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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는 뜻>
오늘 우리는 교회력 사도서간으로 로마서 10장을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구절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9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교회 좀 다녔다 하는 분들은 이 구절을 외우고 계실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바울이 구원받는 절차를 명쾌하게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내 마음이 정말 믿었는지는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 그리고 마음으로 믿는다는 건 대체 어떤 뜻일까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야만 구원받았다는 걸까요? 오늘 여러분과 이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 교회는 매우 특별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을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의 지역 이름이 쭉 나열됩니다. 그런데 다른 곳은 그냥 지역 이름만 한 번씩 나오고 마는데, 10절에 보면 로마에서 온 사람들에 관해서만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비교적 길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이 성령 받고 로마로 돌아가 세운 교회가 바로 로마서의 수신자입니다.
특별한 교회이지요. 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는 열심이 있었고, 실제로 모범적인 교회로 이름이 났습니다. 바울이 스페인 선교를 준비하면서 후원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그곳이 이 로마 교회였고, 그래서 후원해 달라고 써 보낸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는 바울이 대체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려야 했고, 내가 로마교회를 잘 알고 있다는 걸 어필해야 했기에, 당시 로마교회에서 가장 골칫거리였던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상세히 적어 보내게 됩니다. 바울의 해법을 간단히 말하면 율법과 복음의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로마서는 1장부터 차근차근 빌드업을 해 나가면서 교리와 실제 삶을 풀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로마서 10장은 ‘하나님의 뜻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다루는 장입니다.
이제 오늘 문제의 구절을 다시 살펴봅시다. 10장 9절 말씀,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 구절만 떼어 읽으면 아주 간단한 구원받는 공식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문장은 사실 8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문장의 주어를 보세요. 내가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내가 애써서 말씀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말씀이 먼저 와서 내 입에,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어지는 9절은 ‘시인하라’ ‘믿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설명입니다. 네 입에서 나오는 그 고백, 그거 네가 만든 게 아니라 이미 너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중요한 말씀에 앞서, 이런 것은 제발 하지 말라는 말도 합니다. 그게 바로 앞 구절인 6절과 7절입니다. 무엇을 말리고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두 가지를 금합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위로 올라가는 일과 아래로 내려가는 일을 말립니다.
말씀이 가까이 있다
우리 이야기로 바꿔봅시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평소에 안 하던 기도의 자리를 찾고, 성경을 처음부터 펴서 읽고, 누군가는 금식하거나 시간을 내어 기도원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참으로 귀합니다.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연스럽고 신앙적으로 권할 일입니다. 로마서의 표현으로 말하면, 말씀이 이미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신앙의 행동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열심이 아니라, 그 열심 가운데 나도 모르게 생기는 독버섯입니다, 대표적인 게 신앙의 점수를 매기는 일입니다. 기도 시간을 채우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마음이 올라옵니다. 이만큼 했으니 이제 충분할까? 응답이 없으면, 아직 부족한가? 그러다 어느 날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도와 묵상 시간을 빼먹으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그동안 쌓아 둔 신앙의 견고한 성이 한 번에 무너진 것 같아서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계산이 하늘에 올라가려는 마음입니다.
무저갱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는 말도 비슷합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신비한 깨달음이나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간증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체험과 깨달음이 기준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때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시니, 내가 쌓는 신앙의 공로만큼 가까워지고 못 쌓은 만큼 멀어진다는 계산, 나는 남들 모르는 신비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힘을 주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는 본인을 지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자선과 봉사 같은 경건 생활은 본디 자기 영혼뿐 아니라 공동체의 덕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재는 저울이나 무자비한 칼이 되곤 합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러지, 이런 마음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지 않아도, 무저갱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육의 몸으로 내려오셨고, 우리 가운데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말씀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서가 그 답을 아주 뜻밖의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폭풍이 그친 시간
마태복음 14장으로 가봅시다. 22절부터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에 태워 보내고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십니다. 한 밤 중이 되었고, 제자들이 탄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혼돈의 시간,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는 베드로가 물위로 뛰어들었고, 물에 빨려 들어가는 그를 예수님이 손잡아 주셨다는 본문입니다. 보통 이 본문은 의심 없는 신앙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읽곤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제 눈에 새삼스럽게 들어온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에서 나갔는지 보십시오. 배에서 나갑니다. 한밤중 폭풍 속에서 함께 노를 젓고 있던 동료들을 그 자리에 두고 혼자 뱃전을 넘어갔습니다. 열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만나겠다는 용기와 열심이 넘치다 보니 배를 넘어 물로 뛰어듭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내민 손을 잡고 베드로가 살아났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한 밤 중 풍랑이 언제 그쳤는지 한 번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32절 말씀,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 14:32).
폭풍이 언제 그쳤나요? 배에서 폭풍 너머 주님을 눈으로 보았을 때가 아닙니다. 주님이 손을 잡아 주셨을 때인가요? 그때도 아닙니다. 물 위에서는 붙잡히기만 했지 바람이 멎지는 않았습니다. 폭풍이 그친 시간은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입니다.
그 배는 어떤 곳인가요? 거기엔 함께 항해하던 동료들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것을 루터의 말로 하면 가정, 일터, 교회가 바로 우리가 올라탄, 아니 올라타야 할 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이 세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엔 우리가 함께 책임지고 살아야 할 식구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폭풍 같은 시련을 만납니다. 예수 믿는다고 폭풍이 비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는 그 폭풍이 멎는 자리를 아주 분명하게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함께 오르는 배가 바로 그곳입니다. 혼자 물 위에 서서 버틴다고 시련이 멈춰지지 않습니다.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던 초대교회 교부들의 격언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의 폭풍우 사건은 그저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을 로마서 말씀과 연결할 만합니다. 우리가 “주를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나 혼자 거룩하게 살아보겠다는 구원 공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 이미 주셨다는 말씀은 내 입과 내 마음에만 놓인 것이 아니라, 내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일터와 교회 성도들에게서 말씀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배에 올라타 있다면, 내가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내가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말씀을 우리 삶의 현장 한가운데 두십니다. 그곳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보내신 삶의 터전인 동시에 소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심장을 하나로 모으다
이 대목에서 우리 교회가 물려받은 유산 하나를 나눌 만합니다. 우리 루터교회에는 <신앙고백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흩어져 다투던 교회들이 오랜 진통 끝에 하나로 묶어 낸 7개 문서의 모음집입니다. 이 신앙고백서의 이름이 “콘코르디아”(CONCORDIA)입니다. 라틴어를 뜯어보면 뜻이 참 재미있습니다. 콘은 함께라는 말이고 코르디아는 심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콘코르디아는 심장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 됩니다.
즉, 신앙고백이란 정리한 교리 목록이 아는 게 아니라 심장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도 “마음을 함께한다”고 하지요. 그것이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 로마서 11:9, “입으로 주를 시인한다”는 이 신앙고백의 말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혼자 정답 맞히며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입으로 주를 시인한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심장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한 몸 안에서 그분의 심장으로 피가 돌고 온기가 도는 삶, 그것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삶, 즉 신앙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몸에서 온기가 사라지면 죽은 몸이듯, 아무리 정확한 교리, 거룩한 예배가 있어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냉랭하다면 우리는 신앙고백을 잃어버린 것이고, 주를 시인하지 않는 것이며, 교회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내 심장이 식어 갈 때도 옆 사람의 온기로 함께 데워지는 곳, 그곳이 교회이고, 배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지난주간 CBS성서학당 강의 원고를 준비하다가 사도행전 9장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울)이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국경 너머 다메섹으로 가던 길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빛이내려 오더니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울이 들은 예수님의 첫 목소리인데, 이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울이 박해하는 대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 예수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울이 깜짝 놀라 대체 당신이 누구냐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는 음성이 들립니다. 이 대목이 특별하게 들리는 까닭은, 예수님이 박해받는 성도들을 당신 자신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 바울이 이 체험을 떠올리면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라는 믿음이 실제로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내는지 사도행전 11장에서 놀라운 사건 하나를 들려줍니다. 사도행전 11:29을 찾아봅시다.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외국 도시였고, 그 교인들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팔을 걷어 부칩니다.
고대 사회에서 다른 민족을 아무 대가 없이 돕는 일은 사실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안디옥 교인들이 힘을 다해 돈을 모아 흉년이 든 예루살렘 교회에 보냅니다. 인종과 문화와 국가와 사상의 경계를 모두 뛰어넘은 이상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건 단 하나의 믿음,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한 몸”이라는 굳은 믿음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이 저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교회를 살리는 힘이 됩니다.
이게 본디 교회이고, 이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나만 은혜 받고,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말은 교회의 본래 정신에 어긋난 말이 됩니다.
입으로 주를 시인하고, 예수를 마음으로 믿는 일은 이렇게 나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치 작디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온갖 새들의 쉼터가 되듯 성장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주를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삶이고 신앙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가깝습니다. 하늘까지 올라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다 밑까지 내려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우리 귀에 들어왔고, 이미 우리 입에 놓였습니다. 선포된 말씀과 떡과 잔이 우리에게 있고, 가족, 사회, 교회라는 배에 말씀이신 주님이 동행하십니다.
그러니 물이 차오르거든 그 이름 하나만 부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그 소리가 끝나기 전에 주님의 손이 먼저 와 있을 것이고, 풍랑을 그치게 할 배, 주님의 심장으로 함께 살아가는 동료와 가족이 있는 자리로 저와 여러분을 데려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그 배에 함께 오른 하루하루가 우리 모두의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최주훈 목사
시편 18:1-6, 욥기 38:1-18, 로마서 10:5-17, 마태복음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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