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라고
오월이라고 오동꽃 벙글어진다
아카시꽃 하얗게 웃는다
새끼 제비들 벌써 빨랫줄 위에까지 날아와 앉는데
모란꽃 뚝뚝 떨어진다
한바탕 흙먼지를 날리며 회오리바람 분 뒤
타다다다, 여우비 쏟아진다
지난 1980년대 이후, 꽃 피고 지는 오월
함부로 노래하지 못했다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찬 역사에 들떠
꽃이나 나무 따위 들여다보지 못했다
오월이라고 눈 들어 숲 바라보니
반갑다고 오동꽃 눈 찡긋한다
어이없다고 아카시꽃 헛기침한다
이제는 꽃이며 나무와도 좀 친해져야겠다
저것들, 이승 밖에서부터 나를 키워준 것들
너무 오래 버려두어 많이 서럽겠다.
뻐꾸기 울음
진제마을 솔숲 속 무슨 슬픔 귀양 와 사나
무덤들 사이, 바위들 사이
이 마을 솔숲 속 무슨 아픔 쫓겨 와 사나
달빛 부풀어 아까시꽃 지는데
이슬 잦아져 오동꽃 지는데
진제마을 솔숲 속 무슨 절망 머리 풀고 우나
사람들 사이, 짐승들 사이
이 마을 솔숲 속 무슨 설움 쪼아대며 우나.
낮달
낮달은 한 무더기 찔레꽃이다
나비 떼 뽀얗게 날아올라
초여름 햇살, 꽃잎 꽃잎 떨어져 내린다
가던 길 멈추고 잠시 쉬어보는 숲길
찔레 순 꺾어 먹다 보면
저무는 어스름 저녁볕
삼베빛 솜병아리로 짹짹거린다
해지기 전 서녘 하늘가
밀가루 반죽처럼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낮달
어디선가 국수 삶는 냄새가 난다
걸음걸음 탱자빛 노을이 흔들리고
새뽀얀 나비 떼가 흔들리고
숲길 깨우는 북소리, 둥둥둥 구수하게 익는다.
여름비
엷은 안개 더미를 옆구리에 끼고 내리는 비
아픈 제 가슴을 칼로 저미며 내리는 비
버들가지를 흔들고, 망초 꽃대궁을 흔들고
찢겨진 하늘을 담은 저수지 위로 내리는 비
눅눅한 땅, 더욱 눅눅하게 적시는 저 여름비 속에는 무엇이 사나 해와 달이
가도 가지 않는 슬픔이 사나 설움이 사나 우울이 사나
쑥대궁을 흔들고, 신우댓잎을 흔들로
머리칼을 어지럽게 풀어 헤친 채 내리는 비
입 꽉 다물고 땅바닥만 쳐다보며 내리는 비
느릿느릿 한세상 죄 적시며 내리는 여름비.
담쟁이넝쿨
담쟁이넝쿨을 보면 겁난다
손만 닿으면
꾸역꾸역 기어오르는
사람의 역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담쟁이넝쿨처럼
갈퀴손이 달려 있는
사람의 문명
아무리 높은 담도
갈퀴손만 닿으면
사람의 오늘은 길을 만든다
급기야는 달나라에까지
은하 철도를 놓는
사람의 내일······
담쟁이넝쿨을 보면 무섭다.
봄밤
봄밤이네요 삼월도 한창
청매화 피어오르는데, 송이눈 내리네요
앞이마의 푸르른 정맥 위에
청매화 꽃향기 같은
삼월의 눈송이 맞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걷고 싶네요
낡아빠진 코트 깃 치켜세우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걸음걸음 출렁이며 온몸 실으면 좋겠네요
구례 섬진강 어디 맑은 물결로
부푼 마음 벌써 떠 흐르네요
그런 걸음으로 자꾸만 걷고 싶네요
일찍 핀 청매화 꽃잎들
송이눈으로 흩날리네요 그래요 봄밤이네요.
오류동 빈터
쇠비름이며 물여뀌가 자라고,
강아지풀이며 개망초꽃이 뾰족이 민낯짝 내미는 곳
가끔은 콩나물이며 밥알이며 라면발 따위,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곳
자치기를 하는 아이들, 땅뺏기를 하는 아이들,
히히덕대는 소리, 엉덩이 까불대는 소리
때로는 고등어가 싸요 싸 꽁치도 참꼬막도 있어요 물오징어도 있어요
더벅머리 총각, 트럭을 몰고 와 생선을 팔기도 하는 곳
이제는 없는 곳,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빌딩들,
굶주린 마음 하나로 아등바등 똬리를 트는 곳
눈 감으면 곡마단 트럼펫 소리, 버나 돌리는 소리,
원숭이 달래는 소리, 아늑히 들려오는 곳.
여름, 쌍봉사
먹감나무 넓은 잎들, 두텁고 푸르다
후줄근히 땀에 젖은 마음으로
대나무 평상 위에 걸터앉는다
후끈 달아오르는 여름의 알몸
와락, 달려와 내 목덜미 끌어안는다
숨이 턱, 막힌다
(쌍봉사 대웅전은 봉우리가 하나뿐)
끈적대는 여름의 알몸
지렛대 고여 억지로 밀어내는 사이,
먹감나무 밝은 그늘 아래
수캐 한 마리 축, 늘어진다
한 봉우리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고구마밭에서
외곽 도로 저쪽, 싱싱하게 자라 오르는
고구마 밭에 가볼 작정이다 연초록 치마를 입고
흐드러지게 일어서는 고구마 밭고랑에
진월동 서라아파트 십이 층에서 내려다보면
저 고구마 밭, 스물하나
내 어린 아랫도리를 꽈악, 잡고 놓지 않던
상이 년의 짧은 원피스 같다
아직 가슴 울렁이게 하는
들판 가로질러 내달리다 보면
벼 익는 소리 먼저 발길에 걷어차인다
숨 들이쉴 때마다 벼 익는 냄새
홧홧, 목구멍 막아댄다 언뜻
알싸한 지분 냄새도 함께 밀려온다
상이 년의 짧은 원피스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고구마 밭 좁은 두렁 위에 앉아
피워 무는 담배 연기 속으로
싱긋싱긋 웃어대는 아침의 마음들,
청춘의 기억들 밀려 올라온다
그년 참 화사하던 낯빛이라니
고구마 밭 연초록 이불 위에 앉아 바라다보는
진월동 서라아파트 저쪽 도시의 한복판
너무 아득하다 너무 멀리 온 날이다.
옛집
여우비 한줄금, 꼬리를 감춘 뒤였네
대문을 열자 잡풀 우거진 마당가
반쯤 들려 있는 돌쩌귀
은빛 거미줄에 싸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
온통 물에 젖은 채
사랑채 토광 속에는 묵은 살림들
건넌방 툇마루 위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오랜 세월들
놋주발이며 양재기며 종이 그릇 따위
눅눅히 몸을 비틀며 누워 있었네
이끼 낀 뒤꼍 장독대 위, 깨진 항아리 속에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져
잔뜩 찡그린 채 뭉개져 있거늘
무엇 향해 안부를 물을 것인가
들큼하게 메주가 익던 끝방
나지막한 시렁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네
우물가에는 두충나무 잎사귀들
이제는 아무도 약으로 쓰는 사람이 없어
퀴퀴한 냄새를 끌어안은 채
뭉텅뭉텅 떨어져 썩고 있었네
텅 빈 외양간의 누렁이 따위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네 사람의 훈기가 있어야
탱자나무 울타리도 하얗게 꽃 피우는 것 아닌가
조상님들의 잿빛 얼굴만
집 안 구석구석, 먹구름으로 일고 있었네.
일림산 철쭉
저 붉은 것, 산 정상에 서서
끊임없이 몸 불사르는 것
어쩌지 감히 누가 말리지
짜증을 부리고 고함을 쳐도
한꺼번에 모든 것
다 태워버리는 것
누구도 어쩌지 못하지
화르르 일어서는 것
잉걸덩이로 솟구쳐 오르는 것
내버려둬야지 제 뜻대로
소신공양하도록
끊임없이 핏덩이 토하는 것
빨갛게 익어버리는 것
아무도 어쩌지 못하지
하얀 뼛가루로, 세상
가득 덮을 때까지는
그렇지 저 깊고 넓은 하늘의 뜻
누구도 말리지 못하지.
걸레옷을 입은 구름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자꾸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걸레옷을 입은 구름······
교신이 끊기면 나는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을 부르지 못한다
옛날 구름은 그냥 수증기, 수증기로는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지 못한다
오늘 구름은 고름 덩어리,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제 뱃속 가득 납과 수은과 카드뮴을 감추고 있다
이제 내 숨결은 달에게로 가지 못한다 달의 숨결도 내게로 오지 못한다
달과 숨결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잠의 여신은
숨결을 타고 내려와 내 몸을 감싼다
잠의 여신이 내게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구름이 제 뱃속에 납과 수은과 카드뮴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구름, 제가 무슨 중화학공장 출신이라도 되는가
이처럼 오염된 구름을 두고 바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양손에 비닐장갑을 낀 채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는 한심한 바람이리니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도시의 뒷골목을 어슬렁대고 있는
조폭 똘마니 같은 녀석이라니
구름은 아직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교신이 끊기면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은 내게로 오지 못한다
기름때에 지든 걸레옷을 입은 채
나와 달 사이에 철판 세우고 있는 저 구름을 어쩌지
끝내 바람이 구름의 걸레옷을 벗기지 못하면 누구도 잠들지 못한다
하느님조차도 눈 부릅뜬 채 몇 날 몇 밤을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지 못하면 어떤 영혼도 바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렇게 죽는다.
백양사 숲길
화쟁의 저 백양사 햇살 속을 걷자
하자 이팝나무 꽃잎들
물 많은 오르가즘으로 몸부림치는
찬란한 빛살 속을 걷자
하자 이미 져버린
검붉은 동백 꽃잎들 밟고
솟구쳐 오르는 조팝나무 새하얀 피톨들
사월이 죽고, 오월이 죽고
죽음을 만드는 상여빛 우울을 뚫고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며
벙긋벙긋 웃어대는 유월의 햇살들
오랜 수렁과 늪을 지나
밝음이 어둠을 낳고
어둠이 밝음을 낳는,
능선이 골짜기를 낳고
골짜기가 능선을 낳는,
시간의 불수레 위에 잽싸게 올라타자
저 화쟁의 백양사 햇살 속을 걷자
하자 오직 마음 하나로
솟구쳐 오르는 오르가즘 하나로
하얗게 미쳐버리는
물 많은 찔레꽃 꽃잎 속을 걷자, 하자.
춘양 가는 길
더는 참을 수 없어
오월에는 고인돌도 꽃을 피우지
고인돌이 제 가슴에
남몰래 피워 올리는
연보랏빛 제비꽃 따라
춘양 가는 길
봄볕 너무 밝아
오월에는 꾀꼬리도 꽃을 피우지
꾀꼬리가 산골짜기에
은근히 감춰 피우는
병아리빛 붓꽃 따라
춘양 가는 길
길 위에 서면
꽃들의 보조개 너무 어지러워
가슴 활짝 열고
숨 고르고 다듬어야 하지
문득 이 세상
텅, 비어올지라도
초록 잎새들 아주 환해
이 봄에는 당신의 마음
자꾸만 달뜨지
걸음걸음 고인돌 밟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춘양 가는 길.
구절초 꽃술
구절초 꽃술 속으로 스며들고 싶을 때 있다 한 마리 꿀벌로 놀고 싶을 때 있다
중학교 때 냇둑길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모자 깃에 예쁘게 꽂기도 했던 꽃
구절초 꽃술 속으로 눕고 싶을 때 있다 꽃향기에 취해 깊이 잠들고 싶을 때 있다
구절초 꽃술을 언제나 마음 열어주는 것 아니다 어디서나 옷고름 풀어주는 것 아니다
단단히 여미고 있는 젖가슴, 더욱 단단히 여미고 있는 제석산 산자락, 구절초 꽃술들 보아라
구절초 꽃술 속으로 마냥 뒹굴고 싶을 때 있다 뒹굴며 한세상 잊고 싶을 때 있다
꽃술이 되고, 꽃자루가 되고, 꽃받침이 되어 한바탕 꽃향기로 흩날리고 싶을 때 있다.
실천시선 210
『걸레옷을 입은 구름』
- 지은이 / 이은봉
- 펴낸 곳 / 실천문학사
- 펴낸 때 / 2013년 6월
이 은 봉
- 1953년 충청남도 공주 출생.
- 숭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숭실대학교 문학박사.
- 1984년 《창작과비평》의 공동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
-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름』, 『봄바람 은여우』, 『생활』 등이 있음.
- 질마재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유심작품상 수상.
- 광주대학교 인문사회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 대전문학관장.
[출처] 668. 이은봉 -『걸레옷을 입은 구름』|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