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그 자체가 불이문입니다.
이 불이는 간단히 ‘일’이라는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일이라고 하면 자칫 ‘이’와 ‘다’에 상대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이 이원성을 불식하는 말로서 ‘불이’, 즉 ‘둘이 아니다’의 쪽이 한층 적절한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이의 미’는,
추도 아니고 미도 아닌 것입니다.
미와 추가 아직 나누어지기 전의 것입니다.
미와 추가 서로 맞물려버리는(상즉) 것입니다.
반면에 추가 없는 미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의 문제에서 이념적으로 불이의 가치가 요구될 경우 미추의 두 가지 관점에 머물러 예술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미추상대(미와 추가 서로 대립함)’는 ‘불미불추’라는 부정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또는 ‘미추미생(미추가 생기지 않음)’의 경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첫댓글 불이가 되면 ‘미가 되지 않을 수 없기’때문에 , 추는 저절로 사라져버립니다. 즉 불이가 되면 저절로 아름답게 되는 것이지 결코 추를 이긴다든가 추를 물리치는 것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미 그 자체의 미, 자율의 미입니다. 따라서 추 없는 미, 즉 상대어를 가지지 않는 미입니다. 나는 이러한 무상의 미를 ‘정토미’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자유롭지 않고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없다. 추함을 두려워하여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면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을 수 없다. 자유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아니, 강조해서 말한다면 자유스러움만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다만 이 아름다움은 자율의 아름다움이며, ‘반자율’로서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미추를 구분하는 것이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자유란 이율에서의 해방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