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 송호찬
희망이란 갈피를 끼워 넣은 책 몇 권
두려움에 구겨진 옷가지들
일용할 양식을 떠 넣을 수저 등속을 넣고
입술을 앙다물어 지퍼를 채운 가방
하나 또는 두 개씩 앞세우고 나오는 곳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지하 출구
구멍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
경사로를 따라 지상으로 오르고 있다
얼마 전 나도 저 구멍에서 나왔다
테헤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옆집 키라도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던 인도 처녀 아쉬나도
브라질 출신 아랫집 루카스 아빠도
모두 저기를 통해 이쪽 세상으로 나왔을 터
출구 안 쪽은
서로 다른 길로 다니던 사람들이
빼곡하게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마치 세상에서 제일 넓은 자궁 같은 곳
사람들은 연신 구멍을 통해
햇살이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세상으로 나와
또 하나의 일생을
뒤섞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을 아주 단순화시키면 모르는 어둠으로부터 나와서 제 꼴과 깔을 만들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삶이 자기부모로부터 주어진다는 점에서 어떤 필연의 길을 따라 삶으로 온 것이고,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필연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삶에 대한 추측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삶에 대한 이런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단지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매 국면이 가지는 일반 형식이 '만나기 이전의 모른다-만나서 지지고 볶다가-헤어져서는 모른다'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삶의 중요했던 국면을 돌아보면, 하나같이 모르는 행로를 따라 걷다가 무엇인가를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틀입니다. 그런 생의 모습이 형상적으로 보여지는 곳이 터미널일 것입니다. 그것도 모이는 인연들의 삶이 추측되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국제공항쯤이라면 종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한 면모가 "마치 세상에서 제일 넓은 자궁 같은 곳"으로 연상하기에 충분합니다. 모르는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 모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도 저 구멍에서 나왔다/ 테헤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옆집 키라도/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던 인도 처녀 아쉬나도/ 브라질 출신 아랫집 루카스 아빠도/ 모두 저기를 통해 이쪽 세상으로" 나옵니다. "햇살이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세상으로 나와" 저마다의 꼴과 깔을 갖추는 "또 하나의 일생을/ 뒤섞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그리고 키라도 아쉬나도 루카스 아빠도 저마다는 필연의 연속적인 길을 걸어왔겠지만 삶은 그렇게 모르는 인연의 길을 따라와 만나고("또 하나의 생"을 이루고) 예전에 그랬듯이 또 헤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삶과 죽음의 행정과 닮은 삶 안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의 형식입니다. 그렇기에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햇살이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세상으로 나와/ 또 하나의 일생을/ 뒤섞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생을 부르는 것입니다.
-글/ 오철수(시인. 사이버노동대학 문화교육원 부원장)
첫댓글 호찬아, 뚝 떨어져 있지만 늘 건강하고 힘차게 살자. 자부심을 겸손함으로 가진 자들이 보고 싶은 시절이다. 섣불리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외면에서 끈질기게 보는 시정신이 필요한 시절이다(나는 그 반대지만).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시절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믿고 그걸 시에서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직업정신까지 더해져 그런 실천에 그래도 자연스럽게 닿아 있었던 듯하다. 앞으로도 삶의 표면을 통해서 깊이까지 드러내는 시정신으로 남자.^^
넵. 선생님. 오늘 여기 8.15 지만, 그냥 똑같은 일상으로 회사에 나와 일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식 롤을 먹으면서요. 그러다 이렇게 들어와 봅니다. 제 가는 촉수가 아모르파티에 닿는 일은 '철수랑시쓰기타블로라사' 말석을 비집고 들어가 앉던 것 처럼 기분 좋은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읽으니 더 멋진 시네요. 멋지다! 라고 표현하면 좀 그런가요?! ㅎ
참 좋은 시에요. 명희도 오늘 올린 시 짱이더라......월요일날은 왠지 글을 빨리 올리지 않으면 이곳분들이 걱정할 것 같아요. 참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제가 좀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야 허는데....ㅋ
요즘 사무실에서는 좀 한가해요. 사람들 휴가를 가서인지...... 그래 얼른 열어보게되죠. 집에서는 잘 열리지 않거든요. ㅋ 주홍발자국이 없으면 서운하죠. ㅎ 오늘은 길은 내시는대로 바투 따라왔네요. ㅎ 제 시도 좋다하시니 오늘 하루 기분이 붕 떠있을 것 같아요. ^^
바람. 연극할 때 그곳에서 우렁차게 외쳐봐. 여기까지 들리게......
우렁차게...... 해야죠. 가슴 속 깊숙이 있는 마음을 끄집어내서 보여줘야죠. ㅎ 아마도 리허설할때 자료화면 만들꺼에요. 올릴 수 있으면 올릴께요. *^^* 아무튼 그곳까지 날아갈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해서 할께요!
호찬님의 시를 읽다보면 문득 궁금해져요. 참 좋은 사람일 것 같은 시인...서로의 일생이 뒤섞이며 살아가는 것이 생의 본 모습이겠지요.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작은 실천을 아주 차곡차곡해 나가시는 아주 부드러운 분이죠. 그래서 예전에는 모임 맏형으로 부르곤 했지요.^^
여기 아모르는 사람들이 깨어 있는 곳, 시대정신과 시정신들이 뒤섞이면서 살아가는 곳, 아닐까요? 영선님 감사드립니다.
호차니스트야말로 자부심을 겸손함으로 가진 牛라고 할수 있겠지요.그 시선을 따라 저도 그 구멍을 통과해 다른 세상에서 서로 뒤엉켜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왔어요 많이 다르지만 또 살아가는 모습이 별반 다르지않는 이렇게 멀리있어도 이곳에서 뒤엉키며 시로 뒹굴수 있다는것에 행복해요 호찬우 반갑수^^
예전에 소띠들이 참 많았는데...이젠 말띠들이 이렇게 많아졌어. 글구보니 개띠도 많아졌어..멍멍멍^^
다르다고 느끼다가도 다르지 않은 것 같고, 그러다가 또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러지요. 살아가는 국면에 따라 접촉하는 면에 따라 달라지나 봅니다. 아마 문경시인은 벌써 간파한듯. 가까운 곳 오시면 연락하시길......
오늘 같은 날, 햇살이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세상으로 나와 하나의 생을 지구 반대편에서도 서로 뒤섞이며 살아가고 있네요.
서로 뒤섞이여 더 잘 살기!
고맙습니다. 산수유님. 한국은 요즘 비가 많다던데 모두들 잘 지내시기를.
자궁과 같은 공항 게이트 ^^ 새로운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래요..그냥 어두컴컴한 지하여서 자궁 같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대한 사랑을 출발시키는 곳이기에 자궁 같은 이겠지요^^
이 공항 전산망이 작동을 멈추어서 10시간 동안 사람들이 입국하지 못한 일이 며칠 전 있었지요. 그 안쪽에서 못 나온 사람들 정말 빼곡하게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왜 그런지 인천공항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어요. 아르케님 잘 지내시죠? 아모르님들 한꺼번에 목소리라도 들으려 정모 날을 벼르는 데 번번히 시간을 놓칩니다.
열림과 닫힘, 앞과 뒤, 출발과 도착.. 우리는 그저 한 곳만 바라보는데도 세상은 이렇게 늘 나뉘어 있어요. 그것을 하나로 볼 줄 아는 힘이라면 ..뒤섞임 속에서 하나로 어우르는 형상을 잡아내는 힘이라면 뭘 못할까요^^
멀리 있는 사람 힘을 주시는 탱크님께 감사.
아, 작지만 무한한 구멍...
참 들고 나기가 힘들지요. 위에도 썼지만 10시간씩 기다린 사람들 아마도 열달을 기다린 것 같을 겁니다. 희철님 잘 지내시죠?
쌤~께서..'외면에서 끈질기게 보는 시 정신이 필요'하다라구 말씀하셨는데 시를 찬찬이 다시 읽어보니 송호찬님은 말 안 해도 그런 분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타국에서 열심이신 시인님~ 건강하세요^^*
몇 분이 늘 격려해 주셔서 힘이 나는데, 시몽님도 늘 격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종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한 공항을 "마치 세상에서 제일 넓은 자궁 같은 곳"으로 연상하고.. 햇살이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세상으로 나와 일생을 뒤섞으며 살아가는 것이고 끊임없이 생을 부르는 것이다. 시도 해설도 고맙습니다 ^^
시골 살다 보면 자연 재해를 입을 때가 많은데, 비 피해 없이 여름 잘 나기를 빕니다.
아네모네 선생님이 참 미더워하시는 회화나무 호찬님, 저희도 그렇습니다. 어디서든 그 여정을 담담하게 보여주시는 회화나무님이 참 좋습니다. 지표가 곧 좌표가 되는.
멀리서도 시를 향한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런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호찬형이 참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