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보면 (知保面)
구한말(舊韓末)까지는 용궁군의 11개면 중 내상,내하,신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내하면(內下面)의 도경(道京), 익장(益庄), 지보(知保), 소동(所洞), 한여(閑餘), 마전(麻田), 석계(石溪), 원학(元鶴), 창동(倉洞), 매포(梅浦), 내포(內浦), 요성(腰城)과 내상면의 율리(栗里), 신전(薪田), 갈동(葛洞), 어소(漁沼), 신류(新留), 만촌(晩村), 구태(九台), 방화(芳華), 오송(烏松), 외평(外坪), 고슬(鼓瑟), 수동(首洞), 서월(西月), 마산(馬山), 어화(漁化), 상월(上月)의 16개 동리와 신상면의 암천(岩川), 대죽(大竹), 신풍(新豊), 상리(上里), 직동(稷洞), 방학(放鶴), 구룡(九龍), 축동(杻洞), 화량(化良), 삼송(三松), 도마(道馬), 부항(缶項)의 동리와 구읍면의 용포동 일부, 비안군 현내면의 반룡동 일부를 병합하여 지보역(知保驛)의 이름을 따서 지보면(知保面)이라 하여 예천군에 편입되어 암천, 대죽, 신풍, 도화, 지보, 소화, 마전, 매창, 어신, 만화, 송평, 수월, 도장, 마산, 상월의 15개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안동시 풍천면, 남쪽은 풍양면과 의성군 신평면, 서쪽은 용궁면, 북쪽은 개포면과 인접해 있다.
가볼 만한 곳은 익장문화유적마을이 있으며, 특산물은 예천참깨와 참기름, 마늘, 풋고추, 양파, 참우 등이 있다.
까막수리,까막솔(烏山)
ㅇ 위 치 : 지보면 어신2리(까막솔)
ㅇ 내 용
이 마을 뒷산이 까마귀 혈(穴)이고 앞산은 나즈막한 언덕으로 송장혈이다.
뒷산의 소나무 위에 앉은 까마귀가 앞산의 죽은 산을 보고 시끄럽게 우는 곳이라 하여 까막수리, 까막솔 또는 오산(烏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옛날 어느 해 큰 홍수로 사람과 가축이 모두 휩쓸려 죽고, 다만, 까마귀 떼만이 마을 터를 뒤덮고 슬피 울어서 까마귀가 슬피 운 곳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또 영남의 남쪽 선비들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서울나들이를 거쳐 과거(科擧) 보러 가는 길목의 주막거리였는데, 이 곳 주막에서 선비들이 쉬고 갈 때 주모들이 이들을 새선비라고 불렀다. 그래서 선비가 머물러 가는 곳이라는 뜻에서 풍류객(風流客), 어느 선비는 신관(新官) 사또가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신류(新留)라고도 했다 한다.
또한 공술 먹고 환대(歡待)받고 갈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지방(地方)에서는 까닭 없이 술값을 물게 되거나 금전상(金錢上) 손해(損害)를 보게 될 때 그 사람을 오산(誤算)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옻 샘
ㅇ 위 치 : 지보면 도화2리 (삼송마을 덕주산)
ㅇ 내 용
지보면 도화2리 삼송마을 서편 덕주산에 옻샘이 있다.
옻샘물은 7~8년 전만 해도 옻이 오른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다고 한다. 이 샘물은 약(藥) 효험(效驗)이 좋아 객지 사람들도 많이 찾아 왔는데 약 효험을 보자면 이 샘물을 잘 알고 샘을 위해 애쓰는 안동댁(安東宅)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꼭 듣고 가야한다고 한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안동 풍산(豊山)에 사는 분이 아침에 비린 냄새나는 음식을 먹고 찾아와서는 할머니를 찾아보지도 않고 샘을 급히 찾아갔다가 큰 구렁이를 보고 놀라 집으로 돌아가서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묘(鄭墓)에 얽힌 지관(地官)의 기지(奇智)
ㅇ 위 치 : 지보면 도장리
ㅇ 내 용
지보면 도장리에 있는 정사(鄭賜)의 묏자리를 우리나라 8대 명당(明堂-좋은 묏자리)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수 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 묏자리를 얻기 위한 박씨(朴氏)의 성을 가진 지관(집터,묘터를 잡는 사람)의 뛰어난 기지(奇智)에 대하여 감탄(感歎)을 금치 못하는 전설이 있다.
정사(鄭賜 : 1400~1453)는 진주목사(晋州牧使) 일 때 임지(任地)에서 죽었다. 목사라는 벼슬 높은 사람의 장사일 뿐더러, 당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젖어 있던 사회 풍조로 보아 상주(喪主)들이 응당 자기 아버지의 묘터를 명당(明堂)에 쓰려고 하였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명당자리를 찾기 위하여 시신(屍身), 상주, 호상꾼, 풍수(風水), 상여꾼들을 태운 10여 척의 배가 진주 남강(南江)에서부터 낙동강(洛東江)으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당대의 명지관(名地官)인 박 풍수(朴風水)를 앞세워 산세(山勢)와 지세(地勢)를 살펴가면서 몇 달만에 마침내 이 곳 도장마을 앞까지 배가 왔을 때 배 선두에 앉아서 동북편 산천(山川)의 지리(地理)를 살피고 있던 박풍수가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서면서 배를 멈추라고 사공에게 고함을 쳤다. 선두(先頭)에 선 배는 급히 멈추어지고 박 풍수가 가르쳐 준 강 건너 동북쪽 산기슭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작업을 하고 있다. “한발 늦어 그만 놓쳤구나!” 말 없이 서서 이윽고 한 곳만 바라보다가 무겁게 떨어지는 박 풍수의 비통(悲痛)에 가까운 탄성이었다.
바라보이는 저 곳이 천하(天下) 명당(明堂)인데 현재 다른 사람이 뫼를 쓰고 있다는 박 풍수의 말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현장에 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상주(喪主)들이 우겨서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묏터를 닦으려하니 물이 쏟아져서 뫼를 쓰지 못하고 돌아간다면서 철수하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돌아서는 상주에게 “우리가 이 자리에 묘를 들여도 좋습니까?” 물으니 “우리가 쓰지 못하는 자리에 들이던지 말던지!” 라는 무뚝뚝한 대답을 하였다. 이에 여러차례 물어서 뫼를 써도 좋다는 확답을 듣고 난 박 풍수는 조용히 작업을 지시했다. 먼저 광중(壙中)에 고여있는 물위에 겨(벼껍질) 한 섬을 갖다 풀고, 대젓가락 세매를 물 속에 집어넣으라고 시키고, 인부 세 사람을 호미 한 개씩을 가지고 자기를 따라 오라면서 현장(現場)에서 멀리 떨어진 “도마” 라는 마을 논두렁 밑에 가서 호미로 논두렁 밑을 파라고 하였다. 세 사람의 인부는 박 풍수의 지시대로 각각 세 곳의 논두렁 밑을 호미로 긁적이니, 갑자기 겨가 섞인 물이 꽐꽐 쏟아지기 시작하며 대젓가락 한 매씩이 물에 딸려 나오더니 세 곳이 모두가 샘이 되어버렸다. 뫼를 쓰려고 하는 현장의 물은 이 세 곳으로 빠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처음 이 묏자리에 물이 고였을 때 금붕어가 놀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겨와 놋젓가락이 나왔다고 하는 샘들은 현재 “도마” 동네 사람들의 식수(食水)로 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날씨가 가물어도 수량(水量)이 한결 같고, 수정(水晶)처럼 물이 맑고 맛이 좋다고 하며, 지금 이세 개의 샘 이름이 “도마샘” “어룽샘” “옥로정”(玉露井)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명당(明堂) 터를 잡은 사람은 박씨로만 알려지고 있을 뿐 이름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정사(鄭賜)
정사(鄭賜 : 1400~1453)는 본관이 동래(東萊), 귀령(龜齡)의 셋째아들이다. 1420년(세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고 이조좌랑, 예조 ,형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정성을 다하였다. 문학과 덕행(德行)이 뛰어났고 지조와 절개가 높아 완담사(浣潭祠)에 모셔졌으며 웅천(熊川)고을 동헌(東軒)에서 읊은 시가 전해온다. 『겹겹이 두른 뫼뿌리는 삼면을 에워싸고(千層列峀圍三面), 넓고 넓은 물결은 끝간 데를 모를로고(萬頃波濤浩一邊)』 지보면 도장리 명산에 있는 “정묘”(鄭墓)가 그의 묘소이다.
1476년(성종 7)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으로 내산군(萊山君)에 봉군(封君)되고, 중종 11년(1516)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다시 증직되었고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