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엄마는 생각쟁이>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어머니와 같은 세대를 살아오신 모든 어머니들께 사랑과 존경을 바칩니다. 엄마 예찬 최근에 나온 영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다가 한 장면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왔다. 여자 배우 케이트 윈슬렛의 아름다운 금발과 벗은 옆모습이 비춰지는데 어릴 때 방에 누우면 눈에 들어왔던 액자 사진이 생각났다. 너무 오래된 일이다. 작은 한옥 방문 위에 걸려 있었던 흑백사진. 엄마는 50년대 초반 라이프잡지에 나왔던 사진을 오려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놓았는데 국제사진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탄 것이라 했다. 나무 등걸을 잡고 서 있는 두 여인은 옷을 다 벗은 채 물가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신비롭고 아름다워 그리이스 여신 조각 같기도 하고 선녀 같기도 하고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가족들 사진을 모자이크처럼 더덕더덕 붙여 하나의 액자에 넣어 놓는 것이 유행이었지 여인의 나체 사진을 방에 걸어 놓은 집은 없었던 것 같다. 다리를 자연스럽게 구부려 중요한 부분은 가리고 있었지만 그 나체는 너무 아름다웠다. 엄마는 그걸 왜 안방에 걸어 놓으셨을까, 나중에는 누렇게 바래고 액자도 낡아 부서져 집수리를 하면서 어느 순간 치워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 사진은 꽤 오랫동안 우리 방에 걸려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를 줄줄이 낳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하루 세끼 뜨신 밥을 차려야 했던 엄마에게 방에 걸린 여인의 나체 사진은 파격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림과 사진이 넘쳐 나던 때가 아니었으니 척박했던 시절 사진 한 장이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고 신선한 위안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린 나에게는 벽에 붙은 사진 한 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었던 것 같다. 또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우리 집은 다른 집과는 특별하고 다르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온돌방에는 낮에도 이불이 깔려 있었고 늘 식구들은 아랫목 이불 밑에 발을 집어 넣고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방 풍경인데 지금 생각하면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다. 그러나 그 느낌이 너무 선명하여 그 이불의 감촉이나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나던 냄새까지도 떠올라오듯이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때 엄마는 글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항상 책이 곁에 있었고 무릎에는 스웨터를 짜던 뜨개질 바늘과 털실이 있었다. 그 시절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엄마가 만들어준 평화였다. 나는 어릴 적 환경이었던 평화로운 아름다움이 내 평생을 지속하는 따뜻하고 행복한 정서로 배어 있는 것에 항상 감사한다. 어머니가 글을 쓰시기 시작한 지 40년이 되어간다. 70대의 후반을 보내고 있는 엄마는 지금도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분리하는 살림을 계속하고 있다. 가족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에 손을 놓지 않고 지속하고 있다. 거의 매일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는 일 우편물과 택배소포를 받아 뜯어 정리하는 일 그리고 원고청탁을 받거나 거부하는 일, 마당의 꽃밭을 가꾸는 일, 그리고 음악회나 전시회 영화를 보는 것 신간서적이나 문학잡지를 보는 엄마의 시간은 전문작가로서의 소임과 보통 여자로소의 생활이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히 짜여 있다. 내가 엄마를 존경하는 것은 주어진 일정을 해내는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 빡빡하거나 유난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몸 움직임은 조용하고 작지만 빠르다. 손힘은 강하고 야무져서 항상 결과물은 놀랍도록 알차고 완벽하다. 나이가 들어가시면서 일의 양을 조절하고 몸의 상태와 의논하면서 지내는 현명한 지혜는 본받고 싶은 덕목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않으셔서 정신적인 젊음을 유지하신다. 힘겨워하시면서도 쏟아져 나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신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적당한 노동을 피하지 않으신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걷고 아직도 혼자 다니실 때는 지하철이나 대중 교통을 이용하시면서 세상 사람들과의 부딪침을 피하지 않는다. 엄마는 폐지를 주워가는 할머니 우체부 아저씨 야채 파는 아줌마, 정원사나 집을 고쳐주는 아저씨들과 친밀함을 유지하신다. 그건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그들에 대한 감사와 존중심이기에 언제나 서로 진심이 전해진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에서 작품의 소재가 끊임없이 나오고 또한 다양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의 작품은 엄마의 어린 시절과 우리 가족의 체험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같이 거의 자전적인 작품을 좋아한다. 엄마의 작품에는 우리 가족의 역사가 들어 있다. 그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쓰실 당시 우리 가족의 모습이 들어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쓰신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가끔 꺼내본다.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해산바가지>를 꺼내 본다.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엄마한테 간다. 엄마가 나를 필요로 해서 미리 약속을 해 놓을 때도 있지만 내가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 갈 때도 있다. 요즘 같으면 엄마가 좋아하는 달래무침이나 오이소박이를 좀 넉넉히 해서 덜어 갖다드리는 것 정도이다. 세제나 휴지 같은 무게 나가는 생필품을 사다드리는 것 시장을 같이 보는 것 책을 정리해 드리는 것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정도지만 나머지는 어머니 스스로 해결하신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엄마가 못하는 건 자동차 운전 정도다. 봄이면 꽃시장에서 수선화나 튜립 뿌리와 꽃모종을 사다 차에 실어 나르는 것은 엄마와 내가 의견의 충돌 없이 무조건 좋아하는 일이다. 내 차에 엄마를 모시고 외출할 때는 마음이 으쓱해지고 흐뭇해진다. 엄마에 대한 예찬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녀가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어느 순간 엄마의 세계에 내가 함몰되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딸로서 엄마를 사랑하고 작가로서 존경하지만 내 생활에서 엄마의 비중이 커질수록 나 자신에 대한 욕망이 솟아올랐다. 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눌려 있다는 걸 발견했다. 숙제를 채 마치지 못한 아이처럼 안절부절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주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큰 산을 그저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나의 작은 언덕을 일구기 시작했다. 엄마처럼 완벽하고 쫀쫀하지는 않지만 내 문체를 갖게 되었다. 허술하고 부족하지만 내 세계를 가졌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아직 엄마의 집중력을 감히 따라갈 수 없지만 새로 시작하는 나의 자유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스럽다. 칭찬의 말을 아끼시는 엄마도 처음 낸 내 책을 보시고 반듯한 글이라고 칭찬을 해 주셨다. 나는 안다. 엄마 마음에 꽉 차지 않는다는 걸. 그러나 엄마라는 큰 나무 그늘 아래서 딸이 하는 수고를 고맙게 생각하신다는 것도 안다. 우리 형제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좋은 유전자를 받았어. 그 좋은 유전자는 명석한 아이큐라기보다는 밝고 명랑한 심성이다. 우리 가족에게 정말 어렵고 슬플 때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어둡고 슬픈 얼굴을 하지 못하고 밝은 마음을 갖고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생의 기쁨을 느끼는 유전자. 나는 우리 가족이 그런 유전자를 지닌 것에 항상 감사한다. 엄마가 밝게 웃으시면 사랑이 우러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한다. 아무리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딸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2007년 개교기념일에 삼자매 표창을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박양실회장님이 수여하십니다.(사진은 경운회 갤러리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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