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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공적인 선교사의 사역과 삶
- 기본기 6C를 갖추자
성공적인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는 어떤 요건들을 갖추어야 할까?
필자가 선교사로서 살아가면서 평소에 늘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선교사의 삶과 사역이
성공적이냐 실패냐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고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실패한 선교사 같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 성공적일 수 있고, 우리가 볼 때 성공적인 선교사 같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
오히려 책망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여 보냄을 받은 선교사라면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추구하는 그런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공적인 선교사의 삶을 위한
기본적인 요건들을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1. 소명의식(Calling)
선교사에게 있어서 소명의식은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자기 정체성과 무엇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해 주는 정신적 지주이다. 그래서 선교사 바울은 그의 여러 서신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는 말을 빠짐없이 언급한다. 그리고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1:11).'고 말하며 부르심을 받은 근거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교사는 결코 자신의 뜻이나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의 고백처럼 선교사로 나오지 않으면 안될 만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강요에 의해 나온 것도 아니다. 선교사는 사도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소명의식은 선교현장에서 때로 사역의 열매가 없어 낙심이 될 때나 무기력할 때
소망을 가져다주고, 혹은 곁길로 빠질 위험이 있을 때 바른 방향으로 붙잡아주는 방향판이 되어준다.
복음을 위하여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소명의식은 제한되고 부자유한 선교현장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필자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듬해인 1993년 1월 처음 중국 땅을 밟으면서
장기선교사로 나오기까지 거의 매년 단기선교 비전트립을 다녀왔다. 수교 전만해도 적성국이었던 죽의 장막 중국 땅에
단기선교 여행을 하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불안하고 긴장되어도 단기간의 사역이었기에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령 문제가 되어 추방을 당해도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담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기선교사로 파송받아 온 가족이 함께 중국 땅을 밟았을 때의 심정은 달랐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평생을 바쳐 살고자
각오한 까닭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마치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선교사로 알고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이웃이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찬송하고 기도해야 했다. 때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 혹시나 경찰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사역이 시작되고 점차 늘어나면서 정신적 긴장과 부담은 비례하여 커졌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했지만 두려운 마음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가끔 주변에서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더욱 조심하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인 압박과 긴장속에서 나를 든든하게 잡아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소명의식이었다. 소명의식은 어떠한 환경과 상황속에서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가장 큰 힘이었다.
이 소명의식이 불안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갖게 하고 정신적 압박 가운데서도 자유함을 누리게 한다.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2. 능력(Competence)
성공적인 기업가가 되려면, 아니 오늘의 현실사회에서 성공하려고 한다면 강영우 박사가 말했듯이 실력(능력)은
기본이다. 선교사 역시 그렇다. 선교사가 현지에서 살아가면서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능력을 요구한다.
현지 언어를 배우고 유창하게 구사하는 능력, 현지 문화 적응능력,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능력, 여기에 더하여
선교사의 본질적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영적능력 등.
누군가 말했듯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첫째, 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고 둘째, 그 나라의 음식을 잘 먹고, 마지막으로 그 나라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사실 그렇다. 선교사의 현지 언어 구사능력은 선교사역의 깊이와 넓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초기 한국에 들어와 선교하였던 외국선교사들의 사역을 연구한 보고서에 의하면 현지 언어 구사능력이 뛰어난 선교사가
그렇지 못한 선교사 보다 더욱 활발한 선교사역을 했다고 한다. 어떤 선교사는 우리가 아무리 현지어를 열심히 배우고
잘 한다고 해도 현지인처럼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적당히 합리화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선교사가 비록 현지인처럼 될 수는
없다할지라도 현지언어를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선교지의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코 현지인과의 깊은 교제는 물론 활발한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다.
현지 문화 적응능력 또한 그러하다. 중국의 음식 가운데 ‘샹차이(香菜)'라고 하는 야채가 있다.
얼마나 맛있는 야채면 '향기로운 채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 하지만 냄새가 강하고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아
대다수 한국인들은 꺼려하고 있다. 선교사로서 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한국의 김치와 된장찌개만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있다.
선교사가 유창한 현지 언어를 구사하고 현지 문화적응능력이 뛰어난 것은 큰 축복이다. 이 축복은 바로 선교사의 본질적 사명인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다. 현지 언어능력과 타문화 적응능력이 전해야할 복음의 능력을 담을 그릇이라고 한다면 선교사는
기본적으로 그 그릇에 담을 복음(말씀)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와 충분한 경험을 갖추어야 한다.
선교사의 이러한 제반 능력은 그의 사역과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큰 밑거름이 된다.
3. 인격(Character)
선교사가 아무리 현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현지문화에 탁월하게 적응한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거창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주님의 인격이요 성품인 겸손과 나눔과 희생의 인격이 없다면
그의 능력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능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선교사의 인격이다.
아무리 선교사가 능력을 많이 구비하였다하더라도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그들위에 군림하려고 한다면 결코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사는 어떠한 인격을 갖추어야 할까? 주님은 우리가 닮아야하고 배워야할 인격과 능력의 본이시다.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능력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며,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두덩이로 5천명을 먹이시고도 12광주리를 남기신 일, 심지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능력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참 하나님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적극적인 면에서의 능력을 추구하고
그 능력을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보여주신 또 하나의 능력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 능력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주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말구유라고 하는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오셨다. 이 땅에서의 삶 역시 섬기시고, 나누시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눈에는 철저한 실패요 무능력이었다.
하지만 그 십자가야말로 죄인인 우리가 마땅히 달려 죽었어야할 자리였으며 그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의 말처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무능력'은 오히려 진정한 능력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선교사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능력 없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주님의 인격 즉 겸손의 능력,
나눔의 능력, 현지의 영혼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는 희생의 능력이다.
4. 관계(Connection)
선교사는 관계적 존재이다. 가장 가까이는 부부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라고 하는 가족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선교사와 후원교회와 총회선교부와의 관계를 갖고 있다. 선교지에서는 동료선교사와 현지사역자들과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관계속에서 선교사는 원만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만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면
선교사의 사역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부부가 동일한 마음과 비전을 갖지 못한다면 사역을 할 수 없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선교사는 부인이 선교사로 나오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남편 선교사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나왔다가
결국엔 이혼으로까지 가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 선교사의 잦은 출장과 부인 선교사의 가사일(어린 자녀 양육과 교육 등)의 압박은
부부관계를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부부간의 충분한 대화와 이해, 그리고 격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동료선교사와의 관계이다.
연구에 의하면 초기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선교회의 엄격한 선발기준(교리적, 신체적, 교육적, 현지적응능력, 팀워크,
예절, 인격 등등)을 통과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어도 선교지에 도착한 후
동료선교사와 화목하지 못해 많은 갈등을 낳은 예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주된 이유들로는 동료선교사의 사역성과에 대한
시샘과 질투를 꼽을 수 있으며, 선임선교사의 권위의식과 후임선교사간의 인식의 차이 등도 주요한 이유라고 한다.
후원교회와의 관계 또한 선교사에게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후원교회의 담임목사가 바뀌면 선교정책이 바뀌고
그에 따라 선교사 후원도 끊어버리는 예가 적지 않다. ‘꽌시’(관계)를 매우 중시하는 중국에서 선교사가 현지 동역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이러한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선교사가 또 하나의 관계를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수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필자는 이것을 선교사의 영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가 아무리 수평적으로 가족간의 관계나 후원교회와 현지 사역자들과의 관계를 잘 가진다고 할지라도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다면 그 관계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계요 사상누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선교사가 사역으로 너무 바쁘고 일이 많으면 자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갖기가 어려워 질 수 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과의 날마다 깊은 교제를 통해 날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힘을 공급받아
수평적인 관계로 흘러 보내야 할 것이다. 시편 25편 12절에서 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진 자의
축복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5. 전략(Concept)
기업이 자신의 분명한 전략을 갖지 않고 다른 기업이 잘된다고 하여 무작정 따라서 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선교사 역시도 그렇다. 다른 선교사가 신학교 사역을 한다고 하여 따라 한다거나 아니면 후원교회가 원하기 때문에
선교사의 은사와는 전혀 무관한 사역들을 추진하게 되면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선교사는 각기 서로 다른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선교사는 제자훈련의 은사를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선교사는 공동체 사역에 은사를 가지고 있다. 또 어떤 선교사는 전도와 교회개척에 은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선교사는 비즈니스와 같은 사업에 은사가 있어서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어쨌든 선교사가 수행하는 사역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와 개인의 경험과 능력 등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선교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갖게 되는 이러한 사역의 전략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전은 바로 위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흉내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사역과 비교해서 경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교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고유한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종종 보게 되는 안타까운 사실은 선교사들이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선교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분명한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동료선교사의 사역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거나
혹은 비교의식 속에서 시샘을 하며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을 하는 선교사는 많은 시간을 들여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역의 열매는 적다. 하지만 그 사역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되 다른 선교사의 사역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반면에 신학교 사역을 하는 선교사는 다소 사역의 규모가 크다 할 지라도 결코 자랑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선교사는 각자가 위로부터 받은 비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다른 선교사의 사역을 위해서는
존중과 격려를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사역의 진정한 평가와 성공의 여부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선교사 각자에게 부여한 비전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역의 방법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는 것(행18:5)'이어야 한다.
6. 협력(Cooperation)
흔히 한국 선교사는 개인사역은 탁월한데 협력사역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국인 특유의 강한 기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협력이 잘 이루어진 모델을 보거나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회가 선교사를 파송하지만 선교사는 후원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에 개교회 중심의 선교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하여 선교지 상황이 자유롭게 드러내놓고 사역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닐 경우에는 보안 문제 등으로 인하여
더욱 협력 사역을 어렵게 한다.
이제 21세기 선교사역은 협력사역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선교사 개인이 각자가 하고 있는 사역을 안정되게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역을 위해 은사와 물질과 시간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사역 자체가 팀사역으로 추진되는 것이라면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그 역할을 존중하며 사역의 결과까지도 함께 공유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서 교역자 선교사와 일반 평신도 선교사간의 협력이 이루어지고, 교회와 선교단체간의 협력, 교단과 교단간의 협력,
현지의 교회와의 협력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공동의 목표는 다름 아닌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할 것'을 당부한 사도 바울의 말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것을 당부 드린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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