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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행할지니
독일 뒤셀도르프교회의 강단은 성령강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교회로 유명하다. 큰 벽 가득히 덮은 그물망 틈새로 붉은 밧줄을 사이사이 ‘V’자 모양으로 엮었다. 마치 하늘에서 비둘기가 하강하듯 수많은 불꽃이 내려앉은 모습이 장엄하다. 성경은 성령의 모습을 “비둘기 같이”(마 3:16) 또는 “불의 혀처럼”(행 2:3) 묘사하였다.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사건이다. 성경에서 영(靈)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입김, 호흡, 바람, 폭풍’ 등이다. 그 신비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단지 상징적 언어로 언급할 뿐이다. 예를 들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든지, 불꽃 형태로 나타났다든지 한 것이 좋은 보기이다.
제10차 WCC 부산 총회는 강단에 루마니아정교회가 제작한 성령강림 이콘을 설치하였다. 열두 명의 제자 각각 머리 위를 향해 불꽃이 하나씩 내려앉은 모습이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에도 ‘성령강림절’(das Pfingstfest) 작품이 있다. 12세기 작품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비둘기 입에서 구름을 뚫고 내리는 성령이나, 성령을 상징화한 불꽃이 모든 제자들 머리 위에 각각 내려앉은 모습은 두 작품 모두 일치한다.
그런데 12세기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망과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를 하고 있다. 입술 모양은 삐죽하게 아래로 처져 있다.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 제자들의 의심은 갈 길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당시 시대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이다. 12세기는 그리스도교가 유럽에서 한창 번성했던 중세기였다.
교회는 자신을 황금으로 치장할 만큼 부유해졌으나, 그 화려한 교회 안에 성령의 감동이 없었다. 이 작품은 성령이 없는 교회는 곧 죽은 교회와 같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로 성령 부재의 시대를 비판한 것이다. 13세기 대표적 신학자이며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초대 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너무 많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비록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은 유일회적 사건이지만, 역사적으로 성령 체험은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산 증거로 나타난다. 그리고 성령강림은 영적인 성장과 내면적 성숙을 꾀하면서, 교회 안팎으로 생기가 넘치게 한다. 교회력의 순환으로 보나, 초록이 우거지는 절기로 보나, 이처럼 성령강림절기는 생명의 풍성함을 돕는 기간이다.
성령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으로 일하신다. 그리고 강력한 증거는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새번역, 갈 5:22-23)라는 열매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를 위해 극복해야 할 것이 많다. 성령의 열매에 앞서 먼저 극복해야 할 ‘육체의 일’(갈 5:19-21)이다. 15가지로 제시한 잘못된 성윤리, 우상화, 인간 사이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구체적이다. 성령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게 하신다.
성령강림절은성령강림 ‘주일’부터 교회력의 끝 ‘주일’(영원한 주일)까지 모두 23-28주 기간 동안 이어진다. 그 길이가 무려 1년의 절반에 이르니, 성령의 은혜는 매일, 매 순간 한결같은 믿음의 길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예배를 마치면서 회중을 향해 베푸는 축복문(고후 13:13)처럼, 성령의 교통하심(Communion of Holy Spirit)은 날마다 우리와 함께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진실한 삶의 모습은 초대교회가 보여주듯 제자의 길을 통해 오롯이 드러날 것이다. 바로 ‘변화, 새로움, 각성, 용기, 공감, 연대, 생명, 헌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이다. 오늘과 평생,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성령의 내주(內住)하심과 충만(充滿)하심을 구하는 일은 일상적 간구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