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 문학 최후의 리얼리스트
러시아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이반 부닌의
시간과 기억, 사랑과 죽음을 노래한 예술적 전기
엄격한 예술성으로 러시아 고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한 작가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이반 부닌은 1870년 중부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태어났다. 부닌은 중부 러시아의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자연에 대한 애정과 시적 서정성을 키웠고, 어린 시절부터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시를 읽고 따라 썼다. 페테르부르크 신문 <조국>에 시와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해 번역과 시 창작에 몰두했다. 『열린 하늘 아래에서』 『낙엽』 등 부닌의 시는 당대 비평가들에게 “정확하고 생생한 자연의 감촉과 묘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마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등 중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다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룬 러시아 작가에게 수여하는 푸시킨상을 두 번에 걸쳐 받았다. 1918년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여 프랑스로 망명했고 195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이반 부닌은 1933년 러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엄격한 예술성으로 러시아 고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한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본 것을 가장 정확하고 진실하게 그려낸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해 망명한 이후 부닌의 작품은 한동안 러시아에서 출판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마저 금지되었다. 부닌을 ‘불온한 작가’로 일컬으며 이루어진 다분히 이념 편향적인 당시의 연구 탓에 작가 이반 부닌에 대한 평가는 적지 않은 부분에서 왜곡되거나 폄하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부닌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부닌은 쉰 살이 되던 1920년에 ‘내 삶에 대한 책’의 집필을 구상하고 1927년 본격적인 집필에 착수한 작품으로, 1933년에야 완성되어 우여곡절 끝에 최초의 완전한 판본이 출간되었다. 망명시기에 쓰인 이 작품은 서정적이며 시적인 부닌의 필치와 투명하고 생생한 자연 묘사, 인생의 보편적 요소에 대한 통찰이 잘 어우러진, 부닌의 작품세계가 집약된 대표작으로 꼽힌다.
준準자전적 소설이자 예술적 전기
“전혀 다른 것, 내가 쓸 수 있었고 써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 즉 내가 쓸 수 없었던 것을 쓰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아르세니예프는 청년 시절 창작에 몰두하던 부닌의 모습과 겹쳐진다. 아르세니예프의 삶의 양태 역시 부닌의 삶의 궤적과 무척 닮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고요한 시선으로 러시아의 자연을 관찰하는 아르세니예프는 부닌과 마찬가지로 커가며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으로 문학에 탐닉한다. 획일화된 교육 제도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중학생 시절, 수업시간에 『오디세이아』를 읽다 걸려 크게 혼이 나면서 “제게 소리치지 마시고, ‘너’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 아이가 아닙니다” 하고 대꾸하는 아르세니예프는 부닌이 『일리아스』를 몰래 읽다 선생님께 혼이 나자 진지하고 침착한 태도로 “저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부닌은 아르세니예프라는 자전적 인물을 만들어 망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듯하다. 존재의 시원, 어린 시절과 나와 타자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청소년기, 리카와의 황홀한 사랑과 이별에 따른 비애를 느끼는 청년기를 회상하며, 떠오르는 희미한 장면들을 받아쓴 것 같은 이 작품에는 작가인 부닌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이 많은 부분 스며 있다. 아르세니예프의 다정한 어머니와 태평하지만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버지,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실제 부닌의 가족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형이 체포되는 사건과 여동생의 죽음과 같은 사건 역시 부닌 가족이 실제로 겪은 일들이다.
부닌은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이 자전적 소설이라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소설의 자전적 요소에 중점을 두고 논의하는 것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지만, 작가 자신의 인생과 경험이 오롯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부닌의 준準자전적 소설이자 예술적 전기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나간 시간의 슬픔과 매혹,
그 찬란한 기억의 편린들에 대하여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러시아 중부 지방의 몰락한 귀족 출신인 아르세니예프가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밀려드는 기억의 편린들을 써내려가는 듯한 구성을 취한다. 뿌연 안개를 헤치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부닌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풍광은 보는 이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들판이 굽이치는 삼림지대와 초원, 작은 계곡과 산비탈, 풀 향기가 스며든 뜨거운 바람, 창을 통해 바라본 가을달, 소복하게 쌓여 있는 하얀 눈과 눈석임 등을 바라보는 부닌의 섬세한 시선과 투명한 필치는 러시아 중부 마을의 전원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며, 독자들로 하여금 아르세니예프의 삶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부닌은 아르세니예프라는 자전적 인물을 통해 이미 지나가버린 자신의 유년 시절로, 그 무한한 자연으로 회귀한다. 작품 초고에 붙여진 ‘나날의 근원’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아르세니예프에게 과거의 시간은 기억되는 한 지나간 시간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에 끊임없는 영향을 미친다. 기억을 통해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적 의미를 부단히 탐구하는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부닌에게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요한 테마다. 아르세니예프는 여동생과 할머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죽음과 청년 시절 사귀었던 연인들과의 사랑을 통해 실존의 문제에 가닿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된다. 특히 리카와의 만남은 아르세니예프의 젊은 날을 지배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사건 중 하나다. 사랑의 설렘과 이별의 비애는 부닌의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문장으로 더욱 생생히 살아난다.
부닌은 이 작품을 준비하던 당시 일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고, 이 책 속에 나의 영혼을 토로하고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 세상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미워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썼다. 부닌의 작품에서 저녁놀, 아침이슬, 어스름, 고요, 끝없는 초원의 묘사에 애정이 묻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부닌은 죽음이나 이별로 인해 비극적이고 참담한 슬픔에 몇 번이고 직면하면서도, 삶과 사랑이 하나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닌에게 사랑이 없는 삶은 죽음과 같고,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