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한옥마을(1984년 12월 20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됨)
중요민속자료189호
세계문화유산등재(2010년 7월 31일)
관가정(보물 442호)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香檀(향단)보물 제412호
양동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있는데 기와집의 일반적인 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형식으로 주생활의 합리화를 도모한 우수한 공간구성으로 보인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해지는데 6.25전란때 일부는 불타고 현재 56칸이 보존되고 있다.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세운 건물이다.
향단은 경주손씨 대종가인 관가정 대응하여 외손인 여주이씨들의 입지를 높이고자 세운 가옥으로
손씨들이 주도하는 고향마을에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건축적 과시의 성과물이라고 한다.
옥산서원 인근의 독락당과 함께 가장 아름답고 빼어난 건축물이다.
향단
회재 이언적은 본관이 여주이고 호는 회재. 자계옹, 자는 복고, 이름은 적, 시호는 문원공이다.
원래이름은 迪(적)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여주 이씨 찬성공 이광호가 손소의 8남매중 차녀와 결혼하여 태어난 분이 이언적인데
이언적이 손소의 아들 손중돈에게서 글을 배워 1514년(중종9년)문과에 급재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 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어 척신 김안로의 재등용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후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1542년 이조. 형조.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봉양의 이유로 사직하거나 외직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 경상감사에 임명되었다.
인종이 즉위하고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는데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외척 윤원형 일당이 사림을 축출하기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의금부판사를 지냈으나 곧 사임하고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언적은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경주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2)문묘에 배향되었다.
이언적의 학문적 업적은
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여 조선의 성리학이 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理)는 기(氣)의 활동의 근본이 되고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라고 하는 주리론적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가 형성되었고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백당
서백당(중요 민속문화재 23호)
경주 손씨 대종가로 이 마을의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세조 때 지은 집이다.
양민공 아들 손중돈(1463~1529)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서백당이란 참을 忍자를 백번 쓰며 인내심을 기른다는 뜻이다.
양민공 손소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 딸과 결혼하여 자리잡은 곳으로
서백당에서 3명의 현인이 태아날 것으로 예언 했다는데 회재 이언적과 손소의 아들 손중돈이 태어나
앞으로 한명이 더 이름을 떨칠 것으로 손씨들이 믿고 있다.
풍덕류씨의 류복하 사위 손소와 경주손씨의 손소의 사위 여주 이씨 이언적 후손들의 집성촌이므로
양동마을을 외손마을로 불리운다.
경주손씨 서백당 사당
서백당의 수령 600년된 향나무
景山書堂(경산서당)
회재 이언적의 후손 이의윤을 배향할 목적으로 세운 서당인데 안계저수지 안에 이던 것을
저수지를 만들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무첨당(無添堂)
양동마을의 고택가온데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대표적인 건물은 관가정, 서백당, 무첨당이다.
무첨당은 물봉골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여주이씨 종가이다.
무첨당이란 이름은 회재 이언적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의 호에서 따왔는데 無添堂은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집의 구성은 본채, 별채(무첨당), 사당으로 구성되었고 본채는 1508년에 건립되었으며, 별채는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1540년경에 지어졌다.
무첨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왼쪽 방 앞으로 누마루를 돌출시켜 "ㄱ"자 형태를 취했는데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고
남자들이 독서와 휴식 손님접대를 하였던 사랑채로 쓰였다.
정충비각(旌忠閣)
정충비각은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 손중로(1598~1636)와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7년(1783)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보문호 벚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