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중규 郭重奎 (1891 ~ 1950)] "윤봉길 의사 의거의 숨겨진 조력자"
1891년 11월 16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백지리(白池里)에서 의병 출신인 아버지 곽준희(郭俊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곽헌(郭憲)·곽송원(郭松園)·곽사평(郭士平)·곽석귀(郭錫貴) 등을 사용하였다. 부친 곽준희는 1907년 충북 옥천에서 거의한 장운식(張雲植)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수합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1909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의병활동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한 부친 곽준희를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자주 독립의 뜻을 키웠다.
부친 곽준희(곽경희)는 1870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일제가 강제로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켜 사실상 강탈하자 장운식(張雲植)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곽준희는 이 의진에서 주로 군수품 수합 임무를 맡아 활동하던 중 1909년 3월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곽중규 공판 보도(『동아일보』 1933.12.6) [판형2] |
의병 활동에 참여한 아버지를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갖고 자주독립의 뜻을 키웠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미국 선교사들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29세가 되는 1919년 3월 고향인 옥천군 이원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복역하였다. 1921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비서로 취임하였다가 곧 비서장으로 승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 상하이에 있는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사가 되어 민족 교육에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18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나창헌(羅昌憲)·최석순(崔錫淳)·강창제(姜昌濟) 등과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탄핵하는 의안을 제출, 탄핵심사위원이 되어 면직 처리하였다. 1926년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명성사진관을 개업하여 비밀 연락 장소로 제공하였다. 명성사진관은 1931년 9월 윤봉길(尹奉吉)의 은신처로 사용되었고, 동생 곽중선(郭重善)은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 등 정보를 수집해 전달하는 사전 작업으로 의거를 도왔다.
192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 내로 이사한 곽중규는 그의 경험을 살려 성광(星光)사진관을 개업한 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의 비밀장소로 제공하였다. 1931년 9월부터 윤봉길을 사진관이 있는 건물에 은신 기숙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등 장차 거사를 위해 은밀히 대비케 하였다.
곽중규의 손자 곽태민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곽중규의 아들, 고 곽성호)가 상하이의 사진관에서 살 때 어떤 젊은 남자가 함께 살았었는데 홍커우공원 거사 후 그분이 윤봉길 의사였음을 알았다"고 회술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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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일경의 검색이 극심해지자 이를 피하여 난징, 한커우 등지를 경유하여 충칭으로 가 머무르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1933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밀정의 제보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7년 10월 상하이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 선거에서 단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 1929년 8월 사임하였다. 1927년 전민족유일독립당촉성회(全民族唯一獨立黨促成會) 간부로, 1929년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중국공산당 장쑤성(江蘇省) 파난구(法南區) 한인지부에 가입해 조직부장으로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주사변이 발생한 뒤인 1931년 11월부터 임시의정원의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하고자 충칭(重慶)으로 갔다가 1933년 4월 귀환하였다. 상하이에서 은신하던 중 밀정의 제보를 받은 일본 총영사관 소속 경찰에게 조봉암(曺奉岩)·김명시(金明時) 등과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조선단일공산당사건으로 붙잡혔다. 신의주로 압송되어 그해 12월 신의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톈진(天津)에 머물며 상하이와 연락을 취하던 중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서 활동 중이던 동생 곽중선이 그해 9월 일제 밀정의 총격으로 서거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이후 스자좡(石家莊)으로 이주하여 광복 직전까지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