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3월 11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미카 7,14-15.18-20
복 음 :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에비앙 생수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매끈한 피부.
에비앙 천연 광천수를 하루에 1리터씩 추가로 마신 사람 가운데
79%는 피부가 눈부시게 부드럽고 촉촉해져
결과적으로 더 젊어 보이는 효과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이 문구를 보고 나서 에비앙 생수와 우리나라 생수 중에서 무엇을 손에 쥘까요?
과학적 연구 결과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왕이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에비앙 생수를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다른 생수라도 하루에 1리터씩 마시면 에비앙 광고와 똑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은 에비앙 광고를 보고서는 이런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살 때가 많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정말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상대의 방식을 “틀렸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기도방식이 있습니다.
조용히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영화를 보면 쉽게 잠듭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영화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리고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면 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신나게 찬양하는 성령 기도는 조금 힘듭니다.
그렇다고 성령 기도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기도회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조건 갑니다.
다양한 길이 항상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를 이해하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른 길을 갈 뿐인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에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착한 아들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큰아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아들만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이 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버지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관점에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원망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LA에서 미술관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지난번에는 ‘게티 센터 (Getty Center)’ 미술관을 보았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고,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소장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게티 미술관은 석유 사업으로 부자가 된 게티가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룬 부를 예술을 통하여 나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지만
이렇게 자신이 이룬 부를 이웃을 위해서 나눌 수 있다면
부자도 쉽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노턴 사이먼 미술관(Norton Simon Museum)’ 미술관을 보았습니다.
신문에 글을 주시는 부제님과 함께 갔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신 부제님은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보는 만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부제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보니 새롭게 보였습니다.
지하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노턴 사이먼 미술관은 부동산 사업으로 부자가 된 노턴 사이먼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기만 한다면 부자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철부지 아들, 싸가지 없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아들과 철부지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큰아들은 유산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거지꼴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옷도 주고, 반지도 주고, 잔치를 벌여 줍니다.
큰아들은 밭에서 일하다 돌아와서 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큰아들의 불만은 성실하게 일한 자기를 위해서는 잔치를 벌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방탕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 잔치를 벌여 준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의 불만도 이해가 갑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아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달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죄를 지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은 형제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으니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고, 그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했으니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잡혀가는 스승을 위해서 함께 하지 못하였고, 도망을 갔습니다.
정의롭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를 벌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잘못한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죄가 크지만,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머슴으로라도 살겠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아들을 봅니다.
큰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큰아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잣대로 규정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말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러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성공해서가 아니라 실패하고서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하는 데에 있다기보다,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이요,
그를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롭게 탄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사실,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는
그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어이 몰랐겠습니까?
훤히 알면서도,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아니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를 품고 믿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아름다운 장면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그분의 희망을 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바로 당신께서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일 것입니다.
제가 온갖 죄와 허물과 탓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저도,
결코 그분께서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고 믿고 계신 까닭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에서 온다기보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란 상처가 깊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나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 갑니다.
그리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새로운 부르심과 소명에 대한 응답’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와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다인이 큰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쫓겨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음탕한 욕정의 세계에 사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작은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떠난 삶을 살았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릴 것이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절)
아버지에게 의탁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을 넘기는 사람은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교회는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증언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그렇게 상처의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말끔하게 고쳐 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안에서 울리는 다윗의 수금 소리와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춤추는 것을 본다. 그러나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 즉,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꿈을 결정해줘도 될까?
전삼용 요셉 신부
테니스 선수인 세레나 윌리엄스(Serena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23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73회, 더블스 23회 우승을 하였고,
언니 비너스 윌리엄스(Venus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7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49회, 더블스 14회 우승을 하였습니다.
두 자매가 나란히 세계 랭킹 1위와 2위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세레나 윌리엄스는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는 한 집안에서 두 명의 모차르트가 태어난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이 두 위대한 자매를 키워낸 아버지가 리차드 윌리엄스입니다.
리처드는 두 자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스포츠 스타로 만들 꿈을 가졌습니다.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도 되는 걸까요?
심한 인종차별을 겪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던 리처드는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두 딸을 믿고 둘 다 최고의 선수로 키워냈습니다.
이는 인종차별에 막힌 흑인들에게 자신의 딸들이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역 인종차별자라 볼 수 없습니다.
두 자매가 승리를 거듭하며 자신들이 이긴 백인 선수들을 조롱하자 아버지는 엄하게 야단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을 강조하고 두 자매가 경쟁하되 서로 가족임을 잊지 않도록 교육합니다.
두 자매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요?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테니스를 시킨 것에 후회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모든 흑인들에게 희망이 된 두 자매는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꿈을 꾼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인생을 선택하여 살았다면 지금처럼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도 아버지에게 보이는 존경과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을 위해
딸들을 이용하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처럼 힘들게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여기면 더 나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들이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테니스라고 정한 것은 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세 자매를 모두 위대한 체스 그랜드 마스터로 키운
아버지 라슬로 폴가의 예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들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꿈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뤄두고 싶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믿음대로 큰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믿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방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쨌거나 자녀를 인도해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무시하면 자녀는 올바르게 클 수 없습니다.
이는 부모가 잘못된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고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잘못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보다는 표지판 없는 도로가 낫지만,
표지판 없는 도로보다는 제대로 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가 낫습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종교도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어
자녀가 커서 선택하게 하겠다는 부모의 입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믿음은 어쨌거나 자녀의 표지판입니다.
오늘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 대상은 이 비유에 나오는 형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의 회개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모라면 자녀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낮은 자존감으로 살 수밖에 없고 삶도 그 믿음대로 됩니다.
우리들도 돌아온 탕자를 정죄하지 않고 인정하시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인정해주시는 분이시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자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죄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아버지처럼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부모가 자녀의 삶의 방향까지 정해 주어야 하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일찍 시작하면 그만큼 잇 점이 있기에 빨리 정해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한국 남자 스노보드 이채운(17·군포 수리고) 학생이
한국 설상 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선수들의 아버지는 어떨까요?
모두 자신보다 자녀가 더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빨리 캐치하여 자녀를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까지 결정해 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표지판이 잘못된 것보다는 표지판이 있는 것이 낫고
– 이것은 자녀를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
또 남들처럼 똑같이 공부시켜 경쟁시키기보다는
더 명확한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역할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처절한 변화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복음 15장에는 세 편의 비유가 실려 있다.
그것은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두 비유는 루카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께서 세 편의 비유들을 연이어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가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죙니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카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시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 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영적인 차원에로 聽者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 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큰아들의 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① 타락의 단계 :
타락의 과정은 작은아들의 자기 고집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이탈은 放縱을 초래하고, 방종은 곧바로 육신의 욕심,
즉 放蕩과 情欲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는 비천함과 굶주림이다.
② 깨달음의 단계 :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면 이제 회복과 복귀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회복과 복귀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심과 화개이다.
진정한 결심과 회개는 때때로 인간성 자체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각에 그 뿌리를 둔다.(18-19절)
③ 복귀와 화해의 단계 :
이제 복귀가 진행된다. 진정한 복귀는 육과 영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 변화는 처음부터 이탈된 장본인(아버지)에 의한 수용을 필요로 한다.
수용은 변화를 전제로 하여 화해와 화목을 조장하지만,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보여준 인내와 기다림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인상적이다.(20-24절)
④ 제3자의 입장 :
이제 큰아들의 입장이 표명된다.
큰아들이 전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제3자는 아니지만,
타락과 회복의 과정에서 용서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正義를 대변한다.(25-32절)
어제는 우리가 마태오복음의 ’악독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소작인의 악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끝장을 내야 하는 正義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카복음은 정의보다는 慈悲를 강조한다.
루카에게 있어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은 정의라기보다는 자비이다.
즉 심판이기보다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인에 비유된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회개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버지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다.
오늘 비유에서 보듯이 탕자인 작은아들(죄인)과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한
큰아들(의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의 태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작은아들에게는 용서와 기쁨의 태도를, 큰아들에게는 설득과 달램의 태도를 보인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잘못을 응징하려는 태도는 正意를 대변하는 것이며,
흔히 제3자인 우리들의 입장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무릇 죄인인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응징하려 든다는 말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21절)는 점이 變數이다.
사실 이 변수에 관계 없이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는 데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생명에 대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不辭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인과응보, 정당한 심판도 정의도 불사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슷로 탕자의 입장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줄 아는 탕자 또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기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