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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주일설교.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 13장 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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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소원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을 잘 믿다가 천국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인정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있음을 확신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잘 믿도록 새 힘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잘 믿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반복적인 예배를 드리며 살아갑니다.
예수님 잘 믿는 일의 중심에 예배가 있다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우리의 모든 신경을 예배의 시간 속에서 초 집중하여야 합니다. 우리 의지와 생각으로 예배드리면 실패 합니다. 성령님이 내 몸과 마음을 예배자로 세워 주셔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온전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나의 몸과 마음이 집중할 수 있도록 붙잡아(주장하여)주셔야 예배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가 성령님이 함께하여 주심으로 모든 분들이 예배의 성공자가 되셔서, 예수님 잘 믿는 믿음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성령 충만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해서 자가 진단을 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 잘 믿고 계시나요? 잘 믿고 계시리라 생각하며, 즉석에서 우리도 한번 자가 진단을 해보겠습니다.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간단한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 잘 믿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 잘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잘하고 계셔서 예수님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무엇을 잘 못하고 계셔서 예수님 잘 믿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겸손 아닌 겸손이 미덕인 것처럼 말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스스로가 예수님 잘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쑥쓰러워하고 부끄러워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순종을 못해서요, 기도를 많이 못해서요, 봉사도 조금 밖에 못해서요, 헌금도 많이 못해서요, 직분도 00밖에 안 되어서요,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음식의 맛을 평가할 때에 “겉바속촉”이라고 표현합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표현입니다. 특히 치킨이나 탕수육 같이 튀김 음식이 “겉바속촉”이라면 별점 다섯 개 짜리죠. 사람의 입맛은 제각각 이지만 맛집에 대한 평점은 대개 비슷하게 나옵니다. 맛있는 음식은 입이 알아서 잘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평가를 받아야 할 시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정확하게 반응하고 평가해 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대해서 수시로 점검하고, 평가하고, 바로 잡아 나가는 과정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기분이 다운 되어 있을 때 “나 당 떨어졌나봐, 달달한거 먹어야 힘날 것 같아”, 이런말 하잖아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떨어지면 급격히 우울해 집니다. 염려와 근심이 몰려 옵니다. 하지만 믿음이 충만하면 평안해 집니다. 여유가 넘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처럼, 믿음은 우리 삶의 일부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대답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다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일하고 계심을 체험하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계시다면, 그 분은 진짜로 예수님 잘 믿고 계신 겁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은 은퇴하시고 20여 년간 남한산성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어느날 교계의 중진 목사님들이 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목사님, 모처럼 이렇게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라고 부탁을 합니다. 한 목사님은 골똘하게 생각하시다가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듣고 있던 목사님들은 웃으시면서, “목사님 우리 다 목사들이에요”라고 가볍게 받아들이자, 한 목사님이 다시 말씀 하십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두 번 이야기를 하자 모두 숙연해지고 깊이 숙고하는 침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목사님은 실제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2012. 샘터사)라는 책을 내기도 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말씀하신 예수 잘 믿으라는 당부 속에는, 목사님들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함께 하고 있는지 항상 확인하고, 점검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오직 복음을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목회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의 지탄을 받고 교회가 비난을 받는 원인을 제공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인천에서 발생했던 목회자의 그루밍 성폭력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해자인 목사의 사과와 퇴진을 요구하던 시위 현장에서 어느 한 분이 절규하듯 목사를 향해 외칩니다.
“목사라는 당신들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냐, 예수님이 성폭력 저지르고 뻔뻔하게 오리발 내밀고, 피해자에게 2차, 3차 가해를 하라고 가르치더냐, 사람들 보고 예수 믿으라고 외치고 다니지 말고, 목사들부터 예수 좀 믿고, 성경 좀 읽고 다녀라!” 목사인 저는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목사로써 정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하나님, 성령님을 넣어도 정답은 똑같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며 그 사랑을 다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말씀이 진리가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을 체험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목사여서, 장로여서, 무슨 권세자여서, 세상이 부러워 하는 부자라서, 이런 겉 모습이 예수 잘 믿는 것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겉의 포장지가 그럴듯 하면 안의 내용물도 포장지에 걸맞는 명품이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그 마음 안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는데, 과연 나는 그러한가? 오늘 본문이 이 질문과 대답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영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영을 예수님을 바꾸면, 누구든지 예수님이 없으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하나님, 성령님)을 잘 믿는 다고 평가 받는 것은,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고, 내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받지 못했고, 이러한 외형적인 것들로 평가 받는 것이 결코(절대로) 아닙니다.
그러한 결과물들은 나의 의지, 노력, 지식으로도 어느 정도 충분히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겉만 바삭하고 속은 눅눅한 상태이면서 맛집으로 소문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예수님 잘 믿는 것이 들쑥날쑥 종 잡을 수 없는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은 애증이 일어날만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헌신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바울이 사도가 되었음을 의심하며 집요하게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 중에는 사도 바울의 권면과 가르침에 순종하여 믿음이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이 있었지만, 바울이 잠시라도 신경을 안쓰면 파당을 만들고, 지식과 교만으로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 안에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과 조석변개하는 얄팍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바울도 교회를 흔드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참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 고린도전서 13장 2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내가 두 번째로 여러분을 방문했을 때에 전에 죄를 지은 자들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경고해 둔 바 있었지만 지금 떨어져 있으면서 또다시 경고합니다.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런 자들을 단 한 사람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그런 자들을 단 한 사람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많이 쎄죠.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영을 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말을 안들을까요? 왜 이렇게 권위자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할까요? 우리의 죄성이 이토록 끈질기고 못돼 먹었습니다.
바울은 겉 모습만 예수 잘 믿는 것처럼 포장 되어 있는 자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과 같이 경고와 권면을 합니다. 본문이, 4절과 5절인데, 5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이 말씀이 사순절에 어느누구도 아닌 곧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면서 우리 함께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5절 읽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아멘.
너희는,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너희, 너희, 너희”라는 대상을 명확하게 꼭 집어서 가리킵니다. 현장에서 직접 말했다면 손가락으로 대상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을 겁니다. 그만큼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권면이자 경고를 한 것입니다.
“시험하라(헬-페이라제테)”는 것은, 주관적인 것을 일체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아주 정밀하게 조사하여 밝히라는 뜻입니다. “확증하라(헬-도키마제테)”는 것은 정밀하게 검사하여 진짜라고 인정 받도록 입증 시키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잘 믿고 있다, 잘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말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있는지, 그래서 그 믿음의 범위 안에서 너희들의 언행이 옳았는지를 증명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대목의 편지를 쓸 때 입을 꼭 다물고 결연한 마음으로 썼을 겁니다.
바울의 이런 비슷한 표현이 고린도 전서에도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포함한 모든 지식과 은사와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다 받았음에도, 마치 받지 아니한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고 왕 노릇 하며 점점 교만해져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교만한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이 있음인데,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고, 시비를 한 번 제대로 가려보겠다” (고전 4:19-20)고 한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고난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말만 많고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상대하느라 헛된 일에 기력이 탕진될 지경이었습니다. 바울도 이제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5절을 바울의 심정을 더 담아서 풀어 보자면 이러했을 겁니다.
“나는 사도로써,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로서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① 너희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② 그리스도인으로서 너희들의 삶에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③ 너희들 마음안에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 역사하는 체험과 감동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④ 진실로 예수님 잘 믿고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시험)을 반드시 치르겠다. 그 점수를 낱낱이 공표하겠다. 내가 다시 가는 대로 곧바로 시험을 본다. 기다려라 내가 곧 간다.”
큰일났습니다. 교회내의 거짓말쟁이들과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불똥이 떨어졌습니다. 겉포장만 번지르하고, 말만 잘하던 자들에게 철퇴가 내려졌습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는커녕 잘하고 있는 사람을 지적하고 판단을 일삼던 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경고장이 내려졌습니다.
5절 후반부에서 바울 사도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시험 임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만약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가 된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버려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경고가 너무 무섭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평가한 후에 시험 점수가 형편 없는 사람은 다 출교시키는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생각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의 분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주려는 치유와 회복의 처방 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오직 흔들림 없는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서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썩고 곯아진 상처가 뻔히 보이는데도 그냥 놔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제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다시 복음의 능력, 예수님의 은혜가 성도들 안에 충만하기만을 바랐습니다.
5절 말씀을 우리 자신들에게 한 번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를 좋아 하고, 세상의 어떤 사건들을 논평하기에 앞서, 내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를 먼저 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문제라면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시험과 확증의 잣대는 말씀이어야 하고, 시험 장소의 감독관은 성령님 이셔야 하고, 점수의 공표는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만이 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이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확증하라.” 사순절 기간에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죄와 허물과 상처들이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순종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보다 이런 저런 말들만 훨씬 많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고집을 다스리기 위해서 꾸준한 시험과 확증으로 우리 안에 온전한 믿음의 있는지 반드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나는 예수님을 잘 믿는 믿음 안에 있는지 내 믿음 점수를 한 번 시험하여 보자, 확증하여 실제 점수를 평가하여 보자라는 자발적인 마음을 가져 보십시오. 시험과 확증의 시작은 진실한 참회가 가장 우선입니다. 그 다음으로 인내와 절제의 시간 속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 예수님만을 부르짖고, 찾고, 구하십시오.
우리 모두의 일평생 단 하나의 목표인 예수님 잘 믿는 것, 예수님 잘 믿고 천국 가는 것, 그 하나 만을 온전히 이루어가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시험과 확증의 시간을 보내시면서 칭찬 받을 만한 굳센 믿음으로 회복 되어 가시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은 한 절인 4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아멘.
제가 4절을 나중에 읽은 이유는, 4절이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해야만 했던 원인제공의 출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5절이 어떤 질병에 대한 처방전 이라면, 4절은 질병이 생기기 않도록 미리 맞는 예방 주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병도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4절을 이용하여 믿음을 잘 예방하면, 5절과 같은 시험이나, 확증을 요구 받을 일이 없습니다.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셨기 때문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무궁하신 하나님 본체이시지만, 스스로 약함을 택하셨습니다. 스스로 약하심을 선택하시자 죽음을 맞이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약함과 죽음을 택하셨는지가 논점이 아닙니다. 스스로 약함과 죽음을 선택하셨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함을 택하였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졌습니다. 죽음으로 순종하셨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살아나게하셔서 부활 영광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왜 우리가 믿음 안에서 자꾸만 시험 받고 확증하라는 경고의 말씀 앞에서 서게 됩니까? 내가 약함을 선택하지 않고 스스로 강하다고 착각하고 자랑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자아와 욕심이 죽으면 부활의 능력과 권세가 내게 임합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가 왕이 되고, 권력이 되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의 권세가 믿음 안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제 4절의 예뱡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되셨죠. 약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시험을 거치지 않는 사전 예방책입니다. 내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고 나보다 훨씬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는 더 이상 믿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는 믿음으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이, 나는 언제라도 죽을지언정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된다면 나의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확고한 믿음 안에서 살아 가고 있음이 너무나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4절 하반부를 보시면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약해지고,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죽기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에 대한 100% 예방을 완수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살려 내셨고, 동일하게 우리도 살려내실 겁니다. 나는 죽은 자도 아니며, 죽을 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살아있는 자요, 영원히 살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살아 역사하는 능력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시험이나 확증이 필요 없이, 우리 주님이 칭찬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믿은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리라”,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려는 권면과 예방의 말씀이 우리의 연약한 믿음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믿음 위에 믿음이 더하여지는 회복과 능력의 사순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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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고치시고 바로 잡아 주셔서, 시험하고 확증하는 시간을 갖게 하셔서, 다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 가는 사순절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참회와 순종으로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회복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