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삶 한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San francisco de assis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삶 한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육신을 지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한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오감에 의한 경험을 중시하고 외적 자극에 길들여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잘 보지도 믿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뒤늦게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이나 가치들을 알아차리곤 가슴을 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다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이민족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의 오심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17,20)고 여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며,
너희 가운데 있다.”(17,20-21)고 답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17장 21절의 ‘엔토스’(ἐντός)입니다.
이는 ‘가운데’ 또는 ‘안에’라는 뜻을 갖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어디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내면적인 것’
, ‘마음속에 자리하는 실재’로 언급되지 않기에 여기서는 ‘안에’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엔토스’는 ‘가운데’, 또는 ‘너희들이 만질 수 있게’(C.H. Roberts)
또는 ‘너희의 지배 안에, 너희 가운데’(A. Wikgren)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 나라는 인간 세상 한가운데 임하여 예수님의 활동과 더불어 늘 있으므로
시간에 매이지 않으며, 그것을 기대할 필요도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삶의 현실 한가운데 있고, 있게 될 것이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삶 한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치유활동을 통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아내처럼 살면서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소유와 집착에 매여 영혼의 눈이 멀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먼저 추구하면서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려면 '어떻게'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려면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12,54-56).
이는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에 따라 각자가 사랑의 사람이 되고
이 사회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인내로써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한복판에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이들 안에서 신음하는 예수님을, 가난한 이들 안에서 굶주리시는 예수님을,
박해받는 이들 안에서 거친 숨을 쉬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나와 너 사이의 한복판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는지,
진정 사랑과 정의의 나라라 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철저히 추종함으로써
우리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