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군중들이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보기 시작했고 물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구원하신 사건은 메시아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이때 군중들이 예수님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핵심은 아무리 체험이 많고 기적을 많이 봤다 할지라도 자기 중심성이 깨지지 않으면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성은 교만이기에 자아가 깨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될 수 없습니다. 내 중심이 깨지고 예수님 중심으로 변하면 그게 믿음입니다.
세상의 중심이 나인 사람은 결코 믿음으로 살 수 없습니다. 본문은 중심 이동 없이 기적을 찾아 헤매는 무리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무리는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이 타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었기에 다음날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있는 건너편으로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22-25).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봐야만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상태와 관계없이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랜 신앙의 경험을 통해 자아가 깨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압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기 컨디션이 좋으면 의기양양하고 컨디션이 나쁘면 의기소침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동물적이어서 두려워하거나 욕심을 추구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이런 사람은 본능적인 반응을 하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기에 우리는 자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 썩는 양식은 먹어도 다시 배가 고프고 먹어도 결국 죽습니다. 육체만을 유지하는 것이기에 썩을 양식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감각적인 삶에 대한 예수님의 문제 제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믿을 표적을 구합니다(30). 그들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는데 이 떡을 항상 먹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그것도 땅의 것이기에 썩을 양식이고 먹고도 죽는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여기서 믿는 자와 동의어는 먹는 자입니다. 내 몸 밖에 있는 떡을 먹으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입니다(갈2:20). 이것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 되시면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고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빌3:8, 9).
우리나라에서 먹는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나이를 첨한다(=더한다)고 말하고 일본사람들은 취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와 우리는 일체감이 있습니다. 20세의 나와 50세의 나는 똑같지 않습니다. 나이로서 그 사람이 하나의 인격이 된 것이라 나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먹으면 예수님과 나는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입니다.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 이 성찬의 개념이 하나됨입니다. 우리는 결단한 상태를 마음 먹었다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이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이 마음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먹어버린 것이면 이제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쁜 의미로도 부정한 돈, 뇌물을 받았음을 돈 먹었다고 표현합니다. 더러운 돈을 먹었기에 더러워진 것입니다. 욕도 먹으니까 욕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챔피언도 먹었다고 표현합니다(홍수환). 이 사람은 할아버지가 되어도 챔피언입니다. 겁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겁도 먹으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또 말이 먹힌다고 표현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여서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어 말씀과 일체가 되면 중심이 내가 아닌 말씀이 됩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면 할 수 있는 것은 순종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신뢰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일체가 되려면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는 것이고 먹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29).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로 인해 상하고 찔리고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대속해 주심이 나의 속죄로 주어지고, 주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고, 그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셔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중심이 원하는 것만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노련한 사람은 무게 중심이 어디 있는지를 보기에 속지 않습니다. 모여서 자기 의도를 관철하려는 모임은 하나님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곳이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중심을 보는 눈이 영적인 눈입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믿음을 본문엔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일체가 되고 예수님이 주인 되십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으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며 믿음, 소망, 사랑이 다 생깁니다(3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