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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神弓) 제14장
第 14 章.
만천(萬川) 설문빈(薛文賓).
2.
"조용히 하시오. 내 이미 저놈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해치
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더는 두고볼 수 없으니 혼이나 좀 내주려
는 것이오."
도일봉은 장군전을 먹여 조준한 후 손을 놓았다. 장군전은 유성처럼
날아 설문빈이 입에 문 옥소를 맞추어 중둥이를 뚝 부러뜨리고 맞은
편 기둥에 딱 하고 박혀 꼬리만 남아 파르르 떨었다.
이같은 사태에 하란과 정자의 두여인은 놀라 비명을 질렀고, 설문빈
은 호구가 찢겨 피가 흐르는 손을 멍청히 내려다 보았다.
도일봉은 황룡궁을 챙기고 태연히 앉아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간
신히 정신을 차린 설문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도일봉의 호통이 터
졌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이제 뭔가를 느꼈느냐? 죽움이란 이렇듯 한
순간에 결정나는 것이다. 사내자식이 기녀원에 왔으면 술이나 처마시
고 놀일이지, 왠 되지못한 청승이냐. 네놈이 세상살기 싫다면 한마디
말만하고 머리를 내밀고 기다려라!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죽여줄테니
말이다. 정 살기 싫다면 어디가서 목을 메든지 칼을 물고 죽든지 할
일이지 어째서 비싼 밥만 축내느냐 말이다! 학문이 너같은 놈이 배워
서 청승이나 떨라고 있는줄 아느냐 이놈? 네놈을 당장 처죽여야 내
직성이 풀리겠다만 너같은 놈을 죽여 내 손에 피를 뭏히는 것이 창피
스러워 참는줄 알아라! 그러니 조용히 술이나 처먹어! 에이 못난놈이
로다!"
한바탕 호통을 내지르니 그런대로 속이 좀 풀렸다.
호통소리가 워낙 대단 했는지라 술마시던 손님들이 모두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처다보았다. 도일봉은 못본척 벌렁 누워버렸다. 하지
만 속으로는 야단났다고 부르짖었다. 좇기는 신세에 이렇듯 소란을
피운다면 당장 행색이 들통날 것이 아닌가.
도일봉은 벌떡 일어나 행장을 챙겼다. 그리고는 보석주머니에서 한
알의 홍보석을 꺼내 하란에게 쥐어주었다.
"이거 받아둬요. 얼마나 나가는지 나도 모르지만 술값이나 하고,.
혹 남는다면 다음에 술이나 한잔 더 마시도록 하지. 혹시 나에 대해
묻는놈이 있거들랑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줘요. 괜시리 모른척
잡아 떼었다간 요절날 수도 있으니가. 빌어먹을 놈이 술도 못마시게
만드네. 그리고 승복은 태워버려요."
하란이 어리둥절하여 입을 열었다.
"여직 사람이 없는 듯 큰소리만 치더니 어째서 갈 생각을 했나요?"
"하하. 이 순진한 아가씨야. 나를 좇고있는 놈들은 군인들보다 백배
는 더 무서운 놈들 이란 말이야. 나도 벌써 죽기는 싫으니 일단 도망
쳐야지. 인연있으면 또 보자고. 하하."
도일봉은 지팡이를 끌며 훌쩍 사라져 버렸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설문빈이 급히 정자를 뛰처나오며 소리쳤지만 도일봉은 이미 사라지
고 없었다.
설문빈은 옥소를 깨드리고 벽에 박힌 장군전을 보고 한순간 전율(戰
慄)을 느꼈다. 도일봉의 호통 소리에는 식은땀을 흘렸다.
한순간 뒤바뀔 수 있는 생과 사! 아까운 음식만 축내는 밥버러지!
이같은 말이 천둥처럼 귀를 울리고 뒷골을 후려쳤다. 머릿속은 순식
간에 하얗게 비어버렸고, 식은땀만 줄줄 흘려내렸다. 가슴에 찬바람
이 윙윙 불어닥쳤다. 죽고 싶었다.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저 무시무
시한 화살이 차라리 가슴으로 파고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멍하기만 했다. 주마등처럼, 지난 날들의 편린(片鱗)들이 눈앞을 스
쳐 지나갔다.
꿈많던 어린시절. 산산이 조각난 결혼생활. 식구들과의 불화(不和).
집을 뛰쳐나온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동안 무엇을 했던가! 계곡으
로 산보나 다니고, 물가에서 낚시나 하고, 기녀원에 와서 술이나 마
시고, 계집들과 놀아나고, 그것이 전부다. 가슴속에 품은 정열은 갈
등으로 깨어지고, 머릿속에 계획했던 포부(抱負)는 번민으로 부숴졌
다. 무엇이 남았는가? 가슴에도, 머리에도, 남은 것이 없다. 아무것
도 없다. 오로지 생사를 결정짓지 못하는 비겁자가 남았을 뿐이고,
아까운 음식을 축내는 밥버러지가 생겨났을 뿐이다.
"배운바 학문으로 청승이나 떤다고? 배운 학문으로 청승이나 떨어!
아! 문빈아, 설문빈아. 너는 그 말에 어떤 변명을 하겠느냐? 어떤 말
로....! 어허. 넌 참으로 미쳤구나!"
그 한마디 말은 비수처럼 가슴을 헤집고, 창자를 갈갈이 찢어 놓았
지만 더 무슨말을 하리요! 설문빈은 정신이 아찔하고 다리가 후둘거
려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두 여인이 재빨리 부축했다.
"상공! 너무 상심마세요. 술주정뱅이의 헛소리에요. 어서 안으로 드
시지요."
"주정뱅이의 헛소리? 헛소리라고?"
설문빈은 갑자기 터져나오는 웃움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후후후, 주정뱅이라...? 후후 하하하. 주정뱅이가 하는말이 그 정
도라면 우리같이 정신 멀쩡한 인간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문빈아. 너는 참으로 밥벌레만도 못하구나! 아하, 하하하."
설문빈은 미친 듯 웃어대다가 어두운 하늘을 멍 하니 올려다 보았
다. 그의 두 눈에는 어느새 수정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설문빈은 조용히 여인들을 떨치고 정자로 올라 기둥에 박힌 장군전
을 살폈다. 반도 더 박혀들어 꼬리깃털만 아직까지 떨고 있었다. 힘
껏 당겨 보았으나 얼마나 단단히 박혔는지 꼼짝도 안했다. 할 수 없
이 부러뜨리려 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칼을 빌려오고서야 억지
로 자를 수 있었다.
설문빈은 반토박 장군전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내려다 보았다. 정말
잘 만든 화살이다. 대나무를 깍아만든 모양인데, 어떤 대나무가 이토
록 단단한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깃털은 꿩의 꼬리깃털을 달았다.
꼬리깃털 아래 글이 세겨져 있었다. "將軍 覩"라는 세글자. 도는 사
람의 성씨일테고, 장군이란 말은 언 듯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장
군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참이나 장군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설문빈은 하란에
게 와서 도일봉에 관해 물어보았다. 하란은 선망의 사내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걸자 정신이 아득하고 가슴이 설레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듬거리며 억지로 도일봉의 괴상하고 무서운 행동들을 하나
하나 들려주었다. 승복을 입고와서 평복으로 갈아입던 일, 친구를 찾
는다고 말, 설문빈의 모습에 호감을 가졌다는 말, 탄식하는 꼴을 보
고 화를 내던 일, 노래의 뜻을 물어보던 일, 지팡이 속에서 꺼낸 휘
황찬란한 활까지, 비교적 소상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름이 도일봉
이라는 것까지.
설문빈은 장군전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장군 도일봉. 장군 도일봉! 어허. 이런일이 있나! 그는 바로 여주
관아의 사택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달아났다는 그 도일봉, 그사람
이 아닌가!"
설문빈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의 부친은 몽고인들과 상당히 친숙하
여 관계(官界)의 소식이 빠르다. 설문빈은 집을 나온 이후 그쪽일에
대해서는 별달리 주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달전쯤인가부터 이곳 낙
양성에서도 성주의 엄명이 떨어졌는데, 그 명령이 바로 비적(匪賊)
도일봉이었다. 도일봉의 모습을 그린 화상이 낙양성 곳곳에 붙어있는
실정이다. 현상금(懸賞金)도 자그마치 천냥이나 걸려있다. 화상에는
승복을 입지 않았고, 머리도 길었으며, 엉성한 수염도 없었지만 틀림
없는 도일봉, 그사람이다.
본래, 도일봉이 여주관아 사택에 숨어들어 두 소녀를 희롱하고, 크
게 소란을 부리는둥 발칵 뒤집어 놨기 때문에 비적으로 오해받아 체
포명령이 떨어진 것이고, 몽고선녀 교영은 자신이 받은 모욕을 앙갚
음하기 위해낙양으로 돌아와서는 부친에게 고해바쳐 화상을 그리게
하고 현상금까지 걸어 잡아들이라 했다. 죄명은 관아침입, 강도와 살
인등이었다. 물론 사람이 여럿 죽기가지 했지만 이는 교영이 사사로
이 붙인 죄명에 지나지 않았다. 도일봉이 여직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무삼수를 찾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룻밤 내내 생각에 잠겨있던 설문빈은 도일봉을 꼭 한 번 만나봐야
겠다고 결정했다. 만나서 꼭이 할 말도 없었지만 그냥 만나보고 싶었
다.
다음날부터 그는 성안을 두루 돌며 도일봉을 찾았다. 하지만 오리무
중, 도일봉의 행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허전한 마음을 금치 못
하고 청향원으로 돌아왔다. 이젠 도일봉이 다시 나타나기만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술한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밖에는 지금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리며 장대같은 빗줄기가 후
두둑후두둑 쏟아지고 있었다.잠마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벌써 이
틀동안 해가 보이지 않았고, 비만 내렸다. 설문빈은 문득 황하와 낙
수(落水)가의 농민들이 걱정되었다. 요사이 몇 년에 걸쳐 이 근방에
는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세끼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고, 농토를 버리고 떠도는 사람들이 부
지기수였다. 이 장마로 또 얼마나 많은 수재민(水災民)이 생겨날 것
인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술독에 빠져있던 자신이 이런 걱정까지 떠
올리자 설문빈은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한번 도일봉을
만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와장창!
기녀원의 문이 부숴질 듯 열리며 한떼의 벙거지차림 포졸들이 밀어
닥쳤다. 설문빈은 혹 도일봉 때문에 몰려온 포졸들인가 하여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뜻밖으러뀫 포졸들은 곧장 자신에게 달려와 호통을
내질렀다.
"꼼짝마라 이놈! 범인이 여기있다. 잡았다!"
포졸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단박에 오라를 지우려 했다.
"이 무슨 짓인가!"
설문빈이 당황하여 호통을 치자, 포졸의 오장쯤 되보이는 녀석이 육
모방망이를 흔들며 소리쳤다.
"설문빈. 그대를 납큰나으리(拉大爺) 따님과 우나르의 살인혐의(殺
人嫌疑)로 체포하겠다!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설문빈은 깜짝 놀라 오장을 바라보았다. 납대야의 딸이라면 바로 자
신의 몽고 아내다. 우나르란 자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부인이 살해
당했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귓속을 위잉 울렸다. 애초에 애정없는 결
합이었다. 한이불 속에서 잔것도 단지 몇번 뿐이다. 아내가 다른놈과
배가 맞아 나돌자 분노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리고 집을 나왔는데,
그 아내가 살해 당했단다. 슬픈것도 같고,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는것도 같았다. 따지고보면 그녀 또한 부모들에
의해 희생당한 처지다.
"그녀....그녀가 죽었다고?"
"잔소리마라!"
오장의 호통에 설문빈은 오히려 정신을 차렸다. 그는 오장을 향해
꾸짖었다.
"네이놈! 네놈이 대체 누구관데 나를 핍박하느냐! 혐의가 있다면 죄
목을 읽고 즐거물을 내놓아라. 어서 자초지정을 말하고 증거를 보이
란 말이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줄 알았더냐!"
오장은 그만 찔끔하고 말았다. 사실, 물증같은 것은 없다. 더욱이
이건 남녀간의 간통사실이 걸려있어 일을 당한 쪽에서도 쉬쉬하고 있
다. 그러니까, 설문빈의 아내가 우나르란 몽고놈과 밀통을 하다가 현
장에서 누군가에게 목이 잘려 살해된 것이다. 더욱이 현장에는 '간부
간부(姦夫姦婦)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글씨까지 벽에 피로 쓰여 있었
다. 설문빈이 첫 번째 용의자가 되는건 당연한 일이다. 두사람은 바
로 이틀전에 죽었다.
이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설문빈은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생각해보면
필시 도일봉인가 하는 사람이 저지른 일이 분명하다. 정신이 다 아찔
했다. 그 사람이 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 서슴치 않고 벌인단 말인
가? 설문빈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두 사람이 죽었다니 애석한 일이오만 난 이미 그들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요. 반년이 넘도록 집에 가본작이 없소이다. 더욱이 요 몇일
동안 나는 이곳에서 나가본 적이 없어요. 내가 사주를 했다고도 생각
지 마시오. 그러니 오장은 돌아가 범인이나 잡도록 하시오. 뒷처리는
설가장에서 할 것이외다."
사실, 간통하는 남녀는 현장에서 죽일 수 있는 것이 민간의 불문율
(不文律)이다. 다만 이 사건은 몽고인이 관련 되었기에 이토록 소란
스러워 진 것이다. 당시의 법률은 몽고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한
인, 특히 강남의 남인들이게게는 너무도 불리했다. 몽고인이 한인을
때려죽이면 나귀한필로보상하면 그만이고, 한인이 몽고인을 다치게
만 해도 사형에 처해졌다. 이런 지경인데 간통하다 죽었다고 해서 의
심스런 한인을 조사하지 않을리 있겠는가.
설문빈의 차근차근한 말에 오장녀석은 공연히 헛지랄 떤 것 같아 머
슥한 기분이 되어 한동안 이것저것 들추며 야료를 부리다가 비실비실
사라져 버렸다. 기녀원 사람들이 모두 설문빈 편에 서서 증언을 해주
는지라 오장으로서도 달리 뻗댈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간통하던
년놈이 죽었다고 오히려 고소해 했다.
포졸들이 돌아가자 설문빈은 방구석에 처박혀 이생각 저생각 찹찹한
심정이 되어 이틀을 보냈다. 어제 하루 잠깐 비가 개이는 것 같더니
다시 비가 내렸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급하게 웅려퍼졌다. 설
문빈은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란이 달려와 더듬거리며 입
을 열었다.
"공자님. 그가.... 그사람이 왔어요! 지금..."
설문빈이 다구쳐 물었다.
"누구? 도일봉 그사람 말이오?"
"그사람이에요. 그사람이에요! 비에 흠뻑 젖어가지고 와서는...지금
막 화를 내고 있어요."
"화를 낸다고? 어째서?"
설문빈은 하란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
다.
"그대가 먼저 가서 내가 곧 간다고 통보좀 해주구려."
하란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가버렸다. 설문빈은 설레이는 마음을 안
정시키고, 잠시 머뭇거린 후 도일봉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하란의
말대로 도일봉은 비에 젖은 옷을 닦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못된 계집애! 못난 것 같으니! 감히 날 우숩게 보고....에이, 못된
계집애!"
설문빈은 누구를 욕하는지 의아했다. 설문빈은 밖에서 잠시 머뭇거
린 후 헛기침을 몇번 하고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화를 내
던 도일봉은 설문빈을 보고 눈을 똥그랗게 떳다.
"어라? 그대는 아직도 가지않았소? 잘 되었소. 자 앉으시오. 제기
랄....이번엔 내가 청승을 떨고 있으니 그대에게 욕을 먹게 되었소이
다. 앉으시오. 앉아요!"
도일봉의 횡설수설에 설문빈은 어리둥절하여 하란을 바라보았다. 그
러나 하란은 고개를 저을 뿐이다. 설문빈은 도일봉의 앞자리에 앉았
다. 하란이 두사람의 차를 따라주었다. 설문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생은 낙양의 설가장, 만천 설문빈이라 하오이다. 도형을 다시한
번 만나보길 소원했더니 이처럼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전날의 깨
우침은 정말 고마웠소이다. 하지만 이번일은 괜한일이 아니었나 생각
되는구려."
"일? 무슨 일? 그대는 혹시 그 간부계집을 아까와 하는 것이오?"
도일봉의 다구침에 설문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뜻이 아니외다. 간부간부는 죽어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 일로
인해 형장께 피해가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관아
에서 찾는사람 아니겠소?"
도일봉이 또 화를 벌컥 냈다.
"내가 죄인이라는 말 말이오? 어림도 없는 소리! 이게 다 그 못된
계집애가 꾸민 짓이란 말요. 그 계집애들은 정말 못되먹어서 자기들
을 보호해주고 살려준 사람을 이제와서 죄인으로 만들어 놓다니! 은
혜를 원수로 갚아도 분수가 있지! 이게 무슨 수작이람! 못된것들!"
설문빈은 지금 무슨말을 하는지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누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단 말이오?"
"누군 누구겠어! 교영, 이 못된 것이지. 그 계...그녀는 내게 무슨
앙심을 품었는지 글쎄 나를 잡으라고 성안에 온통 화상을 붙였지 뭐
겠소? 그것도 모자라서 뭐 현상금으로 은자 일천냥을 걸어? 그것 뿐
이라면 내가 이토록 화를 낼까! 내가 찾아가서 다정하게 이름을 몇번
불렀더니 마구 화를 내며 선물로 준 목걸이까지 집어던지지 뭐냔 말
요. 그것뿐이면....제기! 사람들을 불러서는 나를 죽도록 좇기 뭐겠
소!허어. 이런 못된 것을 어찌 마누라로 삼을 수 있을꼬? 아마 이 못
된것도 시집도 가기전에 간부와 놀아날 모양이오!"
도일봉은 요 몇일 이리저리 돌며 무삼수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또한
설문빈의 마누라를 찾아 간부와 놀아나는 것을 보고 아예 한이불 속
에서 죽여버렸다. 무삼수를 찾는일이 잘 되지않자 도일봉은 곧 낙양
관아의 담장을 넘어 교영을 찾아갔다. 물론 그 전에 거리에 나붙은
자신의 화상을 본 후였고,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려 교영에게 간 것이
다. 하지만 교영은 도일봉을 보자마자 마구 화를 내며 목걸이를 집어
던지고 군졸들을 불렀다. 도일봉은 제대로 말한마디 못하고 좇겨나와
성안을 이리지리 돌다 겨우 청향원으로 숨어든 것이다.
하란이 궁굼함을 참지 못하고 자초지정을 물었다. 도일봉은 여전히
투덜거리면서도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듣고난 하란이 웃었다.
"호호호. 그건 그대의 잘못이에요. 외간남자가 어찌 소저들 방엘 들
어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교영아가씨는 그야말로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만심이 대단해서 콧대가 하늘만큼 높은데 그대가 입을 맞추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었겠어요? 목걸이는 더욱 받지 않겠죠? 더군다나 그
녀는 몽고여인이에요. 그런 그녀가 한인을 거들떠 보기라도 하겠어
요?"
도일봉은 여전히 호통만 쳤다.
"그렇다고 감히 지아비될 사람에게 행패를 부려! 몽고여인이라 해도
이미 나에게 시집오게 되있는 이상 내 말을 들어야지! 흥. 다음번엔
그 버릇을 톡톡히 고쳐주고 말테다. 계집이 되가지고 그리 사나와서
야 어디 쓰겠어? 그리고 몽고선녀가 예쁘긴 하지만 역시 한나라선녀
가 더 예쁘단 말야. 내가 저를 선택한 것도 그리보면 다소 억울한 감
이 없지 않다고! 한나라선녀는 친구의 마누라니 내가 어쩔수는 없지.
대단한 친구거든. 후에 큰 일을 해내고 말거야. 지금도 하고 있지만
말야."
하란과 설문빈은 도일봉의 횡설수설이 우숩기만 했다. 말은 많이 했
지만 알아들 수 있는 말은 반도 되지않았다. 설문빈이 은근히 물었
다.
"누가 그처럼 대단하고, 미인을 아내로 맞았소이까?"
"그야 당연 청운장주 문국환이지 누가 또 있겠소? 난 여직 그들 부
부보다 훌륭한 사람은 못봤다오."
"청운장주 문국환! 그 사람이구려!"
"그를 아시오?"
"직접 보진 못했지만 명성은 익히 들었지요. 인품과 학식이 뛰어나
주위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 않는다더구려."
하란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그분 부인이 바로 강남미인 화영(華英)이군요! 소화영(蘇華
英) 말이에요. 화영과 교영은 강남북에서 으듬가는 미인들이에요. 그
래서 말하기를 남북이영(南北二英)이라고 하지요!"
"남북이영! 하하. 거 참 어울리는군!"
설문빈이 화제를 돌렸다.
"문국환선생이 학문이 도저하다는 말은 있으나 또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금시초문(今時初聞)이구려?"
"그런 말일랑 차차 하기로 합시다. 문형은 지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설문빈은 도일봉의 말뜻을 정확히 알았다. 갑자기 맥이 팍 빠져버렸
다.
"그렇구려. 모두들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데...나만 홀로 이렇구
려!"
설문빈의 한숨소리에 도일봉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다고 너무 상심마시오. 나도 집을 나올때만 해도 몽고와
한나라의 차이도 알지못해 놈들의 군대에 들어가려 했지요. 나는 장
군이 되는 것이 꿈이거든! 하지만 분부인을 만나고 문형에게 가르침
을 받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장군이 되기로 하고,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오."
만천 설문빈은 그제서야 장군전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도일봉은 슬그머니 만천 설문빈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만천. 만천이라? 그대의 이같은 이름자엔 정말 거창한 뜻이 담겨있
구려? 대체 어떤 물이 있어 만가지 줄기로 흘렀다가 모여드는 것이
오? 보시오 만천. 내 알아보니 그대가 부른 그 노래에는 깊은 뜻이
있더구려. 그대는 마음속에 욕심이 많소?"
만천은 쓰게 웃었다.
"욕심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리요? 형장 말대로 청승에 지나지 않
소이다."
"그런말 마쇼. 배운 사람이 뭘 그리 째째하게 구시오? 그땐 내가 화
가나서 해본말에 지나지 않아요! 배운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지
요. 더욱이 뜻이 있고 하고 싶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니겠소?
그대는 혹 남창에 가볼 생각은 없소?"
"남창엘?"
"그렇소. 남창말이오. 문형이 만천형을 보면 틀림없이 당장 친구가
되려 할게요."
만천은 그 말에 솔깃했다. 무엇인가 하고싶다. 이제 번민하고 괴로
워 하는 것은 지쳤다. 배운 지식과 마음 속의 포부를 이대로 겹인다
는게 너무나 아까왔다. 그리고 가슴은 아직도 뜨겁다. 다시 술독에
빠져 청승을 부릴 것 같으면 도일봉 말대로 칼을 물고 말리라! 문국
환은 그와같은 일을 하고, 또 그 일이 자신의 뜻과 일치한다면 목숨
이라도 바치지 못하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만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도형께선 내게 욕심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는데, 나도 도형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도 되겠소?"
"엥? 핫핫. 그대의 물음은 그야말로 요령부득(要領不得)이로군! 욕
심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것이요, 아니면 물어봐도 되는지를 묻는
것이오? 난 그와같이 말을 돌려서 하는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오.
물론 나는 욕심이 많소이다. 다른건 집어치고, 최소한 내 이름자 만
큼은 이루고 말 것이오."
일봉(一峰). 즉 태산봉우리 만큼은 이루겠다는 말이다. 만천이 계속
물었다.
"그렇다면 얼아나 이루었소?"
"흐음. 집나온지 이년이지만 아직은 나와 무삼수라는 친구, 둘 뿐이
오. 그 친군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내겐 땅속에
뭏여있는 대보물이 있소이다. 그걸 찾아 사람을 모우고 한바탕 해볼
요량이오!"
"보물?"
만천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눈을 부릅떳다.
"흑야묘 도일봉!"
만천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컷음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도일봉이
란 이름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흑야묘란 괴상한 별명은 이곳
낙양은 물론 하남땅 전체에 이미 알려질만큼알려져 있는 실정이다.
만천도 물론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흑야묘란 이름이 근자에 그처럼 유명한데도 나는 앞에 두고도 몰랐
구려! 헌데 그 지도는 이미 순어 없앴다고 들었는데?"
도일봉이 의기양양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짜였다오. 사실, 그당시 나 자신도 너무 흥분하여 그것이 가짜인
지 진짜인지도 몰랐지요. 하지만 지금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대치란
놈은 워낙 음흉해서 그걸 믿지 않을거요. 그런데도 그놈은 지도가 이
미 없어졌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니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는 뻔
한 일이외다. 나도 그만한 궁량은 있다오. 없다고 소문내고 슬그머니
나를 잡아 혼자 독차지 하려는 수작이지! 흥. 못된녀석! 양도깨비!"
만천은 도일봉의 속이 보기보다 깊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중대한 비밀을 함부로 발설한다면....?"
"그만두시오! 사내가 그리 째째해서는 못쓰오. 그대는 말을 가릴줄
알만큼 학문이 높지않소? 그런말은 쓸데없는 것이외다. 그리고 여기
이 하란아가씨도 그대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것이오."
만천은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상대는 처음본 자신을 믿는
데 자신은 믿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옹졸한 생각인가! 배운바
학문이 깊다한들 드넓은 가슴에 막힘없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
는건 역시 쉬운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하란의 짝사랑을 알리 없
는 그로서는 이 여인이 어째서 자신 때문에 입을 다물것인지 의아하
기만 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내가 잘못 되었소이다. 그렇다면 도형께선 지금 사람이 필요 하겠
구려?"
"두말하면 잔소리! 난 본래가 무식하고 배운게 없어 지도가 손에 있
어도 그 이상한 글들과 도형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어요. 사실...
그대가 날 도와주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대처럼
잘생긴 사람이 나를 따르겠소? 그렇다고 내가 그대를 따를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오?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거라오."
만천은 빙그래 웃었다. 이 위인은 말처럼 배운게 없어 말을 꾸미거
나 돌릴줄도 모른다. 하지만 하고싶은 말들은 모두 하고있으니 모자
란 사람은 아니다.
"도형께서 소생을 그리 높게 봐주시니 고맙구려. 내 비록 문선생보
다 잘난 것은 없지만 청운장으로 가진 않겠소이다. 청운장은 이미 일
가를 이루고 있으니 어렵더라도 나름대로 꾸려나갈 역량이 있으리다.
소생 역시 새로 태어났으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소
이다. 도형이 마다하지 않는다면 형장과 함께 가겠소이다."
도일봉은 신이나서 껄껄 웃었다.
"나도 이야기꾼들에게 들은적 있소! 저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方)은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던 항우(杭雨)를 찾아가지 않고, 새로이 시작
하는 유방(儒方)과 일을 했지요. 과연 그대의 말이 맞아! 시작은 일
의 반이라! 반을 놓치면 그만큼 재미가 없지요. 하하핫."
"장자방이오?"
"그렇고말고! 장자방 말이오. 제갈량과 더불어 유명한 군사(軍師)들
아니겠소! 그대는 장자방에 제갈공명이 되시구려. 나는 유방과 유
비....아니지! 유비는 좀 멍청한데가 잇고, 우유부단(優柔不斷)하여
큰 일을 이룰 수 없는 인물이니 빼버려야지. 아뭏튼 그리 합시다. 우
리 둘이 말을 타고 신나게 달려봅시다!"
"유비는 인의로운 인물인데 어째서 마다하는 것이오?"
"음. 나도 유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너무 소신하지 않소? 큰 일에 닥쳤을 때 주저했고, 인자하지만 결단
력을 발휘하지 못했소이다. 제갈공명같은 명재상이 있었지만 그는 결
국 조조를 이기지 못했소. 이는 제갈공명이 못난 것이 아니라 바로
유비가 못났기 때문이외다. 나는 일찍 죽기 싫고, 또 남에게 지기도
싫으니 유비보다는 차라리 조조를 택하겠소이다. 조조는 천고이래 욕
을 얻어 먹었지만 그는 결국 천하를 장악한 인물이외다."
"허!"
만천은 도일봉의 사고방식이 남들과는 다른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비에게 그런 단점들이 없는건 아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인의(仁義)로운 것을 좋아하는지라 유비를 옹호한다. 하지만 도일봉
은 그 반대가 아닌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까지 들이대면서! 만천은
도일봉의 이같은 사고방식이 대체 어디서 연유됐을까 궁굼했다. 그러
나 당장 알아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좋소이다. 도형은 유방이 되시오. 소생은 장자방이 되보리다!"
"그럼 이제 우린 한식구가 되었소이다그려! 하하. 자, 술 석잔으로
자축을 하십시다. 드시오!"
두사람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 석잔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잔을 땅에
팽게쳐 깨버렸다. 도일봉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우리 형세가 불리하니 일단은 친구처럼 지냅시다. 그런 후
사람들이 모이고 조직이 정해지면 그때가서 다시 호칭하도록 하지요.
난 그대를 만천형이라고 부르겠소. 만천형도 좋은대로 골라 잡으시
오. 흑야묘란 이상한 별명만 빼고 말이오. 이 별명은 하대치란 작자
가 붙여준 것인데 남들이 모두 따라부르게 되었소. 하지만 그리 좋은
이름은 아니지요."
"좋소이다. 우선 도형이라 간단히 부르고 후에 달리 호칭하도록 하
리다."
"자, 계속 술을 드십시다!"
"드십시다. 하하하."
두사람은 밤이 가는줄도 모르고 술잔을 기울였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감사합니다,
잘밨어요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ㅊ
즐감요
유방의 장자방?????
햑식은 없다지만 알건 다아는 실용적 인간상 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