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입니다"…사기꾼에 속은 前광주시장, 민사소송 이겼지만
공천지원 기대 4.5억 송금…체포 직전까지 속은줄 몰라
사기꾼, 다른 유력인사에게 추가 사기치려다 범행 적발
法 "4.5억 지급하라" 판결…받은돈 이미 모두 탕진 상태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전·현직 영부인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속아 4억 5000만원을 뜯겼던 윤장현 전 광주시장이 사기꾼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이미 돈을 모두 탕진했던 만큼 실제 돈을 돌려받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지법 민사10단독(김소연 부장판사)은 윤 전 시장이 자신에게 4억 5000만원을 받아 챙긴 김모(54)씨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씨가 윤 전 시장에게 4억 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윤장현 전 광주시장. (사진=연합뉴스)
사기 전과가 있던 김씨는 과거 민주당 선거운동으로 활동하며 유력 인사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냈다. 그는 2017년 12월 당시 현역 시장이지만 여론조사 지지율이 저조해 2018년 지방선거 공천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던 윤 전 시장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김씨는 2017년 12월 21일 윤 전 시장에게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를 사칭해 처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윤 전 시장은 이에 속아 김씨와 4차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윤 전 시장이 속았다고 생각한 김씨는 다음 날 오전 윤 전 시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약 30분간 통화를 했다. 이 통화에서 김씨는 윤 전 시장의 개인사, 정치활동 등에 대해 언급했고, 이를 계기로 윤 전 시장은 더욱 더 김씨에게 놀아나기 시작했다.
자녀 2명을 前대통령 혼외자라며 취업 요청…실제 취업
김씨는 통화에서 당시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자 공천과 관련해 “제가 돈이 필요한데 나중에 돌려주겠으나 5억원을 보내 주세요. 제가 힘이 돼 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친아들과 친딸을 노 전 대통령의 혼외자라고 속인 후, 산하기관 취업을 요구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12월 23일 김씨는 자신의 두 자녀와 함께 광주시청을 방문해 윤 전 시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씨는 자신을 노 전 대통령의 혼외자들의 양모라고 소개했다. 김씨는 문자메시지와 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윤 전 시장에게 앞서 말한 5억원 요구했다.
윤 전 시장은 김씨의 요구를 들어줬다. 돈을 순차적으로 송금하는 것은 물론, 김씨가 ‘대통령 혼외자’라고 속인 김씨 아들을 광주시 산하기관에 계약직 직원으로 채용하게 하고, 김씨 딸은 자신이 평소 친분이 있던 사립학교 측에 부탁해 정교사로 채용하게 해줬다.
윤 전 시장은 김씨에게 건넬 돈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졌다. 그는 12월 26일 은행에서 신용대출 받은 2억원을 김씨 모친의 은행계좌로 송금했다. 김씨는 이후 ‘곳간이 말라간다’며 추가 입금을 요구했고, 윤 전 시장은 12월 29일 지인으로부터 1억원을 빌려 추가로 송금했다.
김씨는 이후에도 “한 개 남은 부분 처리해 달라”며 계속 남은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2018년 1월 5일 “조만간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회동이 있다. 윤 전 시장님 말씀 잘나눠 보려고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윤 전 시장은 당일 은행에서 추가로 1억원을 대출받아 김씨 모친 계좌로 송금했다.
김씨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윤 전 시장에게 ‘공천에 힘을 쓰고 있다’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어제 당 대표에게도 광주 윤 전 시장을 신경 쓰라고 얘기했으니 힘내시고 시정에 임해달라’, ‘꼭! 우리 시장님께서 재임하셔야겠지요. 경쟁후보와 통화해 만류했다’ 등이었다. 여기에 윤 전 시장은 “손 잡아 주시길 원한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김씨는 2018년 1월 25일 ‘조직이 움직여야하는 시점’이라며 윤 전 시장에게 추가로 1억원 송금을 요구했고, 윤 전 시장은 “가능할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은행에서 신용 대출받았다”는 답을 보냈다.
윤 전 시장의 송금이 늦어지자 김씨는 ‘어떻게든 재임 성사시키겠다’는 등의 문자메시지와 함께 송금을 수차례 요구했다. 윤 전 시장은 대출에 시간이 걸린다고 양해를 구한 후 1월 31일 추가로 5000만원을 송금했다.
김씨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광주시장 여론조사 선두였던 후보의 낙마가 대통령의 뜻’이라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윤 전 시장을 안심시켰다. 윤 전 시장은 3월 말 김씨에게 구체적인 출마선언 계획을 알리며 “여사님께 도움을 청한다. 힘이 되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공천 탈락 이후에도 “불출마 기자회견 동의해주시겠죠” 문자
윤 전 시장은 4월 초 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 측으로부터 ‘공천 배제’를 통보받자 김씨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이에 김씨는 “대통령이 신경쓰고 있으니 지켜봅시다”며 윤 전 시장을 안심시켰다.
윤 전 시장은 공천배제 후 불출마 선언을 결심한 후 불출마 선언 전날 밤 “내일 불출마 기자회견을 할까 합니다. 동의해주시겠지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김씨는 윤 전 시장이 불출마 선언을 한 이후에도 “대통령도 봉변을 당했나 봅니다”라며 윤 전 시장을 또다시 농락했다.
윤 전 시장은 지방선거 이후에서야 김씨에게 금원 반환을 요구했다. 이때까지도 김씨가 영부인을 사칭하는 사실을 몰랐다. 윤 전 시장은 ‘생계유지’, ‘은행 융자 압박’, ‘은행부채 어려움’ 등을 언급하며 “여사님의 대책을 청드립니다”라는 간곡한 문자메시지를 같은해 10월까지 수차례 보냈다.
김씨는 이후 다른 정치인에게 자신을 문 대통령의 부인인 김정숙 여사라고 속여 접근했다. 그는 비슷한 수법으로 해당 정치인에게 금품을 뜯어내려다, 전화통화 후 사기를 의심한 한 해당 인사가 경찰에 신고하며 꼬리가 밟혔다. 김씨는 2018년 11월 긴급체포된 후 구속됐다. 검거 당시 김씨는 윤 전 시장으로부터 받은 돈을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검찰은 김씨를 사기·사기미수·업무방해 혐의로 구속기소하는 한편, 윤 전 시장에 대해서도 공직선거법 위반과 업무방해 혐의로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대법원은 2020년 3월 김씨에 대해선 징역 5년 6월, 윤 전 시장에 대해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확정했다.
윤 전 시장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인 지난해 8월 김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김씨는 윤 전 시장의 소제기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직접 소송에 대응했다. 그는 1심 판결 이후 직접 항소했으나 법원은 항소장 각하명령을 내리고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