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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 편지를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마술사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 서울대 이태진교수, 日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 사본 입수 꼭 90년 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종(高宗) 황제의 죽음이 일본측의 지시에 의한 독살(毒殺)이었다는 정보를 기록한 당시 일본 고위 관료의 문서가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 문서는 1919년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의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1853~1948)가 쓴 일기로, ▲고종 독살의 배후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있었으며 ▲독살의 이유는 고종이 독립운동에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궁내성 내의 정보를 기록했다.
고종 독살의 개연성을 언급한 국내 자료는 많았지만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개입했다는 구체적 정황과 실명을 기록한 일본측의 문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內正毅 일본 총리) 1852. 7. 12 일본 나가토 구니[長門國] 야마구치[山口]~1919. 11. 7 오이소[大磯].일본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중에 총리를 지냈다(1916~18). 조슈 한[長州藩]의 가신(家臣)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다다 주사부로였으나 데라우치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12세에 입대하여 근대 일본군의 창설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심복이 되었다. 1902년 제1차 가쓰라[桂] 내각의 육군대신이 되었으며 이후 10년 동안 유임하였다. 1910년 5월 조선합방(朝鮮合邦)을 완결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조선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지배를 신속하게 마무리짓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1910년 8월 22일에 합방조약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1916년 10월 야마가타의 강력한 지원으로 새 내각의 총리가 되었다. 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던 당시에 비정치인을 총리로 임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데라우치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초연내각(超然內閣)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강경노선을 취하여 중국의 친일군벌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전쟁 기간에 연합군을 돕는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협약들은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에서 비준되었다. 러시아 혁명 후 그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을 주장했는데, 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대한 관리권을 확보하고 만주지역에서 일본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8년 도쿄에서 쌀소동이 일어나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그의 내각은 총사퇴했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일본 조선총독) 1850~1924. 제2대 조선총독. 재임중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오사카 병학료[大阪兵學寮]를 거쳐 1871년 육군 대위에 임관되었다. 1877년 구 무사계급이 일으킨 반란인 세이난[西南] 전쟁 때 중좌로 참여해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86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12여단장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때는 제2군 소속으로 뤼순[旅順]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며, 1896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3사단장·근위사단장 등을 지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제1군 소속으로 전공을 올려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10월 조선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에는 임시 통감대리(統監代理)를 겸임했다. 1912년 참모총장이 되었고, 1914년 원수(元帥)로 승진했으며,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뒤를 이어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재임중 조선임야조사령(朝鮮林野調査令)·조선식산은행령(朝鮮殖産銀行令)·조선지세령(朝鮮地稅令) 등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이를 억눌렀다
▲ 하세가와 요세미치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의 해당 부분 사본을 입수하고 이 사실을 27일 본지에 공개했다.
이 교수는 일본 교토(京都)대 나가이 가즈(永井和) 교수의 홈페이지를 통해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됐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오는 4월 23일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말을 듣지 않아… 은폐하려 죽였다" 구라토미는 다이쇼(大正) 8년(1919) 10월 26일의 일기에서 도쿄(東京) 오오이마치(大井町)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 히로구니(博邦)의 집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기차에서 송병준(宋秉畯)을 만났다고 적었다.
※ 송병준 (宋秉畯 일제강점기 친일파) 1858 함남 장진~1925. 친일파·민족반역자.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했으며, 일진회(一進會)를 이끌며 고종의 퇴위와 한일합병을 적극 추진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제암(濟庵). 송시열의 9세손이라고 하지만 신분이 낮은 속리(屬吏)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8세 때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의 기생집에서 조방(助幇) 노릇을 하다가 당시 세도가인 민영환의 식객이 되고 그의 천거로 관계에 진출했다. 1871년(고종 8)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훈련원판관·오위도총부도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876년 1월 강화도조약 때 접견사(接見使)의 수행원으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陸] 일행을 접대했다. 이것을 인연으로 일본인 거물 군납업자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를 알게 되어, 그와 함께 부산에 상관(商館)을 차렸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을 서양 오랑캐와 동류로 보면서 그들의 물화(物貨)를 막아야 한다는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때라서 부산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상관이 불탔다. 1882년 임오군란 때도 친일파로 지목되어 집이 불탔으며, 자신은 남대문 밖 농가의 쌀뒤주 속에서 숨어 살았다. 갑신정변 때도 집과 세간이 불타버리고 간신히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다.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중이던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갔다가 그의 인품에 공명하여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의 통모 혐의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한 뒤 민비의 총애를 입어 흥해군수·양지현감을 거쳐 1891년에는 장위영영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조정에서 요주의인물로 인식되어 1895년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노다[野田平次郞]라고 이름을 바꾸고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야의 명사를 사귀는 한편, 양잠과 염직기술을 연구하여 야마구치 현[山口縣]에 양잠강습소를 세웠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소장 오다니[大谷喜久藏]을 따라 귀국했다. 경성군사령부에 있으면서 부업으로 주보(酒保)를 경영해 부를 쌓았다. 그는 일본군과 함께 청나라까지 갔다가 그해 4월 서울로 돌아와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8월에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곧 그 이름을 일진회로 바꾸었으며,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가진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를 통합했다. 일진회는 일본군의 북진을 돕기 위해 함경도지방 군수물자의 수송과 함경도에서 간도에 이르는 일대의 러시아군 동태정찰, 일본의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에 대한 노역제공 등을 했다. 그는 이용구와 우치다 로헤이[內田良平], 다케다[武田節之] 같은 낭인(浪人)들과 연계해 한일합병을 추진하면서 이용구에게 박제순(朴齊淳) 내각의 반일행위에 대한 탄핵서를 제출하게 했다. 또한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10여 일 전에 이용구와 함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제창하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다. 1907년 6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뒤 당시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퇴위시켰다. 1909년 2월 내부대신에서 물러나 일진회의 총재가 되었다. 그뒤 다시 일본에 가서 이른바 한일연방안(韓日聯邦案)을 유세하고 다니면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조선을 1억 엔에 팔겠다는 등의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합병여론을 일으키자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합방성명서〉를 비롯하여 〈상주문 上奏文〉·〈상통감서 上統監書〉·〈상내각서 上內閣書〉 등을 발표했다. 합병 후에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그뒤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지냈고, 1920년 백작이 되었다. 또한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과 경기도 참사, 산업조사위원 등을 지냈다. 1921년 4월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로부터 〈조선일보〉의 판권을 인수했다. 1925년 뇌일혈로 죽었는데, 친일 산업거두 한상룡(韓相龍)이 주최한 연회에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일본왕으로부터 정삼위훈일등욱일동수장(正三位勳一等旭日桐綬章)이 추서되었다.
▲ 대표적 친일 매국노 송병준
송병준은 '민병석(閔丙奭)과 윤덕영(尹德榮)의 (작위) 사직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분노하고 있다'고 구라토미에게 말했다.
송병준·민병석·윤덕영은 모두 한일강제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였다. 4일 뒤인 30일, 구라토미는 궁내성의 한 부서인 종질료(宗秩寮)에 갔다.
종질료란 황족과 왕족, 작위, 조선 귀족 등에 대한 일들을 다루는 곳으로 조선의 종친부와 비슷한 관청이었다.
그는 종질료의 고위 관료 센고쿠 마사유키(仙石政敬)를 만나 민병석·윤덕영의 사직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 "데라우치·하세가와 총독이 독살 배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 나서자 제거" 고종황제 죽음과 관련 구체적 정보 기록 "(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意)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 구라토미는 "데라우치가 얘기했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는 "당신은 이를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초대 조선총독(1910~1916)이자 일본 총리대신(1916~1918)을 지낸 데라우치와 고종 승하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독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언급된 것이다. ◆"고종, 파리 회의에 독립 청원 시도" 독살 건에 대한 구라토미의 문의는 집요했다.
10월 30일 센고쿠로부터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11월 1일 다시 종질료 관리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를 만나 "조선에서는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얘기하게 한 것이 있었는데 태왕이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입을 막는 수단으로서 태왕을 독살한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독살을 지시한 것이 데라우치였음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시하라는 이에 대해 "그런 풍설이 있다고 한다"며 정보를 알고 있음을 시인했다. 이틀 뒤인 3일 구라토미는 종질료의 다른 관리인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에게 또다시 고종 독살건에 대해 질문했다.
다나카는 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민병석·윤덕영·송병준 등이 태왕으로 하여금 서명 날인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독립이 될 듯하면 민 등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 ◆"독살 진상 실토한 사람은 송병준" 이태진 교수는 "구라토미는 고종 독살의 정보를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민병석·윤덕영의 사직'이야기가 일기에서 처음 등장한 곳이 송병준을 만난 부분이며 다른 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라토미 등은 이 정보를 '풍문'이나 '풍설'인 것으로 언급하지만, 이것은 '뜬소문'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정보로 봐야 한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전한 사실은 일본 국가 최고 수뇌부의 인물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근거없이 쉽게 거론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시자인 데라우치와 전달자인 하세가와, 하수인 역할을 한 민병석·윤덕영과 이들의 전달자인 송병준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라토미가 궁내성의 상급자로서 종질료 관리들에게 거듭 이 문제를 캐물었고, 복수의 관원들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얻은 것도 이것이 '풍문' 수준을 뛰어넘는 정보였음을 시사한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일본인들은 상당히 근거 있는 정보라 해도 자신에게 책임이 올 것을 우려해,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려고 우회적으로 '풍문이 있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송병준은 왜 구라토미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전했던 것일까?
법제국 장관(1913~1916)을 지낸 구라토미는 궁내대신 하타노 다카나오(波多野敬直)와 가까운 정계의 실력자였다.
송병준은 작위를 잃게 된 민·윤 두 사람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그에게 독살의 진상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태진 교수는 말했다.
구라토미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데라우치 등 당시 총리들의 노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독살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 민족자결주의 후폭풍 우려"
▲ 고종 독살의 구체적 정보를 언급한‘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의 1919년 10월 30일 부분. /이태진 교수 제공
만약 구라토미가 기록한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면, 일본은 왜 한국을 병합한 지 9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고종을 독살한 것일까?
이태진 교수는 기록에 등장한 '고종이 파리 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려 했다'는 부분을 주목한다. 고종 승하 직전에 열리기 시작한 파리 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국제회의로, 1917년부터 제창된 우드로 윌슨(Wilson)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대책을 세우던 중, 고종 황제가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것을 알고 협박 끝에 독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권 침탈의 두 주역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의 주역으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데라우치는 1919년 4월 12일 민족자결주의를 걱정하면서 3·1 운동에 대한 상세한 대책을 설파한 서신을 하세가와에게 보내기도 했다. ◆"시신의 팔다리가 붓고 혀가 닳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직후 전국에 번졌던 '독살설'은 3·1 운동 발발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고, 이를 믿은 국민들은 황제의 장례(3월 3일)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韓昌洙)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으며, 일각에선 자살설도 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선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아 '3·1 운동 당시의 소문' 정도로 치부돼 왔다. 고종 독살에 대한 당시 국내 기록으로는 윤치호(尹致昊)의 일기가 구체적인데, 이것은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閔泳達)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韓鎭昌)에게 한 말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윤치호는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고 적었다. 고종의 독살이 '해외 망명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운동가 선우훈(鮮于燻)은 광복 이후에 쓴 '사외비사(史外秘史)'에서 이지용(李址鎔)의 증언을 전했다.
고종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던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눠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장소가 그려진 보물지도를 신하에게 맡기고 탈출하기 직전에 정보가 샌 탓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상학과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내용이다.[유석재 기자] |
첫댓글 가까운 역사부터 멀리 근원적인 역사까지 우리 민족이 너무 많이 시련을 당하면서도 지금 세계적인 위치에서 다시금 역사를 되돌리는 활동을 미약하나마 진행이 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 좀더 구체적인 진실과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모든 양심있는 학자와 동참하시는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민족 반역자들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대를 이어 현세에 남아 기존의 수구적인 권력과 지위를 자신들의 과거를 포장하기위한 집요한 활동을 우리는 실존적인 자료로서 반증하고 방어하여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운상태로 세계로 나가야 할것입니다. 이오님 늘 감사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늘 중국연속극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중국 t.v 에는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항일투쟁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너무나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는 극일,항일의 자세가 아닌가요?!.. 뉴라이트 연합, 뭐 이런 친일세력들이 설치고 강단사학자, 정치 지도자들 중에도 매국노 후손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한탄할 따름입니다.
방송과 언론이 어느 나라든지 완벽하진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 지나간 사건을 보고 그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왜곡되고 조작된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렇게 떠들고 외치다 숨져간 영혼의 외침이 지금의 나를 작고 보잘것 없이 만들었읍니다. 엄청난 권력을 등에 지고 강성정보를 조작하고 시류에 영합하며 살고 있는 그이들이 진정 역사속에 어찌 기록될것인가를 기다리기 전에 , 아픔이 다시 발생하고 슬픔을 기록하기 전에. 우리는 지난시절 슬픈 영혼의 외침과 같은 일을 다시 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은 분명 조금씩 바뀌고 있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것은 이처럼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아! 참으로 비통한 우리나라 근세 역사의 한자락입니다.
일본 놈들이야 그렇다쳐도 그들에게 충성한 매국노들 행태에 소름이 납니다.
그 후손들이 호의호식하며 산다는 소식 들릴 때 마다 이 녀석 피가 꺼꾸로 흐른는 듯한 감정에 미치도록
정말로 죽겠습니다. 늦었지만, 양식(良識)있는 후손이라면 국가와 민족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실천으로 보였으면 합니다.
둥글게님 감사합니다.. 무엇인가를 하여야 할 때입니다.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역사청산이 이루어 져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