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1).
그래서 일차적으로 보이는 외모를 중요시하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사람의 외모만 보고 내린 경솔한 판단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사람들의 외모를 존중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이는 한 조각 빵을 위해서도 그 사람은 범죄하기 때문이라』(잠 28:21).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구약에서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렸으나 실패했던 “사울”과 다윗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께 대적하여 다윗의 원수가 되었던 “압살롬”이라는 그 준수하게 생긴 인물들이다. 이들은 동일하게 그 외모가 수려했지만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분류된 자들이다. 이들은 둘 다 다윗을 믿고 서로를 의지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적하는 위치에 섰던 인물들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뽑힌 사울이라는 청년은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여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때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에게 사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탁월하고 준수한 청년이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는 백성의 누구보다도 어깨 위만큼 더 크더라』(삼상 9:2).
그러나 그가 왕이 된 후 보인 행실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인물값을 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영적으로나 지혜로나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뛰어난 다윗을 시기하여 거의 미친 사람이 되어 그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졸렬한 왕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보시고 그의 외모를 개의치 않으시고 그를 마귀에게 내어 주시어 결국은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셨던 것이다. 그 후로도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는 긴 전쟁이 있었는데(삼하 3:1),
그 결과 사울은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남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은 지도자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외모만을 보고 택한다면 결국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을 피하고 나서 한숨을 돌리는가 했더니 압살롬이라는 자기 아들에 의해서 또 다시 위협을 받게 된다. 압살롬, 그는 다윗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삼하 3:2,3) 그 역시 사울처럼 외모가 뛰어난 청년으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그의 아름다움으로 그토록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머리 끝까지 흠이 없더라』(삼하 14:25).
심지어 그는 머리털까지 풍성하여 외모가 돋보였던 것 같다.
『그가 그의 머리를 깎아서 (그가 머리를 깎는 것은 매년 말에 있었으니, 머리털이 그에게 무거우므로, 그가 그것을 깎더라.) 그의 머리털을 달아보니 왕의 저울로 이백 세켈이더라』(삼하 14:26). 그러나 훗날 전쟁 중에 그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게 되었으므로 그 아름답던 머리카락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때 압살롬이 다윗의 신하들과 마주치더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의 무성한 가지 밑을 지나갈 때 그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그는 땅과 하늘 사이에 매달리고 그의 아래 있던 노새는 가 버렸더라』(삼하 18:9).
이 압살롬은 참으로 복잡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여동생인 타말이 그의 배다른 형제인 암논에게 겁탈을 당한 사실을 안 후 2년 동안이나 암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악심을 품고 있다가 결국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해서 칼로 원수를 갚고 만다(삼하 13:22~29). 그는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을 쳐서 그술이라는 곳으로 가서 3년을 망명자로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사이 다윗왕은 암논의 죽음에 대해서는 위로를 받고 압살롬을 그리워하게 되는데(삼하 13:38,39), 이러한 왕의 마음을 알아차린 요압으로 인하여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 다윗은 그를 용서를 하긴 했으나 완전히 화해할 수는 없었다. 압살롬은 돌아와 만 2년을 살면서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고로 답답해하던 중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는 계책을 짜내어 요압을 만나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서 요압의 중재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로는 자기 세력을 키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여 반역을 꾀하는 일에 박차를 가한다.
『압살롬이 일찍 일어나서 성문길 곁에 서서, 송사가 있는 어떤 사람이 재판을 청하려고 왕에게 오면 압살롬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어느 성읍에서 오느냐?” 하고 그가 말하기를 “당신의 종은 이스라엘의 지파 중 하나에 속하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나, 너를 들을 왕의 대리자가 없도다.” 하고 압살롬이 또 말하기를 “오,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었더라면, 고소하고 송사할 일이 있는 사람마다 내게 올 때 내가 그에게 정의를 베풀었으리라.” 하더라. 그리하여 누가 그에게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그가 손을 내밀어 그를 잡고 입맞추더라. 왕에게 재판을 청하려고 오는 온 이스라엘에게 압살롬이 이같이 행하여, 압살롬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니라』(삼하 15:2~6).
그리하여 압살롬은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아버지를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인 다윗에게 적에게 쫓겨 다녀야 하는 슬픔을 안겨 준다. 물론 다윗 편에서 보자면 밧세바 사건으로 인한 죄의 열매를 먹게 되는 상황이지만, 아들 압살롬 편에서는 죽음을 자초했던 것이다. 압살롬(평화의 아버지)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그 역시 철저히 거짓 평화로 위장한 적그리스도의 유형이었다. 특히 사무엘하 18:18에서 발견되는 진리는 그가 666이라는 숫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압살롬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을 위하여 한 기둥을 가져다 세웠으니, 그것이 왕의 작은 골짜기에 있더라. 그가 말하기를 “내게는 내 이름을 기억해 줄 아들이 없도다.” 하고, 그가 그 기둥을 자기 이름을 따서 불렀으니, 그것이 오늘날까지 압살롬의 장소라 불리더라』(삼하 18:18).(각각의 숫자 18은 6+6+6이다. 피터 럭크만 주석성경 참조).
『나의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사람들의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신약에 와서도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며, 더 나아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죄할 것이라』(약 2:9).
실제로 오늘날 실속 없이 외모만을 쫓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진실된 삶이겠는가?
『이들은 원망하는 자들이요, 불평하는 자들이요, 그들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 또 그들의 입으로는 과장하는 말을 하고, 유익을 위해 사람들의 외모를 칭찬하는 자들이라』(유 1:16).
사람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깔끔하게 단장하는 것은 남을 배려하는 차원에서나 자신에게 있어서나 좋은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외모 지상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삼손도 힘이 세고 준수한 외모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기대를 여지없이 저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성경에서 외모가 준수했던 이들의 종말을 보고, 압살롬의 머리털과 삼손의 머리털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의 말씀은 자매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 진리의 핵심을 깨닫고 외모와 관련된 모든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을 버려야 한다.)
『너희는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거나 옷을 입는 외모로 단장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고요한 영으로 단장할지니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값진 것이니라.예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인들도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써 자신들을 단장하였느니라』(벧전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