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종종 압제 아래 번창했으며 번영 아래서는 쇠약해졌다/ 마이클 호튼
우리가 1920년대로 되돌아가 볼 때, 그 당시 근본주의에는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하나는 메이첸의 세계를 긍정하는 정통주의였으며, 다른 하나는 세계를 부인하는 프론티어의 부흥 운동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이 후자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을 때, 고급 문화보다는 대중문화에 빠져들었으며, 장기적인 철학적, 지성적, 문화적 영향보다는 흘러가는 유행에 빠져들게 되었다.
1986년에 루이스 해리스가 경고했다시피, 우파 기독교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반발은 문화 전쟁의 무대를 마련해 놓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세속적이며 노골적으로 반종교적인 이 나라의 많은 여론 형성자들(교육가들과 사상가들과 작가들과 미디어 관계자들과 저널리스트들로 이루어진 ‘신계층’)은 ‘미국을 되찾자’에 대해 거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을 가능한 한 어저리로 몰아 내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청교도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배움에 대한 사랑과 이 세상과 문화를 단순히 구속해야 할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로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이런 근본적인 성향이 바뀌지 않는 한, 복음주의자들은 영원히 인기 있는 스타가 대중 문화계에서 행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따라잡으려고 기를 쓰는 일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 세속적인 해결책들에 대해 거의 맹신하고 있다시피, 마케팅 방법들을 통해 세속주의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들을 발견하려는 그 노력에서도 이런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체적인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틀도 없이 복음주의는 세속화와 싸우기 위하여 세속적인 방법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 운동은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개념들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마음(지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도 모르게 세상의 패턴에 맞추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 예일, 다트머스, 프린스턴, 브라운, 여러 위대한 학문의 중심지들은 정통 개신교가 세운 것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청교도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적 부흥과 물질적인 회복을 꾀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앙은 우리가 바흐와 헨델, 렘브란트와 뒤러, 멘델스존, 존 밀턴, 허버트, 존 번연 및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급 문화’의 천재들에게 깊은 영성을 심어 주었다. 그것은 복음이 개개인의 소명 의식과 모든 노동에 대한 신성한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세상을 포용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정통 개신교도들은 그들 자신이 신학을 고수했을 때는 ‘문화적 엘리트’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일관성 있는 신학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면서 ‘문화적인 엘리트’가 되는 일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령 사업에 몰두했으며, 지성과 육체의 불협화음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문화에 생겨난 그와 같은 공백을 뭔가가 채워 주어야 했다. 그래서 뭔가가, 아니 모든 것이 밀려와서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자리를 회수하기를 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의 모습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소외와 적대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반발을 일으켜서 불신자들을 향해서 정의와 의로운 관계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들만이 아니라 복음 진리와 나머지 성경 계시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회로 하여금 귀 기울이게 만들기가 훨씬 어렵게 될 것이다. 현재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는 노선은 바라는 결과들을 결코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그 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다.
기독교는 문화가 아니다. 거의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유대 랍비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독교는 확실한 역사적 사건들의 진리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유일한 종교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죄인들을 위해 행하신 그분의 사역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며, 그 기록을 오는 세대마다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복음은 다양한 문화 가운데서 승계되었다. 로마의 속령이 되었던 근동지방에서, 소아시아와 서방의 위대한 도시들에서, 남태평양의 섬들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복음은 이어져 전해졌다. 복음은 종종 압제 아래 번창했으며 번영 아래서는 쇠약해졌다. 사실상, 하나님 나라의 개진은 결코 이 세상 여러 민족을- 그 국가가 전체주위적인 공산주의 국가이든지 혹은 민주적인 자본주의든지 간에 막론하고- 의존하지 않는다. 복음은 엄청나게 다른 가치관과 사회적 관습들을 유지하고 있는 집단 가운데서도 번성해 왔다. 그리하여 복음은 자유 시장 실업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도 하나님과 화목케 만들었다.
기독교 우파의 한 지도자의 말이다. “그가 찬송가를 부르면서 울든지 울지 않든지 나는 개의치 않소, 내 관심은 낙태에 대한 당신의 입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요.” 나의 대답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의 질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 질문은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그 물음이 아직도 예수님이 묻고 계신 질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늘날 교리적인 맥락에서 정의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기독교는 체험적인 맥락이나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맥락에서 정의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곳으로 정의되고 있는 예는 아주 드물다. 결국, 이기고 보아야 할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교리라는 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양편 어느 쪽에서도 말장난들을 포기하고 좀더 성숙한 성찰로 나아가기를 원치 않고 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도덕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테스트로 대치해 버렸다. 오늘날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끈은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이지, 교리가 아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말이다. “미국에서는 많은 교회에 미국 성조기가 세워져 있다. --- 애국적인 충성을 기독교와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 충성이 정치적인 충성이든지, 국가적인 것이든지, 민족적이든지 간에, 어떤 다른 충성을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그 충성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우리의 메시지를 기성의 중산층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이런 일은 우리의 정치 탓에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에 대항하도록 만들 뿐이다.-우리의 종교개혁의 유산이 가지고 있었던 상실된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역사는 기독교 진리와 그 진리의 절대적인 가치들에 대한 호소들이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쉽게 오용되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엄청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성경의 분명한 윤리적 명령들을 보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백인 중심의 중산층적 가치들을 보전하는 것과 훨씬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복음주의는 오늘날 문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사회의 어던 일부의, 그 일부를 위한, 그 일부에 의한 전통적인 가치를 수호하려는 운동이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3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