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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클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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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준) 스크랩 크리스마스를 맞아 김대건 신부와 존 로스 목사에 감사한다
TayZa 이재운1045 추천 0 조회 96 17.12.25 1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막연히 존경하거나 섬기지 않는 걸 기본 덕목으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붓다의 지혜인 반야를 오래도록 탐구해오면서도 나는 안과 밖의 경계없이 두루 지혜를 찾아다녔다. 그 중 하나가 내 기본 직업인 소설과 관련된 것(우리가 한글을 쓰게 만든 존 로스 목사)이고, 또 하나는 내가 1989년부터 깃들어 사는 내 공간 용인에 관련된 것(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이다.


용인에서 태어나 용인 물을 마시고, 용인 공기를 마시고, 용인 산천에서 난 음식을 먹고 자란 토박이들이 방치한 귀한 것들을 알고난 뒤 나는 그들을 위해 내 지혜를 써서 그 가치를 드러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런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처인성, 고려백자, 조광조, 할미산성, 보정동 유적 등이다. 


이 중 처인성 관련해서는 1998년에 발표한 <천년영웅 칭기즈칸(전8권)>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이 자그마한 고을 처인현에서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군사령관 살리타이를 저격 사살한 사건은 당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을 능가할만큼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용인 출신 어설픈 사람들이 무슨 대첩이니 승첩이니 하는 진실 건너편의 주장을 지나치게 폄으로써 아직도 처인성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해 안타깝다. 그 리더가 아마 스님 '김윤후'라서 이를 꺼려하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다고 들었다.(한편으로 처인성 행사 때마다 불교식 잔치를 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 몽골 사령관 살리타리를 죽인 것은 불교가 아니라 고려인 김윤후라는 사실을 잊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 사건에 종교를 갖다 들이대는 어리석음이 통탄스럽지만 그 집안의 배타성이야 어쩔 수 없고, 나는 오직 역사의 진실 차원에서 처인성의 위대한 가치가 빛나기를 바라고 있다. 마침 처인성 유적에 대한 연구 개발 등 국가 지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니 참 반갑다.


그 다음 고려백자는,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좌충우돌해가며 어떡하든 알려보려고 애쓰다가 내 손에 이르러, 내가 직접 비용과 노력을 들여 고려백자 도편을 구해 평생 도자기만을 구워온 마순관 명장, 한도현 작가, 차현호 작가 등과 함께, 현물로 남아 있지 않은 당시 도자기 원형을 복원하고<고려백자를 굽다>, 또 일부 발굴된 소수의 작품을 재현하는 일을 해냈다. 그런 중에 문화재청에서 발굴과 요지 정비 등으로 거액을 보내주어 이쪽도 곧 서광이 비쳐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나 남은 것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다. 우리 역사 중 가장 암울한 시기였을 19세기, 노론 악귀들이 설치고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던 그 당시, 죽지 못해 사는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한 용인 출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대한 공부를 확실히 하는 것이 내가 쥐고 있는, 나를 살리고, 내 딸을 길러준 우리 땅 용인에 대한 마지막 빚이라고 여긴다.(난 1989년에 용인에 내려왔고, 이후 내 출세작 대부분이 원삼면 용수마을에서 쓰여졌다. 그곳에서 쓴 책들만 해도 약 1000만부가 팔렸다)


그래서 우리 용인고려백자연구소 소속 작가들은 몇년 전부터 용인 천주교인들이 숨어서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필사하여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또 생업 삼아 만들던 옹기터를 줄기차게 답사해왔다. 묵리, 고초골, 운학동 등 지금의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에 이르는 문수산 동서 골짝마다 옹기터가 무수했다. 이 옹기터마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질을 구해 흙을 빗고, 이 옹기에 필사 성경을 넣어 지게에 진 다음 이 고을 저 고을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려 애썼던 것이다.


난 2004년에 안성시 요청으로 안성의 역사인물 <바우덕이>를 소설로 쓰면서, 김대건 이야기를 매우 중요한 삽화로 썼다. 이때부터 김대건 연구를 시작하여 그가 비록 당진 솔뫼마을에서 났지만 태어나자마자 불어닥친 천주교 박해로 아버지, 할아버지 등 온 가족을 잃고 서울을 거쳐 용인 묵리 한덕골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덕골에 찾아가 김대건 안드레아, 스물다섯 살 꽃 다운 나이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선택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느냐고. 그렇게 김대건 공부를 했다.

이 스물다섯 살의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조선 조정에서 "배교만 하면 중히 쓰겠다."는 제안을 받고도 기꺼이 참형을 선택했다. 

김대건이 우리 땅 용인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배론 성지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 김대건을 그리워하다>에 자세히 적었다.


그런 중에 나는 고초골 사람 이민식(용인 천주교인들은 이 아름다운 이름을 잊지 마시라)이, 김대건 신부가 참형 받아 그 사지를 끊어 묻은 새남터 모래사장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그 시신을 지고 용인으로 내려와, 자신의 산기슭(지금의 미리내 성지는 용인 고초골에 살던 이민식의 소유지다)에 암장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리내 자체도 용인의 문수산 기슭이었던 것이다. 현대 행정구역으로 그곳이 비록 안성시에 속하기는 하나 크게 보면 묵리 성지, 은이골 성지, 고초골 성지 등을 두루 있는 용인 천주교 발상지 범주였던 것이다.(난 미리내 성지만 개발하고 용인 쪽 이 많은 성지를 방치한 수원교구를 좋지 않게 보고 있다. 그래서 교황께 편지를 보내려 하고 있다)


은이마을 - 사암리 - 운학리 - 고초골 - 묵리 - 미리내

(공소)      (옹기터) (옹기터)  (옹기터)  (살던곳) (묻힌 곳)


그뒤 용인 후배들이 김대건 안드레아의 시신을 수습한 이민식이 누군지 알아내고, 그 후손들이 살아 있으며, 관련 유물과 증언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슬픔이 강물처럼 흐르던 조선 후기에 하느님의 복음으로 백성들을 살리려 하던 그 정신을 높이 산다. 이는 전세계 천주교 역사상 결코 밀리지 않는 위대한 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래에 김대건 신부 시신을 수습해준 당시 고초골 사람들의 얼이 서린 공소 사진을 올린다.

이민식을 비롯한 고초골 천주교인들이 깜깜한 밤 한강 절두산 앞 모래사장을 뒤져 김대건 신부의 머리를 캐내고, 다리를 캐내고, 팔을 캐내어, 눈물과 땀으로 씻어 지게에 지고, 순라꾼에게 들킬세라 밤길을 재촉해 용인까지 모셔온 그 정성을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마침 이민식 등이 다니던 고초골 공소가 이 달부터 어엿한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용인시 등록문화재라면, 대표적으로 삼성전자 64 DRAM이 있다. 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을 세계 최강의 IT 국가로 일으켜준 반도체 산업이 대한민국 용인시 기흥에서 시작되었듯 9세기의 반도체인 한반도 최초의 '고려백자'도 용인시 처인구 서리에서 시작되었고, 대몽골의 몰락도 용인시 처인성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시대 개혁 사상도 용인시 수지에서 일어났으며, 천주교는 용인시 처인구 일대에서 솟구쳐 올랐다.


한편 내가 소설가로서, 내 종교가 아닌 기독교인에 주목하는 분이 한 분 있는데 그는 바로 존 로스라는 스코틀랜드 목사다. 그는 세종 이도가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썩어빠진 유림, 특히 노론 수구세력에게 짓밟히던 한글을 발굴해 최초로 한글성경을 만든 이다. 한글은 그렇게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한문으로 글을 쓰고 있었을지 모른다.

존 로스에 관해서는 <한국교회가 저지른 과오, 그래도 복덕이 아직 남았다>에 적어 놓았다. 존 로스와 김대건은 내가 아직도 더 탐구해야 할 중요한 역사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마스를 맞은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존 로스 목수 두 분을 추모하며, 가슴 깊이 나의 감동과 진심을 전하고자 한다.


*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최후를 지킨 고초골 사람들의 성스러운 집 공소

- 나는 임기 끝나기 무섭게 교도소로 직행하는 전직 용인시장들에게서 어떠한 문화 인식이나 정신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현직 정찬민 시장은 용인고려백자, 처인성, 김대건 신부, 조선 중기 개혁가 조광조, 할미 산성 등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이 점에 늘 감사한다. 인구만 백만, 문화적으로는 아직 벌거벗은 용인시에 아름답고 가치 있는 문화의 옷을 입혀주기 바란다.

* 아래 공소 사진 중 앞에 나오는 석 점은 용인시 보도자료에 첨부된 것이고, 뒤에 이어지는 사진들은 내가 따로 구한 자료다. 아마 고초골 공소 사진 중 최상의 자료가 될 것이다. 두루 쓰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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