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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6일 주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이다.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셨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키우는 일에 꾸준히 기도하고 활동하며 협력하도록 일깨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드시며 당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오늘 ‘성소 주일’을 지내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성직과 수도 생활을 지망하는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늘 귀 기울이도록 기도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여하며 주님께서 한국 교회에 풍성한 성소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한마음으로 청합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제63차 성소 주일 담화 (2026년 4월 26일)
하느님의 선물을 내면에서 발견하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특히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우리는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부르는 부활 제4주일에 제63차 성소 주일을 기념합니다. 이날은 성소의 내적 차원, 곧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무상의 하느님 선물을 발견하는 것인 성소에 관하여 함께 성찰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목자를 따라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길을 함께 찾아봅시다.
아름다움의 길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요한 10,11)라고 일컬으십니다. 이 표현은 자기 양 떼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고자 하는 완전하고 참되며 모범적인 목자,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목자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이끄시는 목자시니, 그분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따를 때 삶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면 육신의 눈이나 미적 감각만으로는 부족하고, 관상과 내적인 삶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멈추어 서서, 듣고, 기도하며 그분의 눈길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신뢰에 차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신뢰하니, 그분과 함께하는 삶은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움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참으로 ‘아름답게’ 되는 일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별한 일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변모시킵니다. 신학자 파벨 플로렌스키가 말했듯이, 수덕 생활은 그저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1) 실제로 성인들의 고유한 특징은 선함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빛나는 영적 아름다움입니다.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하고 그 아름다움을 반영함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에 함께하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도 생명과 믿음, 의미에 대한 이러한 내적 체험이 있었습니다. 성인은 『고백록』(Confessiones) 제3권에서 젊은 시절의 자기 죄와 허물을 고백하면서, “나의 가장 내밀한 곳보다 더 내밀하게”2) 자리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빛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성인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이루는 자리인 내적 삶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기도와 침묵을 바탕으로 세워지는 이러한 관계를 잘 가꾸어 나간다면, 성소라는 선물을 받아들이고 이에 적극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이 열립니다. 성소는 결코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일방적으로 따라야 할 획일적 모델도 아닙니다. 성소는 오히려 사랑과 행복의 모험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내적 삶을 돌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성소 사목과 복음화를 위한 노력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모든 이, 곧 가정과 본당과 수도 공동체는 물론 주교, 신부, 부제, 교리 교사, 교육자, 그리고 모든 신자에게 권고합니다. 이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며 보호하고 동반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더욱 온전히 헌신해 주십시오. 우리의 이웃들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빛나고 끊임없는 기도로 뒷받침되며 형제적 동반으로 풍요로워져야만, 하느님의 부르심은 싹트고 자라나 한 사람 한 사람과 온 세상을 위한 행복과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이 길을 걷기 시작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상호 인식
“생명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계시며,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십니다.”3) 참으로 모든 성소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1요한 4,16 참조) 깨닫고 경험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주 깊이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고(마태 10,30 참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한 거룩함과 봉사의 길을 안배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앎은 언제나 상호적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기도, 하느님 말씀의 경청, 성사, 교회 생활, 형제자매들을 위한 애덕 활동 등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아뵙도록 초대받습니다. 한밤중에 예기치 못하게 주님 목소리를 듣고 엘리의 도움으로 주님이심을 깨닫게 된 소년 사무엘처럼(1사무 3,1-10 참조), 우리의 행복을 위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내적 침묵의 자리를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이는 숭고한 관념이나 학문적 지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인격적 만남에 관한 것입니다.4)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살고 계십니다. 성소는,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세상의 소음 한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가 진정 기쁘게 또 아낌없이 응답하도록 초대하시는 유일하신 하느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를 수반합니다.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십시오. 진리는 내적 인간 안에 머무릅니다”(Noli foras ire, in te ipsum redi,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5)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잠시 멈추어 내적 침묵의 자리를 마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충만하고 풍성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각자의 탈렌트를 활용하도록 부르시며(마태 25,14-30 참조), 자신의 한계와 약점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십자가에 봉헌하게 하시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체 앞에 머무르며 조배를 하고, 하느님 말씀을 날마다 실천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묵상하며, 교회의 성사 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이고 충실하게 참여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우정을 통하여 여러분은 혼인이든 사제직이든, 종신 부제직이든 축성 생활이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는 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소는 교회 그리고 그 성소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큰 선물입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분과 그분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모든 성소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신뢰
앎은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확신은 믿음에서 샘솟는 마음가짐이며, 자신의 성소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그 성소를 지켜 나가는 데에도 필수적입니다. 실제로 삶은 끊임없이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행위로 드러납니다. 주님의 계획이 우리의 계획을 뒤흔들어 놓을 때조차 그러합니다.
요셉 성인을 생각해 봅시다. 동정녀의 잉태라는 뜻밖의 신비 앞에서, 요셉 성인은 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메시지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마리아와 그 아기를 받아들였습니다(마태 1,18-25; 2,13-15 참조). 나자렛 사람 요셉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완전한 신뢰의 모범을 보여 준 인물입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어둠과 불확실성에 휩싸인 듯 보일 때, 그리고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의 계획과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요셉은 하느님의 계획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확신하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습니다.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6)
희망의 희년이 일깨워 주었듯이, 우리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약속을 더욱 굳건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사든 우리 개인의 역사든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신하며 두려움과 의심을 이겨 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두운 밤을 보낼 때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당신의 빛으로 모든 어둠을 몰아내러 오십니다. 우리는 시련과 위기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빛과 힘을 통하여 우리의 성소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보며 우리를 부르신 분의 아름다움을 더욱 충만하게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상처 입고 넘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충실함과 신뢰로 빚은 것입니다.
성숙
실제로 성소는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유지되는 역동적인 성숙의 과정입니다. 성소를 키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다양한 삶의 상황 안에서 일하시게 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선물에 비추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요한 15,1-8 참조), 우리 삶 전체는 주님과의 굳건하고 생생한 유대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련을 통해서 그리고 꼭 필요한 ‘가지치기’를 통해서 주님의 부르심에 더욱 온 마음을 다하여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우리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는 ‘장소’는, 흔히 우리 삶 전반에 걸쳐 맺어가는 참되고 형제적인 유대 관계입니다. 우리가 성소를 발견하고 성장시켜 나가는 여정에서 우리를 동반하는 참된 영적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의 성소가 그 모든 아름다움의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성령의 빛으로 성소를 식별하고 검증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므로 성소는 즉시 소유할 수 있는 것, 단 한 번에 전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소는 인간의 삶처럼 점차 펼쳐지는 하나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은 보호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 영양분을 얻음으로써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소라는 선물은 “우리의 삶 전체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 자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소는, 우리가 어느 것 하나도 순전히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주님께 응답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마련해 두신 분이십니다.”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특히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하느님과 맺은 인격적 관계를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십시오.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하느님께 자신을 맡겨 드리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성소라는 선물이 성숙해져, 여러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교회와 세상을 위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범이시며 기도와 경청의 스승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언제나 여러분의 이 여정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26년 3월 16일
레오 14세 교황
1) P. Florenskij, The Pillar and Ground of the Truth, Princeton 1997, 72: “수덕 생활은 ‘선한’ 사람이나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을 만든다. 성인들의 수덕 생활의 고유한 특징은 결코 ‘친절함’이 아니다. 친절함은 육신에 얽매이며 죄를 많이 지은 이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그 특징은 영적인 아름다움, 곧 빛을 발하고 광채를 띠는 사람의 눈부신 아름다움, 육에 속한 이들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그러한 아름다움이다.”
2)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es), III, 6, 11, 『라틴 교회 저술가 전집』(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CSEL), 33,53.
3) 레오 14세, 교황 교서 「미래를 탄생시키는 충실성」(A Fidelity that Generates the Future), 2025.12.8., 5항.
4)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12.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제1판), 1항 참조.
5) 성 아우구스티노, 「참된 종교」(De Vera Religione), XXXIX, 72,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CCSL), 32, 234.
6) 프란치스코,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2020.12.8., 3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64호(2021), 23면.
7) 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 2019.3.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9(제1판), 248항.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60149 ]
<여러분은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2,20ㄴ-25
사랑하는 여러분,
20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21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
23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축일4월 26일 성 마르첼리노 (Marcellinus)
신분 : 교황, 순교자
활동 연도 : +304년
같은 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한 뒤에,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4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박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 같은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프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키리누스(Cyrin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마르첼리노 (Marcellinu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