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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비람 신서 5
김인환 저자(글)
서연비람 · 2024년 11월 29일
이 책의 총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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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바람 신서1)
작가정보
저자(글) 김인환
1946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197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문학평론 「박두진론」 당선.
저서 『문학과 문학 사상』(열화당, 1978), 『문학교육론』(평민서당, 1979), 『상상력과 원근법』(문학과지성사, 1993), 『비평의 원리』(나남, 1994), 『동학의 이해』(고려대출판부, 1994), 『기억의 계단』(민음사, 2001), 『다른 미래를 위하여』(문학과지성사, 2003), 『한국고대시가론』(고려대출판부, 2007), 『의미의 위기』(문학동네, 2007), 『언어학과 문학』(작가, 2010), 『현대시란 무엇인가』(현대문학, 2011), 『The Grammar of Fictio n』(Nanam, 2011), 『고려 한시 삼백 수』(문학과지성사, 2014), 『과학과 문학』(수류산방, 2018), 『타인의 자유』(난다, 2020), 『새 한국문학사』(세창출판사, 2022), 『근대의 초상』(난다, 2023) 등 출간. 번역서 『에로스와 문명』(왕문사, 1972), 『주역』(고려대출판부, 2006) 『수운선집』(고려대출판부, 2019) 등 출간.
2001년 김환태평론문학상, 2003년 팔봉비평문학상, 2006년 현대불교문학상, 2008년 대산문학상, 2012년 김준오시학상, 2022년 인촌상(인문사회 부문) 수상.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1979~2011) 역임.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목차
추천사
김인환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 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고려대학교에서 30년 동안 비평론과 문학사, 그리고 현대시론을 강의한 저자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강의노트를 버리기에는 아쉬운 점이 몇 가지 눈에 띄어 힘자라는 대로 깁고 더해 책으로 엮어 보았다. 첫째 시의 본유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운율과 비유를 보편적인 시각으로 규정해 보려는 노력과 둘째 한국 현대시의 형성과 전개를 하나의 구도로 그려보려는 구상과 셋째 한용운과 김소월의 시를 자세히 뜯어 읽으려는 시도는 앞으로 젊은 학생들이 이 책의 미비한 수준을 넘어서 깊이 탐구할 만한 연구 영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현대시론의 대상은 20세기 이후에 한국 특히 남한에서 창작된 시라는 점에서 연대(年代)의 시이다. 그러나 연대의 시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만대의 시를 척도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대의 시에 대해서 말하려면 어느 한 나라의 시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시에 두루 해당하는 시문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책 속으로
이은상은 시조도 현대시와 마찬가지로 행수를 자유롭게 배열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전개하였고, 위의 시조는 이러한 의견에 따라 형식을 조정한 예이다. 행의 배열을 바꿈으로써 이은상은 시조의 형식을 파괴하였다. 위의 작품을 네 음보로 율독하면 대단히 어색하게 들린다. 네 음보의 율격을 깨뜨리고 두 음보와 세 음보의 교체 형식으로 바꿔 놓으면, 그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현대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박한 정감을 문법적 정확성과 논리적 객관성에 맞게 개념으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시조도 아니고 현대시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듯이 시조 율격의 특징은 독특한 종지법에 있다. 김진우는 시조의 율격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였는데, 이것은 일반 독자들에게 여러 차례 낭독하도록 하여 얻은 자료에서 도출한 결론이므로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김진우는 음보수만 세던 종래의 연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음보의 성질을 해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시조의 한 행은 두 개의 반행으로 나누어지고 하나의 반행은 다시 두 음보로 나누어진다. 첫째 행과 둘째 행에서는 강한 반행이 먼저 오고 약한 반행이 뒤에 오며, 반행의 내부에서는 약한 음보가 앞에 오고 강한 음보가 뒤에 온다. 반행에 ±1의 수치를 매기고, 또 음보에 ±2의 수치를 매기면 율격의 이탈이 허용되는 정도를 알 수 있다. 음수의 수치로 표시된 음보에 율격의 이탈이 허용되는 것이다.
- 32~33쪽
김동환은 이야기의 내용을 단순하게 하고 인물을 한두 사람으로 한정하였다. 사건과 사건은 연속적인 전개를 보이지 않고, 극적 효과를 고려하여 집중적으로 제시된 장면들이 비약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양된 의식의 표출이 아니면 격앙된 어조의 대화가 작품의 대부분을 이룬다. 특히 「국경의 밤」의 제58장은 200행 전부가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김동환의 설화시는 소설보다는 희곡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직관의 직접적 표현인 시는 작품의 무대 지시에 사용되고, 행동으로 직관을 객관화하는 희곡은 장면구성에 사용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동환의 의도는 설화시를 쓰려고 한 데 있지 않고 시의 영역을 넘어서 문학의 세 장르를 통합하려는 데 있었던 듯하다. 장르의 통합은 단테의 『거룩한 희극』을 통하여 14세기에, 그리고 판소리를 통하여 18세기에 달성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곧 해체되었다. 김동환의 시도는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성공할 수는 없는 시도였다.
여기서 잠시 두 작품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자. 두만강 변의 어떤 마을, 순이는 밀수입하러 떠난 남편을 염려한다(1~7). 청년 하나가 마을을 배회한다(8~11). 순이는 첫사랑의 추억에 잠긴다(12~16). 청년은 순이의 방문을 두드린다(17~27). 두 사람은 고향 산곡(山谷) 마을에서 서로 사랑했으나 여진인의 후예인 재가승(在家僧) 집안이었기 때문에(28~46), 순이는 같은 재가승인 마을 존위(尊位)네 집으로 시집간다(47~57). 8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적 파탄에 대한 고발과 반성으로 전개된다(58). 순이의 남편 병남은 마적의 총에 맞아 죽는다(59~62). 병남의 시신을 산곡 마을로 운구하여 매장하며 마을 사람들은 조선 땅에 묻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긴다(63~72). 「국경의 밤」의 주제는 식민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데 있다. 식민주의에 대한 항의는 간접적으로 암시되어 있고 봉건주의에 대한 항의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식민주의에 대한 항거가 약한 것은 결함이라고 하겠으나 비교적 온당한 현실 인식이 작품의 구조에 긴장을 부여하고 있다.
「승천하는 청춘」은 당시의 유행 사조인 사회주의와 연애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흥미 본위의 연애 이야기를 현학적으로 분식하는 수법은 대중 문학에 흔히 쓰이는 장치이다. 1923년 9월에 도쿄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지진과 그것에 수반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그 혼란 속에서 6,600여 명의 재일 한국인이 학살되었다. 「승천하는 청춘」은 관동 대지진 직후에 한국인 이재민 2,000여 명을 수용한 나라시노의 가병영(假兵營)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결핵으로 죽게 된 오빠를 간호하던 한 여자가 오빠의 친구와 사랑하게 된다. 오빠가 죽고 애인이 사상범 혐의로 잡혀가자 여자는 임신한 몸으로 혼자 귀국한다. 여자는 고향의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동료 교사와 결혼하였으나, 임신한 것이 알려져 남편에게 쫓겨난다. 고향을 떠나 여직공ㆍ침모ㆍ행랑어멈 등으로 일하며 여자는 아이와 함께 어렵게 살아간다. 그 여자의 옛 애인은 그때 서울에서 사회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이 여자를 알기 전에 이미 처자가 있었다. 아이가 죽는다. 아이의 시체를 묻으러 가서 두 남녀가 다시 만나는데, 우습게도 남자가 여자의 생활을 늘 관찰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은 온갖 인습의 제약이 없는 나라를 찾아 손을 잡고 성당의 첨탑으로 올라간다. 「승천하는 청춘」은 「국경의 밤」의 두 배가 넘는 길이이지만, 작품의 구조는 여지없이 혼란스럽다. 이 두 작품을 견주어 보면 현실인식의 오류는 작품구조의 취약성과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44~46쪽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고 있는 전형적 사고를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확대한 것이 창작이다. 문학의 창작 과정은 여러모로 과학의 탐구 과정과 대응된다. 과학의 탐구 과정은 가설을 발견하는 심리적 단계와 가설을 체계화하는 연역적 단계와 가설을 실험하고 검증하는 귀납적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적 탐구에서 가설에 해당하는 것이 창작 과정에서는 전형이다. 문학의 창작 과정은 전형을 발견하는 심리적 단계와 전형을 체계화하는 연역적 단계와 전형을 실험하고 검증하는 귀납적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 세 단계의 끊임없는 전진과 후퇴가 창작의 과정이다. 전형은 작가가 설정하는 의미의 원천이며 작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창작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전형은 일차적으로 문학의 형식에 관계되어 있다. 추리소설ㆍ성장소설ㆍ연애소설 등 장르에 대한 사전 지식 또는 전이해가 전형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전형은 변모하는 현실의 규범이나 가치에도 관계되어 있다. 다양한 심리적ㆍ사회적 현상과 사회의 발전에 대한 고려도 전형의 구성에 작용한다. 어떠한 현상도 독립된 것으로 분리해 놓고서는 묘사하거나 파악할 수 없으므로, 복합적인 현상들의 다양한 상호 관계는 어디선가 결합되어야 한다. 전형은 인간의 행동이 드러내는 관계들을 통합하는 수단이다. 현실의 계기들은 무한하기 때문에 전형을 구성하는 데는 포섭과 배제가 불가피하다. 목표를 축소하고 한정하지 않으면 현실의 여러 연관이 끝없이 확장되어 전형은 구성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현실적 현상과 전형적 현상 사이에는 정확한 대응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전형은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므로 실생활에서 그것의 짝이 되는 상황을 찾을 수 없다. 전형은 기원을 고려하지 않고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관계가 중복되는 영역, 여러 관계가 동시에 교차하는 지점이 전형의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전형의 구성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현실의 한 국면에 집착하는 고정된 관점 또는 현실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는 단선적 시각이다. 문학에서 환원주의는 언제나 개방된 시각을 차단하여 창작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계급투쟁을 주제로 하여 소설을 쓰는 작가가 만일 무역 제약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현실의 복합성을 제대로 고려한 전형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전형은 직선적 논리를 배척하고 모순되고 대립되는 관점까지 포괄하여 다각적 해석의 가능성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전형은 폐쇄된 영역이 아니다. 전형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모호성에 의하여 창작은 자유롭게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 창작 과정에서 전통과 사회와 현실에 관련된 국면은 전형을 이루지만, 창작은 이러한 전형을 현실묘사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글을 쓰면서 생겨난 여러 조건이 제시하는 새로운 내용을 그때그때 음미하고 이용하는 작업이므로, 작품과 전형의 사이에는 강한 긴장이 개입되어 있으며, 작품은 전형으로 축소될 수 없다.
-72~74쪽
1인칭 자기 서술의 이 연가에서 사랑의 관념은 우선 신체의 갈망으로 표현되어 있다. “네 거름길”이란 아마도 “너를 찾어가는 길”과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푸른 나무 그늘에 비추어 나의 붉은 얼굴은 더욱 붉게 느껴진다. 애욕의 불에 타고 있는 얼굴이다. 작중인물인 이 화자의 앞을 보는 시선은 온통 육체적 갈망으로 인해서 전율하고 있다. 첫째 시절의 자기 서술이 둘째 시절과 셋째 시절에서 내심 독백으로 바뀌는 것은 점점 더 강렬해져서 착란에 이르는 갈망의 심화에 대응하는 표현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파멸을 예언하였고 그가 지은 「예레미야서」는 온통 불길한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작중인물은 이 극렬한 애욕이 끝내 그의 알몸을 파괴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는 애욕의 갈망을 멈추지 못하고 비로봉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강간 사건들을 상상한다. 그것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이 아니라 여러 남자가 여러 여자를 한자리에서 강간하는 장면이다. 애욕의 시선 앞에서는 세상 전체가 미친 것처럼 요동한다. 아버지와 애인 사이에서 방황하다 미친 오필리아의 웃음소리가 이 장면에 등장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녀는 애욕에 정직하게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애욕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미쳤다. 예레미야는 애욕을 따르면 파멸한다고 경고하고 오필리아는 애욕을 억누르면 미친다고 경고한다. 서로 반대되는 두 사람의 경고 사이에서 작중인물의 신체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그는 연인을 원수라고 부른다. 사랑은 파멸과 광기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도의 번민과 방황 속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쬐그만 휴식’을 발견한다. 휴식이 애욕의 열기를 가라앉히자 그는 비로소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고, 흐르는 구름 그림자가 남은 미열을 서늘하게 가려주는 것을 느낀다. 그는 구름처럼 흐르다가 저물 때에 그녀에게 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임을 깨닫는다. “붉으스럼한 얼굴”로 갈 것이 아니라 “새파라니” 흘러가다가 “해와 함께 저므러서” 그녀를 만나겠다는 깨달음은 사랑을 애욕보다 더 큰 갈망으로 변형해 놓은 것이다. 신체의 성욕은 연인을 원수로 만드나, 의존심과 적개심으로 뒤얽힌 성욕을 넘어서서 평상심으로 나아갈 때에야 연인과의 자연스러운 사랑이 가능하다는 통찰이 감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시들을 통하여 우리는 서정주의 초기시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욕망의 편력에 기인함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작시에 골몰함으로써 시라는 언어예술의 형식이 유한한 노동체계를 넘쳐흐르는 그러한 무한 욕망을 한정하여 생활을 파탄시키지 않게 해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광복 이후 서정주 시의 변모는 갈 길과 할 일을 확고하게 선택함으로써 사회 내에서 주체의 위치에 대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얻은 그의 ‘쬐그만 이 휴식’(「도화도화」)이 얼마나 커다란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마 자신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터다.
-138~139쪽
과학의 지배 아래에 있는 근대 사회는 이러한 이원성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예술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예술 작품 안에서는 재료와 형식, 필연과 자유가 구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해할 수 없는 분열과 대립을 해결하는 원리가 예술 작품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러에 의하면 “미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나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이다. 실러는 예술을 올바른 인생 태도와 동일한 낱말로 사용하였다.
아름다움 또는 미적인 통일성을 향유할 때에는 질료와 형식, 수동과 능동의 현실적인 결합과 교환이 즉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들의 두 본성이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고 무한한 존재의 실현성(Ausfürbarkeit)과 가장 고상한 인간성의 가능성(Möglichkeit)이 유한한 현실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로 증명된다.
그러나 우리는 실러에게 무슨 근거로 예술의 원리를 세계의 원리로 확장하였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조화와 균형이라는 예술의 역할을 과장하면 할수록 이번에는 거꾸로 과학의 논리적 이해력이 존립할 수 없게 되며, 이원성을 넘어서려는 인생 태도는 신비주의에 귀속되는 위험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세계 자체가 예술의 원리에 따라 형성되어 있지 않은 터에, 도대체 어떻게 예술이 조화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정관적 관조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실천의 문제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실러와는 반대 방향을 택하여 예술의 영역을 극도로 축소함으로써 이렇듯 난처한 질문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예술 작품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최소한의 예술성 이외의 모든 것을 예술의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그들은 할 말이 전혀 없는 예술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주어져 있는 세계와 현실의 기존 질서를 그대로 방치하고, 예술로부터 일체의 의미를 제거하려는 그들의 창작 태도는 수학적 개념 구성과 유사한 견고함을 특징으로 한다. 예술 작품은 이제 내용 없는 형식, 하나의 텅 빈 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 이해력을 일관되게 관철시킬 때 나타나는, 과학적인 인생 태도의 필연적 귀결이다.
김춘수의 시적 여정은 가벼운 이야기 또는 단순한 관념을 감정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방법들의 모색에서 시작하여 이야기와 관념을 제거하고 언어 구조에 대한 감수성만으로 시를 형성하는 방법들의 탐색에 이르는 편력이었다. 김춘수는 김기림의 모호한 절충주의를 깨뜨리고 김기림 자신의 논리를 거의 더 나갈 수 없는 지점에까지 밀고 나갔다. 김기림은 과학적 세계상을 하나의 지식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시대의 변모에 의해 김춘수는 과학적 세계상에 내재한 분열과 이원성을 경험으로 받아들여 창작의 전제로 삼을 수 있었다. 시적 여정을 출발할 무렵 이미 김춘수는 감상이 내비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언어의 건축을 설계하였다. 낱말은 서로서로 다른 낱말의 울림을 강화해 주고 있으며, 시행 하나하나도 그 자체로서 자립하면서 동시에 다른 시행의 의미에 의존하고 있다. 분석을 견뎌낼 수 없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할 만큼 김춘수의 시들은 견고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몇 편의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김춘수의 여행을 따라가 보자.
-187~189쪽
기본정보
ISBN발행(출시)일자쪽수크기총권수시리즈명
9791189171780 | ||
2024년 11월 29일 | ||
392쪽 | ||
152 * 225 mm판형알림 | ||
1권 | ||
서연비람 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