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9.화. 유낙준모세주교.
“知止止止 지지지지.” 멈출 줄 알면 위태하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라!
“‘이제 이 사람이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되겠구나’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창세3:23).” 인간의 대죄를 두 가지로 본다면 하나는 조급함이고 다른 하나는 게으름입니다. 인간은 조급해서 낙원에서 추방당했고, 게을러서 낙원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1917.10.20. 카프카의 일기에서). 조급함과 나태함은 모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순종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메시아로 오시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조급해지고 메시아의 오심을 지금 깨어 있어야 함을 알지 못하면 나태해집니다. 사순절기에 더욱 가슴 깊이 카프카(체코. 1883-1924)와 함께 들어가 봅니다. 이 사순절기의 순례로 인하여 머지않아 우리가 조급함이 없고 나태함이 없는 성공회 사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로 오셨습니다. 앞일을 맞추는 점쟁이가 아니라 진실을 발언하시는 예언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탄절로 인하여 진실인 진리가 왔기에 우리는 큰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마지막 불꽃으로 온 부활이 아니라 어둠이 묻히고 미래의 최초 섬광의 빛으로 온 것으로 부활을 맞이합니다. 진리가 머지않아 나타난다는 기대는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살게 하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믿음이지 한 개인의 부귀영화가 진리보다 앞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점에서 진리는 공동체와 나누는 삶을 늘 전제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각자 한 개인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여 공동체에서 예수님이 향하신 하느님의 뜻을 모시고 공동체 교회의 삶으로 살고자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곳입니다. 사랑으로부터 정의가 생기는 것이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정의 없는 사랑이 운영되는 세상을 선택하지 사랑없는 정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느덧 교회에 세속이 들어와서 사랑없는 정의가 우세해지고 정의없는 사랑이 보이지 않아서 진리가 숨이 막혀 합니다. 정의가 오래가려면 사랑으로부터 나온 정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이 이에 기반했기에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기는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되었는지를 스스로에게 아프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마태오11:16)?” 자기 말을 듣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 가르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자신의 안전처를 만드는 어린아이들처럼 사는 것에 비기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입니다. 한국사회가 편을 가르는 분열된 사회가 된지 이미 된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미국 또한 편을 가르는데 선수인 트럼프대통령의 씁쓸한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좀 더 민주적인 의사를 세우고자 한 회사나 관공서가 공동체의 이익을 주장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숨기면서 공동체 내에 분열을 야기하면서 한국사회의 전체에게 불길한 기운을 주는 것을 뉴스에서 종종 보곤합니다. 한 편이 되는 편가르기 인생을 선택하는 이유는 삶을 너무 쉽게 살려는데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을 가치로 여기지 아니하고 너무 쉽게 돈을 따르기에 편을 가르는 인생에 너무 쉽게 젖어버립니다. 타인을 위해 조금만 손해를 보면 입에서는 할말 못할말까지 합쳐 쏟아붓는 제 입안에 악마가 붙어 있음을 봅니다. 타인을 위한 삶의 신선함을 주는 가치속에 숨어있는 돈의 욕망이 이제는 숨김없이 드러나 비참한 모습으로 귀결되는 인생을 이 사순절기 한복판에서 봅니다. 자기의 이익에 욕망을 드러낸 제 모습에서 진리가 엉망진창인 우리 사회의 속살을 보는 듯 합니다.
타인보다 제 욕망을 찾아다니는 편을 가르는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예수님의 시간을 누구와 함께 나누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사람들인 세무공무원, 거지, 장애인, 창녀를 환대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은 자신의 시간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나누고 있는가? 같은 교육을 받은 배경을 지닌 사람인가? 같은 지역출신인가? 같은 핏줄끼리인가? 같은 교단의 사람들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같은' 틀을 넘어 '다른' 틀을 지닌 인생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핏줄과 다른 지역과 다른 교단과 다른 교육적 배경을 지닌 사람과 나의 시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과 언제 나의 시간을 공유하는가? 인생초기에는 같은 이들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했다면 이제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나의 시간을 나누는 인생으로 변화되기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어제 한 선배님의 연구실 입구에 적힌 이름을 보았습니다. “止止齊” 지지제라는 이름이었습니다. 止지는 '멈추다, 그치다'는 뜻이고, 齊제는 ‘가지런하다, 갖추다’라는 제입니다. 지지제는 ‘멈추고 멈추어 갖추다’는 뜻이고, ‘멈추고 그치고 가지런하게 하다.’는 뜻으로 보였습니다. 의자에 앉자 선배님이 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知足不辱 지족불욕 知止不殆 지지불태”- 만족함을 알면 수치함이 없고 멈춤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를 짧게 표현하면 “知止止止 지지지지”- 멈출 줄 알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라.- 라는 의미로 자신의 공간을 지지제止止齊 라고 이 집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천안 계광중학교 제 일년 선배이신 제가 존경하는 권순일 형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정확하게 아시고 사셨던 대법관이셨습니다. 멈출 줄을 알면 적합한 때에 일을 하는 삶이 됩니다. 멈출 줄을 모르면 자신을 과도하게 보이는 과시와 과대포장을 하게 됩니다. 실제적인 자신의 삶이기보다는 헛일에 에너지를 쏟아 힘있는 삶이 되질 못하게 됩니다. 아직도 적합한 시간에 적합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사제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일 것입니다. '멈출 줄 알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라.'에서 뒷말은 명령입니다. "멈추라." 그러면 하느님이 주신 힘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메시아가 오시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괴로워하는 랍비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다윗왕이 어제의 만찬에도 오늘의 만찬에도 오지 않은 이유는,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가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1963. Buber).” 변화된 존재로 사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디서나 언제나 힘있게 사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존재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제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피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절제하지 못한 삶에서 절제하는 삶으로 변화하는 사제의 사순절기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사순절기 한복판에서 부활절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기존의 성도들과는 더 깊은 관계로 부활절을 맞이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환대하고 맞이할 것인지를 준비하여 다가오는 부활절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멈출 줄 알면 위태하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라! “知止止止 지지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