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都周邊의 名山들 地圖보기
開京은 北쪽의 天摩山, 762m.國師峰, 764m. 帝釋山, 744m, 동북 쪽의 華藏山, 563m, 東南쪽의 進鳳山, 320m, 西北쪽의 萬壽山, 228m 등의 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北쪽의 松嶽山, 488m으로부터 남쪽의 龍岫山, 177m으로 連結되는 丘陵의 稜線을 따라 羅城을 쌓아 外部로부터의 侵入을 防禦하였다. 또한 앞에는 禮成江 流域의 新光․延白 平野, 사천강 流域의 사천평야, 臨津江 下流의 長端平野, 漢江下流의 豊德․金浦平野등 넓은 農耕地가 있어서 經濟生活에 必要한 物資를 充分히 確保할 수 있었다. 여기에 東쪽으로는 臨津江, 東南쪽으로는 沙川江, 黃海로 나가는 禮成江과 禮成江가의 碧瀾度는 國內 全域은 물론 外國과 交易할 수 있는 좋은 海上輸送路였다.
開京은 古代 三國의 首都와 달리 馬頭明堂이니 扶蘇明堂 또는 松嶽明堂이니 하여 風水地理思想으로도 이른바 明堂의 땅으로 일컬어졌던 곳이다.
鷄頭山 .
光德面에 있다.바다에 돌출한 닭머리 같아 鷄頭山이라 하였고 높이는 18m.
孤雲山.
北面에 있는 山. 177m. 五峰山북쪽.
光德山.
光德面에 있고. 풍덕 東北에 위치. 146m.
國師峯.
聖居山 東北에 있고 天摩山 周邊 山중 最高峰이다. 높이 763.6m.
軍藏山.
進鳳山과 德物山 남쪽 중면에 있다 . 높이 288m.
極樂峰.
五冠山 東편에 있고 440.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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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山. 松嶽山의 愛稱 .
德積山. ?
豆石山.
帝釋山 남쪽. 鷹峰山 鳳鳴山북쪽. 영남면에 있다. 287m.
馬群山.
臨漢面에 있다. 南쪽 기슭에 高麗 康壽宮터가 있으며 지금도 瓦片을
볼 수 있다.
舞仙峰.
중서면에 있다. 높이 252.7m . 玄陵正陵의 主山.
百年山.
西面에 있다. 一名 蓮山. 높이 177.3m..
白馬山.
大聖面과 興敎面에 걸쳐있다. 높이 203.6m. 禮成江에 임해있다.
白龍山.
大聖面과 興敎面에 걸쳐있으며 白馬山 東北에 위치.
寶鳳山.
麗末 武臣 48人의 隱居地 一名 東杜門洞.
鳳凰山 .
光德山 南쪽 大聖面 豊德邑에 있는 높이 79m의 작은 山.
負兒峰.
松岳山과 天摩山 中間의 봉우리.
扶蘇山.
? 光德面 山麓에 敬天寺터가 있다. ?
氷庫山 .
北面에 有. 318.2m.
子男山 .
子男山은 103 m의 開城市內 복판 池町에 있으며 松都 開京의 中央에 자리한 아름다운 山이다. 周圍에 古蹟이 많다.
라복산. 蘿.(소나무겨우사리라)蔔(치자꽃복)山.
天堂洞(?)을 蠶頭로 하고 子男山 서쪽 기슭에 있다.
榮山.
西面에 있다. 높이 232.7 m 烽燧臺址유.
水理峰山 上道面 楓川里에.
龍峀山.
높이는 178m이다. 基盤岩은 주로 花崗巖이며 기본 土壤은 褐色山林土이다. 산은 東에서 西로 뻗어 있으며 山의 傾斜는 매우 緩慢하다. 山에는 소나무 잣나무 三葉松 등의 針葉樹와 아까시나무 참나무를 비롯한 闊葉樹가 섞여 鬱蒼한 숲을 이룬다. 山 기슭에는 果樹園이 分布한다.
산마루를 따라 高麗 때 쌓은 土城의 흔적이 있으며 南쪽 기슭에 高麗 3대 왕인 定宗의 무덤과 20대 왕인 신종의 무덤이 있다. 북쪽 기슭은 開城盆地와 접하며 鐵道가 지난다. 南쪽에 野生花 많은 女性的인 山. 鈴蘭꽃(은방울꽃. 5月이 되면 피는 꽃. 淸純하고 素朴하게 피는 野生花 藥用, 膳物용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꽃)등 野生花 많다. 名所도 많다. 裔峰 中臺 七寶의 三峰이있다. 松都方向 北麓에는 巖石이 屛風같이 둘러있어 그 이름은 喜雨臺이다. 그 박에 天然臺 洗心臺 永樂臺 八仙臺 醉岩등이 있다.
龍峀山에는 많은 산토끼가 살고 있어 토기산양이 재미있다. 反求亭이있어 봄에는 弓術大會로 盛大한 잔치가 벌어지며 "一箭관역"소리와 어여쁜 기생들의 "지와자"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蜈蚣山.
지내산 開城市 西쪽 높이 204 m.松嶽山 西南이며 그 모양이 북과 같아서 松嶽山을
左鼓山 지네산을 右鼓山이라 하였다. 지네산의 전설 보기.
夜味山 .
太平町에 있으며 北족은 蜈蚣山이고 남쪽은 시장이. 지내산 남쪽.
聖居山.
天摩山 동쪽에 있으며 685.7m. 普賢洞 馬潭, 大興寺의 寺趾등이 있다. 北城岐중의 一峰. 유명한 박연폭포를 품
고 있다. 계곡 따라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모여 담을 이루고 백척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단같은 물줄기는 일대
장관으로 울창한 수림에 둘러 쌓여 한여름에도 서늘하다.
聖居山,天摩山 골짜기는 의적 임꺽정의 본거지인 청석골이다. 聖居山 암벽 밑에는 七星菴이라는 암자가 있다.
靈鷲(독수리취)山.
嶺南面에 있고 500m. 정확한 위치 알 수 없음.
五冠山
聖居山 동남에 위치. 다섯 봉우리가 冠과 같다 하여 五冠山이라 불리운다.
五峰山 .
西面에 있다. 높이 171,8m 甘露寺 有. 禮成江 건너기 전 京義線 鐵道 北쪽에 보인다.
由岩山. ?
鷹峰山.
松岳山 바로 北쪽에 位置. 높이 400m. 山 모양이 매가 외로이 서있는 모양 같다.
因達峰.
聖居山 南측 大興 城에 연이어있다.
天德山.
높이 215m. 德物山 東南에 위치.
天摩山 . .
松嶽山 북쪽 嶺北面.
높이 : 朴淵瀑布 上流 향해서 右側山 762m 主봉우리로는 萬鏡臺, 淸凉峯, 聖居山
最高峰인 萬鏡臺를 비롯하여 淸凉峰 ·聖居山등의 암봉이 連峰을 이루며 솟아 있다. 高麗 建國과도 關係가 깊은 開城의 鎭山)이며, 避難城으로 築造한 大興山城이 있다. 예로부터 ‘開城金剛’ 또는 ‘小金剛’의 名稱을 남길 만큼 景觀이 秀麗하다. 북쪽 기슭에 有名한 朴淵瀑布가 있으며, 산중에는 開城寺 ·대흥사 등 오래된 절이 있다. 무수한 尖岩이 削出하여 마치 山峰에 칼을 꽂아 하늘을 바라 보느 듯하다. 山에 오르면 禮成江과 江華,仁川등지가 보인다.
萬鏡臺. 天摩山最高峰.
萬壽山 . 杜門洞 뒷산. 정선아리랑 歌詞에도 나온다. 中西面의 麗陵里 鵠(고니곡)嶺里. 높이 227m.
鳳鳴山 .
土城面 麗陵里에 있다. 鳳鳴山 開城市 西部의 境界에 있는 山. 높이 414m이다. 基盤岩은 주로 原生代 片巖이며 土壤은 葛色山林土이다. 산줄기는 東쪽과 北서쪽, 南西쪽 방향으로 벋고 그 사이에 골짜기들이 있다. 산비탈의 傾斜는 40~50˚이며 특히 南쪽 비탈이 急하다. 南西쪽 기슭에서는 석현천이 發源하여 묵산 저수지를 거쳐 禮成江에 合流한다.
秀龍山 長湍郡내
如尼山 .
中面 軍藏山 南側에 位置. 240m.
殿座山. 光德面에 있다. 높이 75.7m .
帝釋山.
嶺北面에 있으며, 朴淵爆布 西北쪽 멀리 있다. 높이744m.
進鳳山 .
進鳳山높이 310M. 開城 東南족에 우뚝 솟았다. 道詵庵 철쭉꽃 有名. 雪景 볼 만하다.進鳳山 성돌이는 고남문에서 올라가 道詵庵에서 수구문쪽으로 내려오는 등상로 진달래꽃으로 有名 .冷泉으로도 有名.
德物山.
都羅山 展望臺에서 강 건너에 바로 보인다. 鳳東驛에서 南쪽 3時間 거리 高麗忠臣 崔瑩 將軍 모신 곳. 우리나라 巫俗信仰의 本據地.雪景 볼만함. 토끼 잡는 곳. 鳳東驛에서 南쪽 3時間 거리.高麗忠臣 崔瑩將軍 祠堂이있다. 韓國 巫堂의 本部다. 일년내내 굿당에서는 굿이 끝이지 않는다. 女人들의 발길이 많다. 288m.
괴미래 동산.
宮町(銅峴)小學校 동쪽에 있는 작은 山.
개바우 南山.
郵遞局뒤에 작은 동산 .
꽃동산 .
동부에 있는 작은 산.
北韓 文化유적 답사기 에서 인용. 지은이 : 최창조.
개성의 주산은 진산과 일치한다. 송악산이 바로 그것인데 해발 489m로 바다에 인
접한 개성과 같은 지세에서는 상당히 높은 산이다. 실제로 개성 시내는 해발 20m에서 30m에 지나지 안
으며 만월대의 정궁인 회경전 터가 50m이다. 그러니 송악산의 상대적 높이가 훨씬 높아 보일 수밖에 없
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는 북악산이 342m이지만 남쪽이 한강에 감싸인 넓은 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낮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았지만 그를 보완하기 위하여 그 뒤에 있는
837m의 북한산을 진산으로 두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조산인 632m의 관악산을 압도할 수 있는 까닭이다.
주산 현무에 이어지는 나머지 사신사는 나성 성곽과 거의 일치하니, 백호는 제비산(이 산이 지네산이
라 불리우는 산임)-야미산 줄기가 되고 청룡은 부흥산-덕암봉 연맥이 되며 시내 가운데 있는 자남산과
남쪽 끝 용수산-진봉산-덕적산 줄기가 안산과 조산이 되어 완벽한 사신사의 장풍국을 이루는 형세가 된
다.
다시 그 내룡의 맥세를 보면 당연히 백두산을 조산으로 오관산을 종산으로 삼아 송악을 일으키니 이
것이 바로 개성의 주산인 것이다. 내룡은 서북서 방향에서 들어와 정남향으로 만월대 혈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개성 풍수의 개략이다.
술가는 이를 평하여 청룡과 백호가 좌우를 겹겹이 감싸고 앞산이 중첩되게 명당을 호위하며, 사방 산
신은 혈을 철저히 옹위하는, 산 속에 우묵하게 숨겨진 좋은 고을 터라 극찬하였다. 당시 고려의 국내 정
세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아직 지방 호족들의 발호나 반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방
어에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평지의 땅이나 득수국의 땅보다는 이런 지세가 유리했을 것이다. 오죽
하면 태종 왕건이 호족 세력을 인척으로 삼아 회유하기 위해 각 호족의 딸들을 수물 아홉 명이나 왕비로
삼았겠는가. 그러니 당시 정세로는 잘 잡은 수도라는 것이다.
개성 궁성의 정문 격인 남문은 주작문이고 황성의 남문은 승평문이지만 흔적이 없다. 크게 네 번의
화재를 당한 만월대가 최후를 마친 것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이 불을 지른 때였다. 그후 오늘까지
만월대는 폐허의 비장감과 고적감만을 내보일 뿐 그 미려하고 장쾌했던 화사함은 찾을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만월대 폐허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유지는 신봉문터. 문루의 주춧돌과 문지방 돌 20여 기만 땅에 붙
박혀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만월대 안내판을 처음 접하게 되는데 현재<국보 유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신봉문을 지나면 약간 오른쪽으로 길이 굽으면서 창합문 터가 나온다. 여기서도 만
날 수 있는 것은 주춧돌과 계단 난간석 뿐이다. 여기에 서면 이제 만월대를 대표하는 그 유명한 회경전
터의 앞 계단을 만나게 된다. 모두 두 쌍, 네 개의 계단인데 하나의 계단은 33개의 돌 층계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 국가여서 33천을 표상한 33계단이 아닌가 추측해 보지만 알 수 없다는 대답이다.
수직 높이 약7.2m, 멀리서 보면 그저 그런 계단처럼 보이지만 막상 바로 앞에 서면 무척 위압적이고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오르면 경사도 보기보다 훨씬 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본래 지형을 가급
적 깎아내지 않고 자연 지세를 손상하지 않으려 했던 결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계단 위에 올라 회경전
뜰을 보면 그 터를 조금 더 깎는 일이 당시로서 별 큰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참고 자연 훼손을 삼가던 고려인의 땅에 대한 외경심이 바로 우리 자생풍수 사상의 요체라
보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계단 아래 선 사람들에게 권위주의적인 공간 배치를 실감
하게 하는 실익도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만월대의 가장 큰 풍수적 특징은 인위적으로 균형을 잡아 건물 배치를 한 것이 아니라 자연 지세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는 점이다. 낮은 곳은 축대를 높이 쌓고 높은 곳은 깎아 내리지 않은 채 계단을 쌓아
올라가는 식으로 그 위 경사면에 궁궐을 지어놓았다. 더구나 창합문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만월대 앞
쪽의 회경전과 송악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자리잡은 장화전은 만월대의 중심되는 2대 궁궐이며 서로
이어진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는 않다.
앞서 입구인 신봉문에서 창합문으로 올라가는 대궐 진입로도 조금 틀어져 있었다고 지적했다시피 회
경전과 장화전을 서로 다른 평면상에 그것도 서로 다른 좌향으로 건축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들이 중국의 풍수술이나 건축술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였다면 당연히 동일 직선상에 동일 좌
향을 취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뒤 건축된 조선시대 건물들의 터잡기와
배치가 기하학적 균형을 갖추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이것을 나는 자생풍수의 증거로 보는 것이다. 자생풍수는 중국 이론풍수가 체계화된 이론에 입각하여
터를 잡는 데 대하여 자연 지세에 그대로 의지한다는 특징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중국 풍수가 어디에서
나 통용될 수 있는 일반 이론적 측면이 강하다면 자생풍수는 풍토 적응성은 뛰어나지만 체계화나 이론
화가 매우 어렵다는 단점을 갖게 된다. 땅은 땅 나름대로의 고집과 질서가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리학은 그 땅에서 집적된 지혜의 소산이 아니면 땅에 무리를 가하는 일을 벌이게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여러 유적지에서 내가 느낀 것은 풍수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자연
스럽고 경우에 따라서는 땅에 상당한 무리를 가해 가며 구조물을 축조했다는 혐의를 여러 번 가진 적이
있다. 그 이유가 바로 중국 이론풍수에 탐닉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틀에 박힌 터잡기와 건축물 배치가
초래한 결과라 생각한다. 만월대에서는 비록 그것이 덜 세련되기는 했지만 훨씬 자연스럽고 주위 산천
형세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여기에는 또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우리 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가 그의 "유기"에서 이르기를 "송악
산 아래 궁궐을 지을 때는 소나무를 많이 심고 절대로 흙을 파헤치지 말 것이며 오히려 토석을 돋우어
세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자생풍수의 사고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유언이다.
만월대 뒤로 철벽을 두른 듯한 송악산은 그 모습이 서울의 북한산을 너무도 닮았음에 놀랐다. 나 뿐
만이 아니라 내 얘기를 들은 우리 일행은 모두 그에 수긍하였으니 나의 주관적 안목만은 아니었다고 믿
는다. 만약 개성을 고향으로 가진 실향민들이 당장 고향의 상징인 송악산을 보고 싶다면 송추나 일영
쪽에 가서 북한산과 도봉산 연맥을 바라보면 아쉬운대로 망향의 쓰라림을 조금은 쓰다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 자신 송구스러울 따름이고 일이 이렇게 된 데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가
참괴스러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의 짐작은 이렇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성의 산천
을 수도의 전형적 형상으로 심상에 새겨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의 성격이 송악산과 같은 산을
선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오래 전 양주 회암사를 답사했을 때 이런 감회를 기록에 남긴
바 있는데 오늘 그것을 다시 들추어냄으로써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코자 한다.
양주 회암사는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인연이 깊게 닿아 있는 절이다. 절 뒤쪽 칠봉산으로 올라가는 등
산로를 따라 중턱에 올라 주변 형세를 관망해본다. 문득 이성계의 성격에 생각이 미친다. 사람들은 자기
성격에 어울리는 터를 찾는 습성이 있다. 진취적이고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성품의 사람은 툭 터진
산등성이를 좋아한다. 내성적이고 온화한 성품의 사람은 안온하게 사방이 산으로 닫힌 전형적인 명당
터를 즐긴다. 이로써 역사상 인물에 대한 환경심리학적인 성격 추정이 가능하리라 보지만, 아직 학문적
으로 정립된 바는 없다.
풍수를 하는 입장에서 이성계가 선호한 터들을 살피다 보면 그의 성격이 어느 정도 떠오른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 터 역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여 흥미롭다. 그가 즐겨한 땅들은 역사에 분
명히 기록된 곳으로만 따져 함흥 일대,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계룡산, 그리고 이곳 천보산 일대이다, 함
흥은 본 일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북악, 인왕, 천보, 계룡은 모두 곳곳에 암석 쇄설물들이 깔려 있고 깎
아지른 듯한 암벽이 정상을 압도하는 풍광의 산들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덕있는 산들은 아니라는 뜻
이다.
어떤 면에서는 냉냉한 살기가 산 전반에 은은히 내비치고, 강골, 척박의 기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
다. 그렇다고 무식한 천박성이 드러난 것은 아니니, 좋은 의미에서 전형적인 무골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의 산들인 것이다. 그런 산들의 계곡 사이사이에는 의외로 비옥한 토양이 산재하여 수목을 울창하
게 하여 주니, 실로 절묘한 풍운아적 풍모라 아니할 수 없다. 쿠데타를 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기 마련
인 단순성과 강직성 그리고 무모함 따위가 산의 성격에도 배어 있다니 실로 감탄스러운 자연의 조화 속
이다. 더욱 절묘한 것은 이런 산들이 지금도 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북악과 인왕은 청와대 경
호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이 주둔지가 되어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고, 계룡대는 삼군 본부가 자리잡
고 있으며, 회암사 뒷산도 군 훈련장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그 산들
의 성격을 사람들이 잘 파악하여 그에 맞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개성은 이성계에 의하여 피로 물들여진 곳이다. 아무리 그의 성격에 송악산이 맞고 그의 심상
에 수도 주산으로서 송악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중하다 하더라도 송악산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것
이다. 그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개성을 떠나고 싶어했다. 그 단적인 예가 고려를 폐하고 왕에 오른 뒤
아직 나라 이름을 짓기도 전에 서울부터 먼저 옮길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다른 논문에서 상술한 바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기로 한다.
다시 만월대로 얘기를 돌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송악산의 형세와는 달리 그 지기지세가 만월대 쪽으
로 휘어져 있음이 확인된다. 만월대가 기하학적인 직선 구조를 유지하지 못한 이유를 여기서도 알겠다.
주변 둔덕에는 일반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여러 무덤이 눈에 띤다. 개성이 오랜 도시임을 말하는 예일
것이다. 또 그 주위에는 과수원이 꽤 많다.
과수원은 대부분 과일나무의 특성상 기온이 따뜻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여기 과수원이 많다는 것은
이곳이 상대적으로 주변 지역보다 기온이 높다는 의미일 터인데 과연 그럴까? <개성시 문화유적 관리
소>에서 나온 깡마르고 점잖은 풍모의 안내원 노인이 바로 그렇다고 대답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곳은 송악산 연맥에 의하여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다른 곳보다 따뜻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 분
의 얘기로는 송악산 북쪽인 박연폭포 쪽 마을과 이곳은 겨울 평균 기온이 5내지 6도 정도 차이가 난다
고 한다.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박연폭포는 이상난동임에도 불구하고 추위 때문에 있기가 거북할 정
도였다.
이제 잠깐 숨을 고르고 풍수 술법에서 말하는 몇가지 황당한 도참적 예언과, 그와는 달리 합리성이
감춰져 있는 풍수 비보책에 관하여 말해보자. 먼저 왕건의 가계를 알아야 하겠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처
음 개성에 이주한 왕씨의 원조가 호경이고 그의 아들이 강충이다. 강충의 둘째 아들이 읍호술인데 그는
나중에 이름을 보육으로 고친다. 보육의 딸 진의가 당나라 숙종("여지승람"에는 성종으로 되어 있음)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고 작제건의 아들이 용건이며 그의 아들이 왕
건이다.
이미 신라 말 최치원이 "계림황엽 곡령청송"이라는 참구를 남겼다고 하는데 계림은 경주요, 곡령은 개
성이니 신라는 망하고 개성에 새 기운이 일어난다는 뜻일 것이다. 여하튼 이때부터 소나무가 등장한다
는 것은 유의할 만하다.
대표적인 소나무 얘기는 신라의 풍수 술사 감우 팔원이 강충을 찾아와 삶터를 부소갑의 남쪽으로 옮
기고 헐벗은 송악산에 소나무를 심으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란 예언을 한 일이다. 지금도
송악산은 화강암이 몸체를 그대로 드러낸 동산(나무가 자라지 않은 산)에 가깝다. 소나무는 악지에서도
잘 자라는 수종이므로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게다가 늘 푸른 나무인데다가 그 잎이 한 구멍에서 반드시
두 잎만 내기 때문에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상징으로 크게 숭상하는 것이다. 요즈음 한 구멍에서 세 개
의 잎이 나는 소나무가 많은데 그것은 왜송이라하여 재래의 소나무와는 다른 것이다.
또 하나는 소나무 껍질이 거북이의 등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사신사중 북쪽 현무에 해당한다하여 지
금도 무덤이나 능의 북쪽에는 병풍을 둘러치듯 소나무를 심는 관습이 있다. 그러나 이런 도참류의 얘기
는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예컨대 '금돼지가 쉬는 곳'과 같이 내용이 황당하여 설화적 가치는 있을지 모
르나 풍수적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성의 백호세가 강하고 청룡세가 약하여 무신의 난이 자주 발생하고 훌륭한 문신이 나지
않는다거나 여자들이 너무 설쳐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는 따위의 얘기도 있다. 청룡은 해 뜨는 동쪽으
로 남자, 주인, 임금, 명예 등을 표상하고 백호는 해 지는 서쪽으로 여자, 손님, 신하, 재물을 표상하는
것으로 풀이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단지 무대에 지나지 않는 땅
에 책임을 미룰 일이 아닌 것이다. 자생풍수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합리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비보인
데 그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만월대에서 개성 시내를 내려다 보면 남동쪽으로 시내 가운데 자남산이 있다. 현재<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거기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곳은 개성 시내의 중심이자 안산이기
도 하다. 마치 서울의 남산 같은 역할을 하는 산이란 뜻이다. 본래 만월대의 풍수적 형국은 '늙은 쥐가
밭에 내려온 격'이다. 그런데 자남산이 그 늙은 쥐의 아들 쥐에 해당된다는 것이 문제의 출발이다. 자는
십이지로하여 쥐이고 아들이란 의미도 있지 않은가.
이 아들 쥐가 부모 품을 떠나려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들 쥐를 편안하게
해주어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책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풍수에서 말하는 '오수부동
격의 비보책'인 것이다. 먼저 자남산 앞에 고양이를 세워 쥐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낸다면 고양이 앞에 쥐 같은 형세라 아들 쥐가 불안할 것이다. 따라서 그 고양이를 견제할 개를 만들
고 개를 제압할 수 있는 호랑이를 세우며 호랑이가 마음 놓고 날뛰지 못하도록 코끼리를 만드는 것이
다. 한데 묘하게도 코끼리는 쥐를 무서워 한다. 이렇게하여 다섯 짐승이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모두 안정
을 취하고 궁극적으로는 자남산을 안정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내 한가운데 있는 자남산은 산이라 부르기도 쑥스러운 작은 둔덕에 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빙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 진봉산, 용수산, 오공산, 부흥산 등은 험악한 형상의
높은 산들이다. 개성 시내 거주민들이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위용을 갖춘 산이란 뜻이다. 자신들 거
주지의 지표 상징물(landmark)인 자남산이 주위에 압도당하는 형세라면 환경 심리적으로 위축될 것은
합리적인 추론일 수밖에 없다. 그를 풍수적으로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오수부동격의 풍
수비보책인 것이다.
개성 시내에 있는 고양이우물, 개바위, 코끼리바위, 호랑이샘, 쥐산 등의 지명은 바로 그 흔적인 셈이
다. 만월대를 안내하던 노인도 코끼리바위와 개바위는 알고 있었다.
松都周邊의 名山들 地圖보기
開城 이야기5北城岐와南城岐
※ 시조 장경공 최사전의 묘지(墓誌)에 "성남장미산록 와곡"에 안장되셨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맘으로 개성의 산을 검색 해 보았습니다
높게는 764m에서 낮게는76m 까지, 그보다 더 낮은 뒷동산까지 다 나와있는데
현재 개성에 장미산(薔薇山)은 없네요.
집안 어르신의 조언대로 "성의 남쪽 장미산 자락(기슭) 기와굽는 골"로 가정하면
개성의 남쪽인 곳은 파주시와 김포군 인데 두 시,군을 검색해보아도 장미산은 없습니다.
학창시절 국사선생님이 "역사는 50% 이상이 뻥이다"라고 하시면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역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왜냐하면 그 시대에 살지않았기때문에... 라는 말씀을
곧잘 하셨는데 지금 우리는 약 천년전 묘의 진위 여부를 놓고 탐진인들끼리
설전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묘지(墓誌)에 선대가 탐진현 사람이라고 했으니 여기에 대한 답을 개성으로
못박지 말고 탐진(강진)과 병행해서 찾아야 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짧은 카페 활동중 왠지 이편 저편으로 갈라 서있는 모습을 보고 탐진인으로 살아가는데
안타까운 마음에서 몇자 적었습니다)
위쪽 개성 이야기를 클릭하면
개성에 대한 재미있는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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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게요..관심 감사합니다..개성 부근 높지 않은 산 중에 있을 수도 있고..아니면 개성이 아닌 다른 지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고려시대의 독특한 매장법을 고려했을때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