM) 본부가 위치한 대전 고신총회선교센터를 기증한 PCA 대전본부를 세우는데 휴 린튼 선교사의 헌신이 가득하다.
미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였던 그는 남장로교회 신학의 좌경화(자유주의)로 PCA로 이명하고 1974년 이곳 대전 선교본부를 세웠다. 특별히 휴 린턴 선교사는 미국 PCA 선교부와 한국교회를 연결하고 무교회 지역에 복음전하며 상호협력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미국 선교본부가 철수할 때는 고신총회에 선교부지를 이양해 열방을 향한 선교의 사명을 함께 감당하고 있다.
KPM은 한국 땅에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해 생을 바쳐 헌신한 OPC/PCA 선교사들을 기억하기 위한 선교기념관 리모델링 막바지 공사에 나서 오는 10월중 개관에 나설 예정이다.
한국 땅에 온 선교사들의 헌신처럼 KPM 선교사들도 그들이 섬기는 땅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전파하고 영혼을 살리는 귀한 사역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순회 전도자 휴 린튼
휴 린튼 선교사는 아버지 윌리엄 린튼과 어머니 샬럿 벨 린튼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산에서 출생한 그는 한때 잠시 유아기를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순천에서 보내고 14세에 한국을 떠나 미국 엘킨스대학과 콜럼비아신학교를 졸업했다.
1947년 5월 로이스 베티와 결혼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종전 후 1953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와 의료봉사에 나섰다.
1954년 아내 로이스 린튼 선교사(한국명 인애자)와 함께 순천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등대선교회를 설립하고 도서산간 벽지에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전라남도 순천을 중심으로 섬 오지, 산간벽지를 순회하며 200곳이 넘는 교회들을 개척했다.
6.25전쟁 때의 미국 전략지도와 건설부에서 발간한 지도를 구입하고, 사전에 각 교단의 주소록을 수집하여 지도를 정리했다. 이후 개척후보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국 농어촌 구석구석을 방문하면서 지도에 표시된 각 교파들의 교회와 개척후보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가졌다.
순천을 중심으로 섬마을과 농어촌 선교
그는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검정고무신을 즐겨 신고 다녔다. 고무신이 다 닳아서 구멍이 뚫리면 타이어 수리하는 곳에서 땜질을 해 다시 신고 다녔다고…. 그래서 그의 별명이 ‘순천의 검정고무신’이다. 섬마을을 순회할 때에는 길거리에서 고구마나 풀빵을 사서 여객선에서 먹을 만큼 소탈했다. 순천을 중심으로 섬마을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그는 집을 나서면 2~3일씩, 어떤 때는 열흘, 또는 3~4주 만에 집에 돌아오곤 했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시골길을 낡은 지프를 몰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응접실이나 안방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아내의 잔소리가 어김없이 명령조로 떨어졌다.
“그대로 들어오지 말아요. 거기서 옷을 전부 벗어놓고 들어오세요!” 그는 현관에서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직행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아들 삼 형제가 폐결핵을 앓고 난 후부터 어김없이 실시되는 엄격한 규칙이었다. “아, 글쎄 이번에 갔던 그 집에는 말이야, 형제들이 참으로 많더라… 얘들아, 형제 많은 집에 가서 잘 때는 방 중간쯤에서 자야 덜 물린다. 허허…” ‘형제들’이란 벼룩이나 빈대를 말하는 것이고, 중간쯤에서 자라고 하는 말은 가능한 한 벽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휴 린튼 선교사는 무교회 지역인 농어촌과 섬마을을 돌아다니며 20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고, 전라남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도 내륙 지방과 경상남도 해안 지역까지 복음을 위해 다녔다.
청빈과 나눔을 실천한 진정한 선교사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청빈과 나눔을 실천하는 진정한 선교사였다. 교회 개척을 위해, 남도 섬마을 농어촌을 다니며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고에 지친 모습을 보고,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에 걸쳐 전남 고흥의 간척사업으로 20만 평의 땅을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곳은 지금 광양제철소가 들어섰다. 또한 휴 린튼 선교사는 그의 아내 로이스 린튼과 함께 30여 년 간 결핵퇴치 활동에도 매진하였다. 그는 등대선교회를 설립하여 전라남도 순천을 중심으로 도서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으며, 그의 아내와 함께 30여 년간 결핵퇴치 활동에도 매진하여, 1960년 순천 일대에 홍수가 나고 결핵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순천기독치료소를 설립하여 결핵치료에 나섰다.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만년에는 공황장애로 고통 받았으며 1983년 10월 10일을 기하여 선교와 목회 분야 은퇴를 선언하여 결국 서울을 떠나 전라남도 순천 승평 원도심촌에 낙향했다. 이후 1984년 4월, 그는 농촌 교회 건축용 자재를 트레일러에 싣고 순천 요양소로 돌아오는 길에 음주운전자의 버스에 추돌당해 광주기독병원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한국형 구급차 개발
그 당시 순천에는 응급 환자용 구급차가 없었다. 인휴 선교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미국 지인들의 모금으로 순천지역에 구급차를 기증하기로 했으나 높은 가격 그 당시 30평대 아파트 한 채의 가격이 문제가 되었다. 그때 의대생이던 막내 아들 인요한은 목수, 철공업자를 불러 15인 승합차를 직접 개조하여 ‘한국형 구급차’를 만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인휴 선교사의 죽음은 이 땅의 수많은 위급한 생명을 구하는 일의 시작이 되었다. 이는 그의 아들 인요한이 최초의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인애자 선교사는 한국에 남아 1994년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한국의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전라남도 순천 매곡등 일대는 기독교 문화의 거리로 변했다. 기독교 계열 학교인 매산 중·고등학교와 매산여자고등학교가 터를 잡았고, 산기슭에는 기독교역사박물관도 있다. 1900년대 초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지은 여러 채의 건물은 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순천기독진료소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위해 살다 한국에서 생을 마친 휴 린튼 선교사 부부가 결핵환자들을 위해 세웠다.
순천기독진료소 2,3층에는 이 박물관에는 구한말부터의 기독교 선교현장을 담은 사진과 외국 선교사들이 서방세계에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달력 등 선교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휴 린튼(한국명 인휴)선교사 등 외국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복음이 필요한 곳, 복음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갔던 선교사들의 사랑의 섬김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 고신 뉴스 K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