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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여러분. 안녕 하세요? 저는 닉네임으로 사랑님님이며 세례명은 율리안나입니다. 저는 사실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입니다. 저는 엄마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해서 2살 때까지 만해도 정상적인 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3살의 나이가 되어 장애가 생겼습니다. 저는 오른쪽 손과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왔던 저 자신입니다. 제가 3살의 나이에 장애가 생겨 저희 부모님과 외할머니께서는 저를 데리고 전국에 있는 대학병원을 다녔던 분이십니다. 제가 3살의 나이 적에 저는 깨어 나지를 못 해서 부모님과 외할머니께서 저를 등에 엎고 다니시며 저를 깨어나게 해보겠다고 하시며 전국에 있는 많은 대학병원을 다니셨던 부모님과 외할머니이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외할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많은 대학병원을 다닌 중에 서울에 있는 백병원에서 깨어 났다고 저희 부모님과 외할머니께서 저에게 말씀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지체장애에 속합니다. 저는 사실 오른쪽 손과 오른쪽 다리 말고도 다른 곳에 또 장애가 있는데 장애 판정을 받을 수가 없어 그냥 지체장애로만 판정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몸에 장애가 있어서 부모님께서는 초등학교 들어 갈 시기에 다니지 못 하게 하시고 제 밑으로 동생이 초등학교 들어 갈 시기에 같이 다니게 하셨던 부모님이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 동생에게 언니가 장애가 있어 몸이 불편 하니 돌봐 주면서 초등학교 데리고 다니라는 부모님 말씀을 동생에게 해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 합니다. 제 동생은 부모님 말씀 대로 저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데리고 다녔던 동생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부모님께서 저에게 말씀 하시기를 병원이든, 어디든 갈 때는 부모님이 같이 다녀 주지 않을테니 저 혼자 다니라고 하셨던 부모님이셨습니다. 부모님은 제 동생에게는 언니 초등학교만 같이 다녀 주고 병원이든, 어디든 갈 때는 혼자 다니게 하라고 동생에게 말 해주시기까지 하셨던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제가 생활 속에서 왼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가르쳐 주셨던 부모님이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저에게 너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필요 할 것이라고 말씀까지 해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부모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것은 밥 짓기, 반찬 만들기, 요리 시간 맛 평가 하기, 설거지 하기, 청소 하기, 빨래 하기 등등 생활 속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른이 된 저는 그 당시에 부모님께서 가르쳐 주셨 것들을 지금 저 혼자서 왼손 하나만으로 사용하며 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제 동생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같이 다니면서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닌 곳은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로서 제 동생과 같이 다녀야 했기에 저는 비장애인 학생들에게 장애인 이라는 신분에서 많은 손가락질과 놀림을 받았던 저 자신입니다. 제가 장애인 이라는 신분에서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비장애인 학생들에게 장애인 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손가락질과 놀림을 당할 때마다 제가 슬퍼 울면 제 동생은 저를 달래 주었습니다. 저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비장애인 학생들이 장애인 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놀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비장애인 학생들이 손가락질 하고 놀리고 할 때마다 제가 슬퍼 울면 달래 주던 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저에게 장애인 이라고 손락질 할 때마다 학교 다니기가 정말 싫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저에게 초등학교는 졸업 해야 한다면서 초등학교를 보내곤 했습니다. 저는 제 동생과 억지로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6학년을 제 동생과 졸업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중학교 들어 갈 때는 제 동생과 함께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다닌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제 동생이 게으다면서 먼곳으로 중학교 다니게 하시고 저는 가까운 곳으로 중학교를 다니게 하셨던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중학교를 동생과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저 혼자서 중학교를 다녀야 했으니까요. 제가 다닌 중학교도 초등학교 때처럼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중학교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비장애인 학생들이 저에게 손락질 하고 놀리던 시절에 중학교에 들어 가면 안 그러겠지 하고 생각 했지만 비장애인 학생들은 아니었습니다. 비장애인 학생들은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 하면 중학교에 입학 할때 한 초등학교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한 비장애인 학생들이 오기에 저와 비장애인 학생들과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 되었습니다. 저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중학교 때도 초등학교 때처럼 3년을 똑같은 시련을 겪었고 장애인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니고 졸업 했어도 비장애인 학생들의 손가락질과 놀림으로 인해 많은 시련을 겪었던 저 자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다녀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같이 졸업 했어도 학창시절 졸업 친구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학창시절 비장애인 학생들이 저에게 장애인 이라는 것에 손락질 하고 놀림으로 인해 친구를 사귀고 싶지가 않아서 지금 이 순간까지 학창시절 얘들과 연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초등학교 은사님들은 다 돌아 가셔서 연락은 안 하고 중학교 은사님들과는 지금도 연락 하고 지냅니다. 저는 학창시절을 힘들게 다녀서 고등학교, 대학교는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제가 그때 비장애인 학생들 때문에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을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죠.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도 그렇고 비장애인 대학생들이 다니는 대학교에서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런 시련이 저에게 올까 해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금 그 때에 고등학교나 대학교 나오지 않은 것에 후회 하지 않습니다. 저는 내년 1월에 저에게 있을 수술 2번 하고 마무리 하면 제가 하고 싶은 만화 그리기를 할꺼니까요. 저는 사실 올해 3월에도 충청남도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에서 오른쪽 장애 있는 발이 너무 아파서 수술을 했는데 발 속에 철심을 많이 박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내년에 철심을 빼는 수술을 하는데 충청남도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에서 하지 않고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하게 됩니다. 충청남도 순천향학교 천안병원에서 발 철심 빼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오른쪽 손도 너무 아파서 수술 하기에 교수님께서 오른쪽 발 속에 있는 철심 빼는 수술까지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학창시절에는 비극이었다고 봅니다. 저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이었기에 정말 힘든 학교생활을 보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중학교 3년 과정을 비장애인들과 마친 뒤 졸업을 하고 나서 부모님과 집에서 생활 해오다가 제가 28살 때에 장애인정보화협회 컴퓨터 무료 교육을 2년 동안 배우러 다녔습니다. 저는 장애인정보화협회 컴퓨터 무료 교육을 배우러 다닐 때 강사 선생님이 장애인들에게 험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컴퓨터의 기초인 키보드 치는 방법을 한 달을 가르쳐 주시고 한글타자연습을 한 달을 가르쳐 주시고 한글 쓰는 방법을 한 달을 가르쳐 주셨던 강사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기초 단계는 세 달 동안 강사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고 여섯 달 동안 장애인들에게 컴퓨터의 여러가지 엑셀과 파워포인트 등을 가르쳐 주셨던 강사 선생님 이셨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정보화협회 컴퓨터 무료 교육을 1년을 하고 난 뒤에 회장께서는 저에게 대회 좀 나가라고 말씀 해주셨습니다. 회장님 말씀으로는 제가 컴퓨터 배운지 1년 되었으니 대회 나가도 된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부탁 하셨습니다. 저는 회장님께 다른 장애인분 내보시라고 말 해주니 회장님께서는 제가 나가야 한다고 말씀 해주셔서 할 수 없이 제가 대회를 3번 나갔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컴퓨터 키보드로 글씨를 쓸 때 왼손 하나 만으로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장애인정보화협회에서 컴퓨터 무료 교육을 배운 뒤에 부모님 계신 고향 집 읍사무소 주민센터 사회계 장애인 담당 복지사 추천으로 장애인 행정 일을 2년 동안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 만해도 장애인 행정 일이 처음 생겼 때 이라서 저는 장애인 담당 복지사님 덕분에 장애인 행정 일을 2년 동안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2년 동안 읍사무소 주민센터 사회계에서 장애인 행정 일을 하고 다른 장애인들에게 장애인 행정 일을 할 수 있게 하려고 2년만 하고 물러 났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집에서 생활 하며 보내는 도중 제 몸이 너무 아파 왔습니다. 그래서 엄마께 말 했더니 시내 병원에 가보라고 하셔서 병원에 가니 진찰을 본 결과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료 받아 보라는 것이 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 온 뒤로 엄마께 이야기 했더니 저에게 예전에 맹장 수술 했던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료 보라는 말에 그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보고 검사한 결과 제 몸 속에 혹이 2개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무슨 혹이 생겼냐고 물으니 교수님은 이 혹이 커지면 암으로 된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그 순간 당황 했습니다. 교수님은 저에게 그 혹이 몸 속에서 어떻게 됐는지 6개월 뒤에 다시 검사 해본다고 말해 주고 저는 진료 보고 나와 집으로 와서 엄마께 말도 못 하고 제 마음으로 끙끙 앓았던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제 몸에 혹이 2개가 생겼다는 교수님 말씀에 그 혹이 커지면 암이 된다는 말씀이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집 가까이에 있는 성당에 가서 성모님께 6개월 검사 하는 날 돌아 오는 날까지 기도만 하러 다녔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카톨릭 천주교 성당 신자가 아닌 무교인이었으니까요. 그때 당시 만해도 제가 무교인으로 성모님께 6개월의 기간 동안 성당으로 기도를 하러 다니고 나서 저 혼자 마음으로 끙끙 앓았던 것을 엄마께 이야기로 꺼내 놓으며 6개월이 되어 대학병원으로 다시 검사 하러 오라고 해서 가야 한다고 이야기 했었던 저 자신이었습니다. 엄마께서는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대학병원에 갔다 오라고 말씀 해주셨습니다. 제가 성당에서 6개월의 기간 동안 성모님께 기도를 한 뒤에 대학병원에 검사를 마치고 몇 칠 뒤에 검사 한 결과를 보러 교수님을 찾아 갔는데 교수님께서 저에게 몸 속에 2개의 혹이 없어 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 말씀에 노랐던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몸 속에 2개의 혹이 없어 졌다는 교수님 말씀에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저에게 어떻게 해서 2개의 혹이 없어 졌냐고 저에게 말씀으로 해주셨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별로 한 것이 없다고 말 해주면서 교수님께서 처음에 저에게 몸 속에 2개의 혹이 생겼다는 말씀에 저는 답답한 마음으로 저희 집 가까이에 있는 성당으로 발길이 닿아 가서 6개월의 기간 동안 검사 하는 날 돌아는 날까지 성모님께 기도만 꾸준히 했을 뿐이라고 저는 이야기 해주었던 저 자신이었습니다. 대학병원 교수님께서는 제 이야기를 듣고 성모님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저에게 무교인이면 교리공부터 시작 해서 세례까지 받고 성당에 다니라고 말씀까지 해주셨던 대학병원 교수님이셨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병원은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을 다녔는데 이 대학병원이 카톨릭 천주교 대학병원입니다. 그래서 대학병원 저 담당 교수님은 저에게 교리공부터 해서 세례까지 받고 성당 다니라는 말씀을 저에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집에서 가까이에 있는 성당을 찾아 신부님을 뵙고 제가 성당 다니고 싶으니까 교리공부에 대한 상담을 한 뒤에 일요일 마다 주일 미사로 오전 10시 미사가 끝나면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교리공부를 시작 했었습니다. 제가 교리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제 학창시절 은사님들을 성당에서 만나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학창시절 은사님들은 저에게 이 성당에 웬일 이라며 말씀을 저에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며 카톨릭 천주교 성당 신자가 되기 위해 교리공부를 배우고 세례를 받고 싶어 성당을 찾아 왔다고 은사님들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제가 졸업한 학교 옆에 성당이 있고 성당 옆에 학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창시절에는 그냥 구경을 다니듯이 성당을 왔다 갔다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 제가 성당을 찾아 교리공부를 배우려고 하는 도중에 학창시절 은사님들을 다시 성당에서 만나니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알고 보니 은사님들은 학교를 퇴직 하시고 성당에 다니는 신자로 성당에서 하는 일을 맡아 가며 성당에서의 활동을 해나 가셨던 은사님들 이셨습니다. 학창시절 학교 은사님들께서도 제 발로 스스로 성당을 찾아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 받겠다고 찾아 온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 하다며 저를 칭찬 해주셨던 은사님들이셨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6개월의 과정 동안 신부님과 학창시절 여자 은사님께 교리공부를 배운 뒤 세례를 2010년 7월11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제 대모님은 학창시절 학교 여자 은사님이 제 대모님으로 해주셔서 지금은 제 대모님이 학창시절 학교 여자 은사님이 제 대모님이십니다. 저는 부모님 계신 고향 집에 가면 제가 은사님들 보고 싶을 때는 퇴직 안 하신 은사님들은 매년 마다 스승의 날에 학교에 가서 찾아 뵙고 퇴직 하신 은사님들은 제가 교리공부 하고 영세한 성당에서 일 하시니까 보게 됩니다. 제가 은사님들 찾아 뵐때는 은사님들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은사님들과 저와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다보면 은사님들께서 학창시절에 저랑 졸업한 얘들이 제 이야기를 하며 어디에서 사는지 궁금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은사님들께 저랑 같이 졸업한 얘들이 저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물어 보게 되면 연락처도 알려 주시지도 마시고 어디에 사는지도 알려 주시지 말라고 은사님들께 부탁 하곤 합니다. 저는 지금도 학창시절 같이 졸업한 얘들과 연락 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만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은사님들께서는 저에게 말씀 해주시기를 저랑 같이 학창시절에 졸업한 얘들이 학교에서 간혹 동창회를 가지며 은사님들을 초대 한다고 합니다. 학창시절 같이 졸업한 얘들이 제 이야기 은사님들께 하며 한번 쯤은 제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저에게 이야기로 해주시던 은사님들 이셨습니다. 저는 동창모임도 가고 싶지가 않아서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학창시절 때 비장애인 학생들이 저에게 손락질 하고 놀림 받았던 기억으로 생각만 떠오르면 싫으니까요. 저는 성당에서 2010년 7월11일에 세례를 받고 나서 곧바로 충청북도에 위치한 꽃동네로 봉사 하러 갔던 저 자신입니다. 저는 처음으로 꽃동네를 찾아 그 곳의 장애인들에게 봉사를 했었습니다. 제가 충청북도 꽃동네로 봉사러 갔을 때는 장애인들이 자기 손으로 밥도 못 먹는 장애인들이 있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애인들에게 밥도 먹여 주고 목욕도 시켜 주고 옷도 입혀 주는 봉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설거지 봉사도 해주었으며 청소기로 거실 청소도 해주었던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꽃동네에서 봉사 활동을 2년을 한다고 약속을 했었기에 2년만 봉사 하고 꽃동네를 나오려고 하니 말 하는 장애인분들이 헤어지기가 아쉬웠는지 저희들에게 좀더 봉사 해주시고 가세요 하고 말해 주던 장애인분들 이었답니다. 저는 꽃동네에서 2년만 봉사 한다고 했기에 장애인분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장애인들에게 나중에 봉사 하러 또 오겠다고 약속을 한 뒤 봉사 마무리를 하고 꽃동네를 나왔습니다. 저는 꽃동네 장애인들과 헤어지니 제 마음이 아파 왔던 저 자신입니다. 꽃동네 장애인들 봉사를 하고 저는 서울로 와서 살고 있습니다. 서울 장애인 시설에서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 가고 있답니다. 지금은 제가 서울 장애인 시설에서 다른 장애인들과 살아 가기에 꽃동네 장애인들과 헤어 질 때 다시 봉사 하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 한번 가서 봉사 해야 겠다고 생각은 들지만 가기가 힘들더라구요. 저는 혼자 생각으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다시 꽃동네로 봉사 활동 하러 갈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서울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 하면서 가까운 성당에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성당은 미사가 월요일에 1번. 화요일에 1번. 수요일에 2번. 목요일에 1번. 금요일에 2번. 토요일에 1번. 일요일 주일 미사가 3번 있는 것 중에 제가 보는 것은 1번 등을 미사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새벽 6시 미사가 있어 성당에 새벽에 나갑니다. 그리고 일요일도 새벽 6시에 미사가 있지만 새벽 미사를 가지 않고 11시 미사로 갑니다. 저는 평일부터 해서 주일 미사를 빠지지도 않고 매일 하러 다닙니다. 제가 빠지지도 않고 매일 성당으로 미사 보러 다니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있다고 생각 되어 성당 미사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레지오 활동 회합을 매주 토요일 마다 성당에서 하기 때문에 성당에서 미사 보는 것과 활동 하는 것을 좋아 합니다. 제가 성당에서 하는 레지오 활동 회합 저희 사랑하올 어머니팀 단원들은 모두 15명입니다. 다른 팀들 보다는 저희 사랑하올 어머니팀이 단원이 더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레지오 활동 회합을 사랑하올 어머니팀과 함께 하면서 프라하의 그리스도왕 아기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프라하의 그리스도왕 아기예수님께 기도를 하면 생각 하고 기도를 하면 얻고자 하는 것을 소원을 들어 주신다고 해서 프라하의 그리스도왕 아기예수 이라고 한 분이 저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저는 한 번은 성모님 덕분에 제 몸 속에 있던 2개의 혹이 없어지고 지금은 프라하의 그리스도왕 아기예수님께 늘 기도를 합니다. 장애인 여러분. 제가 매일 새벽 4시30분에 기상을 해서 제가 할 일을 하고 5시부터 30분 동안 묵주기도 5단을 하는데 세상에 있는 장애인분들 위해 기도를 합니다. 제가 계속 장애인분들 위해 기도를 해드리겠습니다. 장애인 여러분. 장애인 여러분들 각자가 하고 싶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있으시면 해나가세요. 장애인 여러분. 늘 행복 하시며 건강 하세요. 감기 조심 하시고요. 안녕히.
첫댓글 그동안 살면서 맘고생도 심하시고 무엇보다도 학창시절에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래도 세상에 분노하시고 사람을 미워하시며 사시는게 아니라 좋은일 하시고 꿈을 키우고 계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건 쉽지만은 않을텐데 내년에 수술 잘 하시고 그리고 하고싶은 만화 꼭 하시길 빌어드릴게요
앞으로 좋은일들만 가득 일어나길 빌며 원하시는거 모두 이루시고 행복하게 사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ㅎ 화이팅! 응원합니다~
감사 합니다.
글 조금 다듬어 서 (사) 한국 장애인 유권자 연맹 주관 전국 글짓기 행사에 응모 해도 되겟네요 도전 해보시죠
전국 글짓기까지는 안 됩니다. 감사 합니다.
사랑님 힘내세요
네. 감사 합니다.
묵주기도5단씩 매일 받쳐줘서 고맙습니다~
저도 사랑님님의 건강과 내년수술 잘 받을수있게 기도 많이 드리겠습니다~
묵주기도도 시간날때마다 받칠께요
네. 감사 합니다.
정말 글 보니 마음이 와 닿네요 사랑님도 힘내시고 앞으로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네.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얼굴도 모르는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주셔서........
안녕 하세요? 저는 사랑님님입니다. 감사 하긴요. 저도 장애인 이기도 하고 카톨릭 천주교 성당 다니는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 가는 다른 장애인들 위해 기도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늘 해복 하시고 건강 하시길 빕니다.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