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隱吾下於叱古 二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8구체 향가는 「처용가」를 비롯해 「모죽지랑가」 단 두 수뿐이며 4구체에서 10구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에 있는 작품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노래의 전체를 한데 잇대어 썼지만 짜임은 3장으로 되어 사뇌가 시형을 유지하고 있다. 초장은 제4구까지로서 밝은 달밤에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보니 역신이 아내를 범하였더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들고 있다. 중장은 제5, 6구로서 ‘다리 둘은 내 것이지만 나머지 둘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말로서 침입자를 나무라는 뜻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말 속에는 당황하는 기색, 의구하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제7구의 맨 앞에 나오는 ‘본다’는 차사(嗟辭)로 볼 수 있다. 사뇌가 형식에서 종장의 시작을 표시하는 차사가 이 부분에 나옴으로써 여기부터가 종장이 되는 것이다. 종장의 의미는 제8구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 구의 해석에 관하여는 양주동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연구자가 체념으로 해석했지만, 그렇게 보기보다는 적극적인 대항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본디 내 해인데 앗아가다니 된 말인가’ 하는 강한 저항이다. 단념이 아닌 항거의 뜻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 헌강왕에 의해 경주에 들어와 벼슬과 아내를 얻었다. 그의 아내가 역신과 동침한 것을 보고 이 노래를 불렀더니 역신이 물러났다. 처용의 이야기 뒤에 처용무(處容舞), 처용희로 전승되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노래와 춤이 지속되었다. 12월 그믐에 잡귀를 물리치는 때에 처용놀이를 하기도 했다. 처용랑 망해사 설화는 망해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와 그리고 몇 차례에 걸쳐 나라가 망할 것을 신이 미리 예고했지만, 왕과 신하들은 방탕한 생활에 젖어 끝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며 고려가요에도 「처용가」가 이어져 내려온다.
향가는 불교와 화랑 세력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대의 문학이다, 그 때문에 이 두 계통의 노래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 외의 작품들도 많이 전해온다. 신라인의 정서와 사유세계가 어디에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폭 넓고 단조롭지 않았던 결과가 아닌가 싶다. 향가는 워낙 오래된 시가문학이므로 수사 면에서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속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시 문화적 환경과 수준을 감안할 때 괄목할 만한 작품도 여럿 있다.
비유법을 비롯하여 의장(意匠) 면에서 눈에 띄는 몇 노래들은 현대시와 겨룰만한 정도다. 「혜성가」의 무화(無化) 기법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로운 대응과 해법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 수법을 20세기의 사백(詞伯)인 한용운의 시 다수에서 볼 수 있다. 한용운이 즐겨 사용하던 기법이 그도 모르게 이른 시기인 신라의 향가에서 이미 잉태되었다면 표현 면에서 향가와 현대시를 한자리에 앉혀도 무리가 없는 처리라고 판단한다.
달빛은
꽃가지가 휘이게 밝고
어쩌고 하여
여편네가 샛서방을 안고 누운 게 보인다고해서
칼질은 하여서 무얼 하노?
고소는 하여서 무엇에 쓰노?
두 눈 지그시 감고
핑동그르르…… 한 바퀴 맴돌며
마후래기 춤이나 추어 보는 것이리라.
피식! 그렇게 한바탕 웃으며
「잡신아! 잡신아!
만년 묶은 이무기 지독스런 잡신아!
어느 구렁에 가 혼자 자빠졌지 못하고
또 살아서 질척 질척 지르르척
우리집까정 빼지 않고 찾아 들어왔느냐?」
위로 엣 말씀이라도 한마디 얹어 주는 것이리라.
이것이 그래도 그중 나은 것이리라.
―서정주 「처용훈」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시인 자신의 생각도 보태어서 생산해낸 질박한 노랫가락 형태이다. 처용의 행위를 슬기의 미덕으로 규정하고 “이것이 그래도 그 중 나은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상실을 자위로 상쇄시켰다고 해석해도 좋다. 그래서 제목도 「처용훈」이다. 이 시의 특색은 구수한 입담에서 찾을 수 있다. 「처용가」의 진술적인 표현을 구어체의 입담으로 바꿔 놓음으로써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칼질은 하여서 무얼 하오?/고소는 하여서 무엇에 쓰노”에서 민속악의 가락을 떠올릴 수 있고 “여편네가 샛서방을 안고…” 어느 구렁에 가 혼자 자빠졌지 못하고/또 살아서 질척질척 지르르척…”을 통해서는 비속함도 겸한 토속적인 언어미를 만끽할 수 있다.
박희진의 시도 옛 기록의 큰 흐름 위에 놓여 있으나 설명이 부연되고 주제가 확장된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시와 거리를 두고 있다.
달빛이 이렇게 바다 속까지 스미어들 땐
두고 온 고향 생각이 나서 그래
망해사에서 아버지 동해의 용을 생각하고
흘린 눈물 두세 방울…
그냥 바다 속으로 진주인 양 굴러 떨어지데
우리 칠칠한 용의 형제가
수정궁에서 희롱하며 놀던 때가
어제 일처럼 눈앞에 삼삼한데
그런데 나는 정말 간이 콩알 만해졌었다오
피는 얼어붙고 머리칼은 곤두서고
당신을 덮친 그 사나이가 어쩌면 나를
고대로 빼내다니, 엄지발가락 긴 것까지
나는 그만 어이없는 웃음이 새나왔소
도대체 어떤 개새끼가 이 따위야
처용을 빼낸 또 하나 다른 처용……
당신이 속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소
나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밖으로 나오는데, 차라리 춤을 추며
휘영청 달이 이끄는 곳이라면
다시 아무데나 따라나설 참이었지
이렇게 그는 뉘우치고 사라졌소
자 이젠 당신도 나를 따라 춤을 추소
노래와 춤엔 귀신도 감동하고
역신도 얼씬 않지 사귀(邪鬼) 달아나고
-박희진 「처용가」
2,3연은 고향을 떠나온 외래인의 고적과 슬픔을 읊조린 것이다. 원래의 기록에는 없는 내용인데 야심한 시간에 경주의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 “서울의 밤거리가 좋아서는 아니라오”(생략한 1연 끝줄)라고 말하게 된 경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첨가시켜 놓은 연들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인 향수심과 비록 군왕의 극진한 후원이 있었으나 끝내 객지인 경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웃사이더의 심정을 헤아렸다는 점에서 무리함을 찾을 수 있다.
6, 7, 8연에서도 합리화는 이어진다. 그런데 이때의 합리화는 아내의 부정과 화자가 입은 결손의 충격을 무화시키기 위한 것이어서 전자와 성격을 달리한다. “당신을 덮친 그 사나이가 어쩌면 나를/고대로 빼내다니, 엄지발가락 긴 것까지” 아내를 덮친 사내가 또 하나의 처용이라고 말하면서 “당신이 속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소” 운운한 대목에서 우리는 슬프도록 너그러운 처용의 금도(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와 비극적인 상황은 처용의 선한 마음을 읽게 된다.
향가 「처용가」는 체념으로 끝난다. 그것과는 달리 박희진의 시는 그 보다 진전된 적극성을 발현한다. 일체를 무화시킨 그는 “자 이젠 당신도 나를 따라 춤을 추소”라고 권유하면서 친화의 세계를 연다. 역신(疫神)으로 비의된 침입자의 사죄를 받아들인 이상 죄 없는 아내를 타박하고 배척할 이유 또한 없는 것이고, 그래서 함께 가꾸어 나가자는 뜻이리라. 이렇게 되면 향수로 인한 고독과 착근(着根)에 실패한 외래자의 좌절도 동시에 극복될 확률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박제천의 노력은 끈질기다. 다른 향가의 변용에 이미 익숙해 있는 우리지만 새로 지어낸 그의 「처용가」를 읽으면 이러한 낯선 체험을 거듭 하게 된다. 예컨대 ‘합리성’의 추구는 박희진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는 동방으로 가면 한몫 쥔다는 소리에 배를 탔습니다. 험한 뱃길이 고비를 넘겼다 싶을 즈음 안개에 휩싸여 조난을 당했습니다(……) 이윽고 원주민들이 몰려와 그들을 에워쌌으므로 겁이 나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어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한 사람, 일행 중에 가장 젊었던 그를 볼모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용왕의 아들로 받들었으며 벼슬과 여자를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울 게 없을 고향 생각에 시름이 겨운 것은 어쩔 수 없어 술에 취해 지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런 어느날 밤 이슥히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던 그는 못 볼꼴을 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꿈속에서 사는 터 까짓것 오쟁이를 지면 어떠랴 사람 사는 세상은 똑 같구나 에라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자 남은 술기운에 부추겨 그는 춤추며 노래 부르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갔습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집집마다 그의 화상을 그려 붙여 잡귀를 막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신이 된 한 젊은 사내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니 저절로 쓴웃음을 짓게 됩니다. 처용이여 그대는 어떤가
―박제천 「처용가」
이 시는 보고 형식의 구어체로 일관하다가 끝 단락에서 당사자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전환시킨 구조가 이채롭다. 구어체라는 점에서는 서정주와 다를 바 없지만 산문 투의 진술 방식을 취하면서 구수한 입담이 주는 웃음을 제거해 버렸다는 측면에선 다르다. 그러나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화제, 곧 처용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웃음거리로 깎아내려서 희화화시켜 놓은 기록의 완벽한 변용에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시인의 기본 인식인, 즉 처용은 당초부터 ‘별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용자 운운하지만 그건 다 헛말이고 해상에서 조난당하여 어쩔 수 없이 신라의 어느 갯벌에 허우적거리며 상륙한 이국의 장사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처용의 신분을 이렇게 설정해 놓고 보면 그 뒤의 서사 전승은 하릴없는 사람들이 과장해 놓은 것, 꾸며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인으로 하여금 더욱 기가 막히게 한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면 있기 마련인 남녀의 불륜을 처용이 마치 달관한 도인인 양 이를 가무로 극복하여 마침내 벽사진경(辟邪進慶 사귀를 쫓고 경사로운 일을 맞이함)의 문신이 되었다는 점이다. 못 볼꼴을 보고서 이방인의 신세를 한탄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음이 분명한데, 소설 쓰기를 해도 이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 화자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만다. 그리고는 이 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처용이여 그대는 어떤가, 라는 물음을 내 놓는다. 처용이야말로 그가 당한 실상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당사자인 그가 이 이야기를 들으며 포복절도할 것이 분명하다는 함의가 거기 단간(短間)에 내포되어 있다. 난해하다는 항가 「처용가」를 박제천은 이렇듯 터무니없는 해프닝으로 간주하고 단순하게, 재미있게 처리해 놓았다. 옛 기록을 일소에 붙여버린 그의 「처용」 시는 비꼬기의 변용으로 분류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