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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反轉)의 은혜
호세아서 6:7~11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는 극적인 반전 스토리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용기를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강자보다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약자(Underdog)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우뚝 세움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마련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라기보다는, 매일의 난관과 싸우는 평범한 사람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열세에 놓인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은 곧 ‘나도 지금의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강력한 대리 만족과 위로를 줍니다.
우리나라에 통쾌한 반전의 역사를 기록한 사례를 들자면 <명량해전>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이 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되어 단 13척의 배만 남아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에서 300척 이상의 대함대를 이끌고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진출하려 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바로 이때 백의종군에서 돌아온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희망찬 결단을 임금에게 아뢰고, 울돌목이라고 하는 명량의 좁은 지형과 거센 조류를 철저히 계산해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조류가 바뀌는 결정적인 타이밍과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홀로 버텨낸 투혼으로, 단 13척의 배가 일본 함대를 궤멸시켰던 우리나라 전쟁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통쾌한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13척 대 133척이라는 숫자는 누가 봐도 패배가 확정된 운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반전의 역사는 조건이 결과를 100%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바닥을 친 상황이라도 나의 행동과 선택에 따라 내일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심어줍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도 반전의 드라마가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호 6:7~11의 말씀도 겉으로는 절망이요 어둠 그 자체입니다. 그러난 성경 전체를 통하여 살펴보면 여기에 밝은 희망의 빛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눈 호세아 6장 1절~3절의 말씀에서 비록 죄 아래 놓여 있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죄인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헤세드의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희망찬 회개의 촉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7절부터의 본문은 분위기가 단숨에 반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백 뒤에 숨겨진 차가운 비극을 폭로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개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번지르르한 말뿐이었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철저히 짓밟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매서운 진노를 선포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 거룩한 진노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복음적 소망으로 연결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지적하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악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7절에서 아담처럼 하나님을 배반하여 언약을 파기하였음을 말씀하고, 8~9에서는 이스라엘 지도자의 타락과 불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11절에서는 우상숭배에 따른 영적 음행과 부패로 인한 다가올 심판의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으로만 받아들이면 숨이 막힐 정도로 절망적입니다. 이스라엘 시대 보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이보다 더 큰 어둠의 장막에 갇혀 영원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둠의 절망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딛고 반전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언약의 파기와 이에 따른 은혜의 반전이 있습니다.
호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했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모든 풍요와 사랑의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단, 하나의 계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니고 있는 모든 존귀와 영광은 누리되, 명령하는 하나님과 이 명령을 순종하는 피조물의 경계를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명령을 어김으로써 언약을 파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담처럼’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처럼’(like men, LXX, KJV)이란 해석으로 일반적인 사람 또는 불신실한 사람들로 보는 해석입니다. 또 하나는 ‘아담에’(베아담)라는 지명으로 요단 강 근처의 장소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처럼 ‘아담처럼’이란 처음 사람 아담 뿐 아니라 그의 후손에 이르는 사람에게까지 범위가 넓혀짐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반역’은 히브리어 ‘바가드’로서 신실치 못한 결혼 관계에서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를 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음을 말하고 이것은 결혼의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중대한 죄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빠진 인간의 특성은 하나님의 사랑이 와닿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랑을 죄인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사랑의 최고 절정인 자신을 십자가에 깨트려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현임을 깨닫고 사랑하지 못한 나의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언약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 언약으로 우리는 아담과 같은 언약의 파기에 대한 반전의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리더십의 타락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반전의 은혜가 있습니다.
호 6: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해야 할 성읍 길르앗은 ‘피 발자국이 가득한’ 폭력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의 모습입니다. 호 6: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무리’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 연합하는 동료나 단체를 뜻합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해서 모였음을 암시한다.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사장들은 이 의무를 완전히 버렸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도덕적 기준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살인이 벌어진 장소인 ‘세겜’은 구약 시대에 억울하게 사람을 죽인 자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갈 수 있는 도피성(City of Refuge) 중 하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도피성으로 피신해 오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재판이 열릴 때까지 안전을 보장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매복하여 생명을 앗아가는 강도로 변모했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사법 정의와 종교적 보호망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수록 제사장들에게 바쳐지는 속죄 제물은 늘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백성의 회개를 돕기보다 그들의 죄를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을 탐했습니다. 세겜 길에서의 살인 역시 종교적 순례자나 도피자들의 재물을 노린 조직적인 강도 행각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사장의 타락은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단계로 급속히 사회가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사명감을 잃었습니다. 오직 생존하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한심한 모습으로 전락되어 믿음의 성도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의 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암흑이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가 있습니다. 참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의 거룩한 피로 죄와 허물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을 방치하므로 속죄의 예물을 드리게 하였고 이에 따를 저들의 수입이 늘어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몸을 제물로 단번에 드림으로 더는 희생의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고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사장이며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에서 벗어나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전의 은예입니다.
셋째는 영적 음행과 정해진 심판에 대한 반전의 은혜가 있습니다.
에브라임인 북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이방 우상을 섬기며 영적 음행에 빠졌고 스스로를 더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향해서도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며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추수)이 기다리고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제어되지 않는 일시적 분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신부를 빼앗긴 신랑의 애통함이며, 거룩한 언약이 짓밟혔을 때 나타나는 공의롭고 거룩한 반응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본문의 말씀은 절대적 절망을 안겨줍니다.
과거나 현재 어쩌면 미래에서도 사람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얼룩진 양심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이 더욱 악화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애가 풍성하신 하나님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반전의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속적인 범죄와 우상 숭배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며 국가적 파멸을 맞이했을 때,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결심이나 율법으로는 죄의 본성을 극복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완악하고 굳은 마음(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새 영’ 곧 성령을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관계로 회복시키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성령님을 육체에 담으셔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계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던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성령이 하나님을 불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다스려 가시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이뤄가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가 완성되는 반전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지배를 어떻게 받으며 성령계서 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제가 타고 다니는 아반떼 승용차가 기어를 넣게 되면 덜컹거리고 핸들이 무겁게 느껴지고 차가 운행 중에 갑자기 쿨렁거리며 멈추는 듯하다가 가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계기판에는 브레이크와 엔진에 이상 징후를 알리는 빨간 등이 들어오고 에어백 경고등도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차량 수리를 맡겼더니 수리비가 170만 원이 나왔습니다. 차가 노후가 되어 변속기 뿐 아니라 하부의 쇽업바와 스프링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에 기도하는데 괜스레 속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가지를 쓴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이런 감정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의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소한 문제라도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이 내게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감정 상태를 그대로 고백했습니다. “수리비가 많이 나와 속상합니다. 그리고 여러 정비업체에서 알아 보고 할 것을 한군데에 맡겨 과다 지출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됩니다.” 이런 제 기도에 성령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얘야! 돈은 돌고 도는 것인데 네게서 빠져나가면 또 들어오면 되는 것 아니겠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리비가 많이 나온 것이 잘못 된 것에 대한 의심에 대해서는 “네가 상대의 필요를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채워주면 내가 너에게 또 채워주면 될 것을 뭐 그리 속상할 필요가 있겠니? 누가 네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 가주는 것이 내 뜻이 아니냐? 그러므로 속상해 하지 말아라!” 그러면서 저를 다독이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제 마음에 부드럽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나를 안아 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는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내게 말씀하실 때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언어체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하늘의 신비한 언어로 말씀하시면 내가 알알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한 걸음씩 나갈 때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내 안에서 성취하므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고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영생을 얻게되는 반전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반전의 은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고,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 되어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온전함을 성취할 수 있는 반전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향하신 구원은 삼중 철통구조가 되어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완전체를 이루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