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역사에서 막부를 해체하고 천황을 옹립한 서향(사이고다까모린지 뭔지...)의 비중은 막대합니다.
이 서향이란 자가 1878 년부터 중국과 한국에 스파이를 보냈는데,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하여 군사 현황과 지형.지세를 파악토록 최우선 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이렇게 스파이짓한 결과 청 봉천성 우장에서 활동한 사이코는 1882 년에 광개토왕비문의 쌍구탁본과 벽돌 1 개를 주어왔고,
조선으로 잠입한 두명은 1 개 대대 병력만으로도 조선을 충분히 집어삼킬 수 있다고 첩보 보고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크고 무시무시한 것이 만주와 한국 지도 제작이였으며,
1894.1905 년 청.러 전쟁에서 승리한 후 1931.1932 년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사변을 일으키기까지 일본 참모본부에서는
뚱딴지 같은 발상을 합니다.
지도 조작!
즉 지명 이동이란 것이며 시작점이 바로 산해관입니다.
이 산해관 위치와 관련하여,
현 한국사학계의 고대 지명에 대한 인식 정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도가 1780 년 연암 박지원의 연경.열하 로정도입니다.
당연히 현재의 중국지도에도 아래와 같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인용지도 - 연행록연구총서 (숭실대 후원?기관) 10 권/지리 , 손용택
자, 간단한 질문 하나 해 보지요.
<명사/지리지>나 <청사고/지리지>의 영평부 무녕현.임유현에 기록된 산해관의 위치가 위 인용지도에 표시된 곳일까요?
즉 <한서/지리지><후한서/군국지> 요서군 임유현이 위 지도에 표기된 산해관 위치일까요?
답은 `아니올씨다` 입니다.
그러면 어디란 말인가?
추정지도 - 원 산해관 위치
진시황 때 쌓은 장성의 한쪽 끝은 요서군 임유현에 있었으며 임유관으로 불리우다가 명 시기부터 산해관으로 불리웠습니다.
또 다른 한쪽 끝은 요동군 양평과 낙랑군 수성현이라고도 합니다.
즉 3 곳입니다.
아무튼, 한 시기 요서군이며 명.청 시기 영평부는 현대 지도에 표기된 산해관 2 지역이 아닙니다.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에서 산해관이라는 곳은 딱 한군데, 산해관 1 이란 곳 뿐입니다.
왜?
<한서/지리지>와 <수경주/대요수>에 기록된 백랑수 때문입니다.
즉, <수경주/대요수>에는 대요수의 서남쪽 지류인 백랑수가 우북평군 백랑현에 있는 백랑산에서 발원,동북류하여 요서군 유성현 북쪽을 지난 후, 한 갈래가 남쪽으로 꺽어져 요서군 임유현 옛성 서쪽으로 지나 동쪽으로 휘어 바다로 들어가고, 한 갈래는 계속 동북.동남류하여 요동군 방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합쳐진다고 하였고,
<한서/지리지> 요서군 임유현에는 유수가 백랑의 물을 이어받아 동쪽으로 흘러 새외로 나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서군은 한국사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지금의 란하 최하류에 있었고,
천관우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한 시기 우북평군은 요서군 서쪽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위의 <한/지>나 <수/요> 기록때문이며, 더욱 뒷받침하는 기록인 <후한서/군국지> 우북평군 주석에는 요서군 보다 무려 1000 리 씩이나 더 낙양과 가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우북평군에서 발원한 백랑수가 동북류하다가 갈라진 유수가 지금의 란하 동쪽에 있을 수가 없으며,
남쪽으로 흐르다 휘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유수 곁에 있었던 임유관.산해관도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의 란하 동쪽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청사고/지리지> 직예 영평부 임유현 기록에 있듯이 북쪽에 각산이 있고 그 위에 산해관이 있다고 하였지요.
이것을 묘사한 것이 조선 영조 시기 1740 년경 제작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란 고지도이며,
이와 똑 같은 것이 1562 년 명 정약증이 편찬한 <주해도편>에 실린 `요양총도`란 고지도입니다.
<서북양계....>
<요양총도>
위 두 고지도의 왼쪽은 똑같이 산해관부터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양총도`를 보면 산해관 동쪽의 바다나 삼차하 남쪽까지 바다로 묘사된 것이나 중앙 아래쪽으로 튀어 나온 육지 등등이 마치 지금의 발해.요동만.요동반도 그리고 파사 즉 압록강까지 묘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 시기의 지리 인식 수준을 나타낸 것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 1537 호인 <서북양계...>를 보면 현재의 요동만.요동반도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답은 <한서/지리지> 요서군 주석에 있습니다,
秦置 有小水四十八幷行三千四十六里
진나라에서 설치했다. 조그만 물길이 48 개 있고 그 길이를 합해보니 3046 리이다.
지금의 란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최하류 지역에 이름도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조그만 하천들이 무려 48 개이며
이 하수들의 길이를 모두 합해보면 3000 리에 이른다!
이 48 개 소수가 남쪽으로 발해와 이어져 있으니 별 수 없이 요서군 남쪽 지역은 바다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백랑수가 지금의 란하를 동쪽으로 건너뛸 수가 없으며 1250 리 대요수 역시
2100 리 염난수의 지류일 수 밖에 없으니 염난수.대요수.백랑수가 만나는 요서군에서 불과 300 리 떨어진
요동군까지, 동쪽은?
네, 바다와 같은 염난수 하류입니다.
그 염난수 하류가 바다처럼 보이기 때문에 `요양총도`와 같은 고지도가 그려지게 된 것이며 지금에 와서는 요동만처럼 보이게 된 것뿐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현대 지도에 표기된 산해관은 잘못 표기된 것이며, 실상은 잘못 표시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1911 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는 청국의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도 산해관은 직예 영평부 임유현에 있다고 하였고
북경에서 동쪽으로 약 650 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그 이후에 이 지역의 패권자인 일본이 산해관을 옮겼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 <사기>부터 <한서><삼국지><수서><당서> 등에 언급된 조선.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건넌 바다는 바로 지금의 란하 최하류입니다. 결코 지금의 아주 커다란 황해가 아닙니다. 조선 사대부들이 즐겨 쓰는 海東.東國의 기준이 바로 2100 리 염난수의 최하류인 바다입니다.
이것이 또한 <상서/우공>에 기록된 갈석을 오른쪽에 낀 하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