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브로시오의 전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은 그의 최후 심판 때에,
사람들은 암브로시오를 칭찬하는 쪽과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쪽으로 나누어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
활에 깊은 흔적을 남긴 행동가로 부각된다. 왕족들까지도 암브로
시오의 가르침에 맞서다가 하느님의 무서운 벌을 당해야 했던 사
람들에 속한다.
유스티나 황후가 암브로시오가 관리하던 가톨릭 교회내에 있는
두 개의 대성당을 아리우스 이단에게 주기 위해 강제로 빼앗으려
고 했을 때 암브로시오는 그것을 집행하러 온 군인들과 대항하여
맞섰다. 그때 그의 신자들은 그와 함께 황제의 군대에 맞서려고
정렬해 있었다. 이러한 반란의 와중에서도 그는 자극적인 동방의
가락에 맞춘 새로운 찬미가를 지어 신자들을 매혹시켰으며 그들
을 자극하기도 하고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황제와의 논쟁에서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위
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를 반박했다. 그는 7천명의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공적으로 비난했으며, 황
제는 자기 죄를 깨닫고 공적 참회를 했다. 암브로시오가 로마 총
독으로 밀라노에 파견되었을 때 아직 예비 신자였음에도 불구하
고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선출하였다.
암브로시오는 넓은 이마에 커다란 눈과 길고 우울한 듯한 얼굴을
가진 키가 자그마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성서를 안고
있는 허약한 모습으로 그려진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귀족적인
바탕과 학자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아우
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면이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가 그 당시에 행하던 다른 사
람들의 설교보다 더 훌륭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보다 휠씬 박식하다는 것을 알았다. 암브로시오의 설교는 대
개 키케로를 모델로 한 것이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의 사상가나
철학자들의 영향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이방인의 이야기를 인
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의 철학자들에
게서 인용한 '이집트 인들의 황금'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의 강론
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의 설교와 저술 그리고 그의 개인 생활을 보면 마치 그가 그
당시의 크나큰 문제에 파묻혀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생각
된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영(靈)이었다
하느님과 인간 영혼을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가
장 가까운 것, 물질적 요소가 전혀 없는 선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축성된 동정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한 투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암브로시오의 영향력은 언제나 논쟁의 대
상이 될 것이다. '고백록'은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이
에 있었던 몇 가지 대담하고 갑작스러운 대립을 보여 주지만 박
학한 주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존경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모니카가 자기의 아들을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그리
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인도한 암브로시오를 하느님의 천사처럼
사랑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우구
스티누스가 그리스도를 입기 위하여 세례반으로 내려갈 때에 아
우구티누스의 벗은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것은 바로 암브로시오
였다는 말이 있다.
설명 ; 암브로시오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그리스도교적 특성의
모범이다. 그는 고대와 그 시대의 학문과 법률,문화에 깊이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암브로시오는 이 세상의 일에 적극적
으로 관여하는 가운데 성서의 숨은 의미가 우리의 정신을 다른
세계로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자신의 생활과 설교를 통해서 드러
나게 한 것이다.
인용 ;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은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 사회의 한 무명 요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도 속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내적 품위로써
일체의 물질 세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예지를 힘입어 유형한
세계를 통하여 무형한 세계로 옮아 가는 것이다.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14-1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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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