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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21일 “누굴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나요.” 히1장1~3절
인간극장 “엄마 찾아 삼 만리” 5부작을 설교를 위해서 다시 보았습니다. 40대중반의 한국 남자의 외모인데 우리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의 아내도 40대 중반의 여성의 외모인데 우리말을 서툴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입양된 친구의 소개로 결혼하여서 3개월 된 딸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는 누가, 키우다가 버린 가을이라는 개가 있습니다. 딸을 제외하고, 셋은 버림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루크 씨는 홀트 아동복지를 통해 미국의 목사님가정에 입양되어서 대학에서 '컴퓨터분야'를 전공하여 좋은 직장도 가졌고, 돈을 잘 벌어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부모가 왜 자신을 버렸지 궁금하였습니다. 루크씨는 양부모에게 “더 늦기 전에, 친부모님을 꼭 찾아 야겠다”는 생각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는 수입이 좋았던 직장을 미련 없이 사표를 썼고, 한국행 '편도'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자신을 버린 제천에 집을 얻었습니다. 그의 뿌리를 찾는 지나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추운 겨울에 아내와 함께 3개월 된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재래시장에서 현수막을 설치하고,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줍니다. 자신이 비형감염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고, 친어머니도 비형감염을 앓을 것으로 기대하고 보건소에 가서 60세 이상, 여자의 진료 명단을 얻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동네의 이장을 찾으려고 주민자치센터를 갑니다. 어머니가 볼 것으로 기대하고 전국노래자랑 대회에 나갑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찾는 일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딸의 100일을 맞아 ‘뿌리의 집’에서 미국의 양부모님과 세계에 입장된 사람들과 잔치를 엽니다. 거기에는 어릴 적에 버려져 프랑스 독일 스웨덴 미국으로 입양되어 살지만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한국에 왔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경주 부산, 청주, 서울, 마산 등지에서 전단지를 붙입니다. 하나같이 부유한 나라에서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공부를 많이 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부유하게 사는데 뭐가 부족하여서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으려고 눈물 나는 노력을 할까요? 루크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뒤에 커다란 돌이 나를 짓누르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 시작조차 못합니다.” “어머니를 만나서 다만 커피 한 잔만이라도 함께 마시고 싶어요.” 자신의 뿌리를 찾아서 이전의 나쁜 기억에서 해방되어 희망찬 삶을 출발하고 싶어 했습니다.
가난한 할 때는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먹고 살려고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는 시리아 난민들이 있습니다. 압록강, 태국 캄보디아의 국경을 넘는 북한 이주민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한국 땅에서 사는 이주민들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의 뿌리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공허하고 두려워서 돈과 쾌락으로 채우려고 방황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욕망을 채우려고 영원한 삶을 포기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사탄의 유혹을 좋게 여겨서 살려고 합니다. 자기에게로 구부려져서 자신에게 나쁜 것을 선택하지요.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능력자.”로 생각합니다. 뼈 빠지게 돈을 벌어서 하나님 대용품을 구입하면 잠시 위로받으려고 합니다. 자기의 꾀에 자기가 속는 어리석은 이기주의자입니다. 엉덩이에 뿔난 사나운 황소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데 관심이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서 부르시는데, 죄책에 짓눌린 우리는 심판하실 줄로 알고 숨고, 핑계대고, 도망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쪽을 향해 화해의 다리를 놓아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는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다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에 사셨고, 죄로 마땅히 죽어야 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딤전1장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고 합니다.
눅15장에서 둘째 아들은 돈을 가지고 자기마음대로 쾌락을 즐기면 행복할 줄 알고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나 돈으로 친구, 쾌락을 살 때는 구름 위를 겅중겅중 걷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고 나니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돼지우리에서 비참하게 되어서 죽을 고생을 경험 한 뒤에서야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요4장의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은 남편이 6명이나 있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켜 줄 대상을 남자들에게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실패를 통해 고통을 경험한 뒤에서야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지요. 우리의 뿌리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전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몰라주면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 보아라.’는 뜻에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함께 사는 사람은 답답하여서 ‘말을 해야 알지 말을 안하면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도록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서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고 하지 않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당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직접 나타나 말씀하셨고, 야곱에게는 꿈을 통해, 이사야에게는 성전에서 환상을 통해, 호세야에게는 비유를 통해, 광야에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갈 길을 제시하셨고, 시내산에서는 돌 판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길을 제시하셨고,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결정짓도록 인도하셨고, 나귀를 통해서 어리석은 생각을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사건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약속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신의 잣대로 살면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선지자, 왕, 시편, 잠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부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드리는 가운데, 찬양가운데, 기도 가운데, 말씀가운데, 우리들의 봉사 가운데, 밤을 먹고, 잠을 자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부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퍼즐 한 조각을 맞춰서 큰 그림을 그리듯이 하나님은 부분적인 계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누굴 통해 당신의 뜻을 다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의도, 계획, 그 마음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알려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알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의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같이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완전하게 드러냅니다. 2절에서 “만유의 상속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고,” 3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이시오 그 본체의 형상.”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 손을 잡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뒤 버려두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가 에덴동산과 같은 세상에서 살도록 친구처럼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죄의 노예가 되어서 원망, 불평, 두려워하던 우리를 구원하여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뻐하며 살도록 십자가에서 몸소 죄의 형벌을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창조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화해 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친구처럼 도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천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권위와 아름다움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가지되 하나님과 구별되어서 활동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태양과 거기서 비취는 햇빛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마음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창조자, 화해 자, 도우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서 부유하게 살라고 도와주십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오병이어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화해 자이신 예수님은 나병으로 버림받은 사람, 눈먼 사람,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 귀신 들려 정신없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사람을 회복하여 온전하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아들이 죽어서 절망하고, 오빠가 죽어서 낙심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연약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존귀한 자로 축복하셨습니다. 친구와 같이 도우시는 예수님은 가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먹여주셨습니다. 삭개오와 같이 외톨이가 된 사람에게 죄의 짐을 벗기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님은 죽음의 눈에 보이는 죽음의 권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세, 세상을 뒤 덮고 있는 나쁜 가치관과 당당히 맞서 호령하시고 쫓아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속이고, 위협하여서 고통을 주고 나쁜 길로 인도하시는 지도자들에게 분노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귀하고 아름다운 권위를 가지셨는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다가 고난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될 정도로 고민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무덤에서 다시 일으켜주셨습니다.
우리의 창조자, 화해 자, 도우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은 3절 하반절에서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옳다고 인정하고, 크게 높여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늘과 땅을 다스릴 권세와 권위가 충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려고 하나 보이지 않아서 낙심될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숨은 의도를 다 보여주셨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 직장 생활에서 필요한 것, 악한 권세를 물리치는 방법을 예수님은 다 아시고, 해결할 능력이 있고,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아버지와 함께 들판에서 술래잡기 하고, 낚시하고, 일하는 것을 보고 부러웠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셨던 친구 분들, 아버지가 다니셨던 교회의 목사님, 함께 자랐던 삼촌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각 모아서 아버지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를 만나야 아버지를 온전히 알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셔서 이 땅에 보내신 의도를 알아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으시죠. 살아가면서 지은 죄, 실패를 해결하고 싶으시죠. 나의 부족한 점을 알고 도움 받고 싶으시죠. “누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무한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마치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해 보라 ’고 말씀하시 듯이 당신을 나타내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루 한 번 이상 생각하고, 십자가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은혜의 보좌에서 온 마음 다해 예배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대로 회복하고, 실수와 실패의 늪에서 건짐 받고, 친구같이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