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등학교 학생 시절
한돈희
초등학교 학생시절은 철이 없는 시절 이다. 생각하면 좋은 추억거리가 많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초등학교’라는 말은 안 쓰고 ‘국민학교’라고 하였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금성초등학교와 삼산초등학교이다. 금성초등학교는 황해도 연안 온천에 있는 학교이다. 이북에 있고 6.25 전쟁 때 비행기 폭격을 맞아서 불에 타버렸다. 북한 사람들이 학교를 세워서 아직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삼산초등학교는 강화도 삼산면(석모도)에 있는 학교이다. 지금도 그 학교는 있고 가서 볼 수가 있다. 나는 6.25 전쟁 때문에 두 군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는 금성초등학교 4학년 때에 전쟁이 일어나서 중간에 못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동무들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담임선생님도 어떤 분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학년 때인가 키가 크고 착한 선생님이 전근을 가서 학생들이 슬퍼한 기억이 있다. 머리에 입력이 안 되었는지 학교생활 중에 인상에 남을 일이 없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삼산초등학교는 5.6학년을 다니었다. 나이도 들고 지능도 발달해서 생각하면 학교생활이 머리에 다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처음으로 삼산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이 인천에서 있었다. 담임선생님도 만나보았고 동창생들도 만나보았다. 그때도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동창들은 모습이 변해있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동창들도 나이가 80전후가 되고 죽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연안 온천에서 살 때 어린 시절을 보내며 보고, 듣고, 생활하던 일들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연안 온천에는 허름한 온천탕이 하나가 있었다. 어려서는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목욕탕을 가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였다. 현금을 내지 않고 가을에 쌀로 목욕료를 지불하였다. 강화 교동에 사는 이모 등 친척들이 우리 집에 와서 묵으며 목욕탕을 다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온천수가 피부 미용, 피부건강에 좋아서 사람들이 찾아 왔다. 노인이 되면 온천을 더 찾는다.
연안 온천에서는 논을 파면 토탄이 나와서 벽돌처럼 만들어 집 근처에 쌓아놓고 말려서 겨울에 난방용으로 이용하였다.
내가 살던 곳은 연백평야로 쌀이 많이 나는 곡창지대이다. 이북에는 곡창지대가 없어서 전쟁 때 연백평야를 탐을 내고 인민군이 점령하고 사수해서 이남 땅을 이북 땅으로 만들었다. 개성, 연백군은 원래가 이남 땅 이었다. 지금은 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누었다고 한다.
6.25전쟁이 없었다면 내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골에서 자라 시골학교에 다니고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전쟁으로 강화, 인천으로 피난을 나오고 인천에서 중, 고등학교에 다니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인천, 부천, 서울을 무대로 평생 살게 되었다. 아내도 인천 사람이다. 연안 온천은 부천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가면 2-3시간 거리인데 남, 북이 갈려서 못 가고 있다. 세계여행을 다니는 시대인데 먼 나라 같기 만 하다. 가서 본다고 하더라도 아는 사람도 없고 허망할 것이고 어려서 보던 고향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집은 농사도 짓고 장사도하였다. 집도 근사하게 새로 지어서 살았다. 먹고 사는데 걱정 없이 살았다.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금성초등학교가 있었다. 목조건물인데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학교이다. 학교 주위에는 아카시아나무가 무성하였다. 나무에는 참새들이 많아서 짹짹거리었다. 나는 학교에 가서 고무줄 새총으로 새를 잡았다. 밤에는 초가집 처마에 있는 새집을 쑤셔 새를 잡았다. 여름이면 강이나 내(수로)로 수영을 갔다. 한 때는 이북에서 이남으로 물을 보내주어서 어떤 때는 내에 물이 넘치도록 내려왔다. 나는 산으로 들로 냇가로 다니며 잠자리 잡고 메뚜기 잡고 물고기를 잡았다. 비가 많이 오면 물고기들이 길바닥 위에 있었다. 달 밝은 밤에는 동네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였다. 어린 시절은 행복하였다.
나는 어려서 교회 유년주일학교에 다니었다. 추수감사절 때는 쌀을 봉지에 담아 바치었다. 집에서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목사가 되라는 말도 하였다. 6.25 날도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릴 때 포성이 들려왔다. 오후에는 길거리에 피난민들이 이고 지고 남쪽으로 갔다.
6.25 전쟁은 3년 이상 계속되었다. 인민군들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섬이나 시골 등으로 피신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섬으로 피난을 갔다. 돌아와 보니 다른 세상이 되었다. 학교에 가보면 김일성장군 노래를 가르치고 저녁에는 시가행진을 하게 하였다. 어른들은 숨어서 살기도 하고 김일성 치하에서 불안 해 하였다. 미군 비행기가 뜬 것을 보고 기대감을 가졌다.
미군, 유엔군이 들어와서 인민군을 몰아내니 해방이 되었다. 어린 나도 수복이 되어서 좋았다. 숨어살던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나왔다. 미군들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내고 미국으로 간다고 하였는데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려왔다.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였으나 중공군이 넘어오는 것에는 대비를 못하여서 통일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4후퇴 때에는 땅이나 집이 아까운 사람은 남으로 피난을 나오지를 못하였다. 남으로 가서 의지 할 데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주저앉았다. 노인들을 남겨 놓고 온 사람들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재산을 포기하고 온 식구가 순차적으로 강화 삼산으로 피난을 나왔다. 삼산에는 할아버지와 삼촌이 살았다. 여러 대 조상이 살던 곳이다. 우리 가족은 상리 마을에 초라한 시골집을 사서 살았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문을 열었다. 나는 다시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삼산초등학교이다. 상리에서 돌모루에 있는 학교까지 10리 인데 한 시간 정도 걸어서 학교를 다니었다. 학교는 한 학년에 두 반씩 있었다. 작은 학교는 아니다. 나는 5학년 6학년을 다니었다. 2년간 강태희 선생님이 가르쳤다. 선생님은 20대 전후의 젊은 분인데 열심히 가르쳐서 학생들을 중학교에 붙이려고 노력한 분이다. 그때는 국군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던 시절이다. 잉크로 편지를 썼다. 교실 뒤에 게시판에는 내가 그린 군함이 전시 되었다. 그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점심을 먹어 보지 못하였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이다. 피난민들은 외국에서 원조하여 주는 구호양곡을 받아 연명하며 살아갔다.
서울이 수복 된 후로는 피난민들이 인천, 서울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내 아버지, 어머니도 인천으로 돈 벌러 떠났다. 할머니가 삼산에서 나와 내 동생들을 키웠다. 할머니는 작은 할머니인데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가서 평생 모시였다.
나는 전쟁이 났어도 가난하게 살았어도 철없던 시절이라 걱정을 모르고 즐겁게 지냈다.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던 일도 즐겁고 사면이 바다여서 여름에는 수시로 바다로 가서 수영을 하였다. 망둥이 낚시도 잘 다니었다. 상주산 고개 넘어 ‘연무골’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었다. 거기에 조상 산, 선산이 있었는데 시조할아버지 산소도 보고 많은 조상 무덤도 보았다. 그 산을 헤매 돌아다니었다. 지금은 군부대가 있어서 가지 않고 있다. 조상 산소에 벌초를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잘 먹지 못하였으나 산으로 들로 바다로 다니며 논 덕택으로 건강하게 자랐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수영을 좋아하는 데 어린 시절 섬에서 자라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한 때문이다.
6학년 때는 강화읍으로 가서 중학교 입학을 위한 국가고시를 보러갔다. 성적이 잘 나와야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졸업사은회, 졸업식도 지나갔다. 나는 삼산초등하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와서 중학교에 들어갔다. 지금 나와 내 동생들 모두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막내는 어머니가 전쟁 중에 낳은 아들인데 65세이다. 그는 딸들을 시집을 보냈다. 형제와 자매 다섯 명이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상리에 있는 초가집은 벽지도 없는 흙벽인 데 여름에는 빈대, 벼룩이 공격해 와서 잠을 방해 하였다. 초가 담장에는 호박넝쿨이 무성하였다. 호박이 열리면 그날 반찬 이다. 구렁이가 담장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구렁이가 인사하는 듯 친숙하였다. 처마에서 큰 뱀이 땅에 떨어져 놀란 일도 있다. 언젠가 상리에 가서 살던 초가집을 찾아보니 허물어 져서 없어졌다.
인천에서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었을 때는 6학년 1반 2반 졸업생이 모였다. 동창들은 늙고 변하였다. 강태희 선생님도 졸업 후 처음 만났다. 초등학교 졸업사은회 때 강 선생님이 부른 노래를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베싸메무쵸' 노래이다. 동창회 때에도 강 선생님이 이 노래를 부르자 모두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 후 내가 ‘초등학교 동창회’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글을 발표하였다. 내가 당곡고등학교 교사일 때이다. 내가 아침조회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알고 우리 담임선생님 글 잘 쓰는 선생님이라고 박수를 쳐 주고 웃고 한 일이 있었다.
한돈희
본회 회원, 시조시인, 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부천문인협회 회원
(수필, 문학서울 2020 제23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