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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본문에 에스더의 고백처럼 "화 당함을 차마 보리이까"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74주년이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사망자는 우리나라가 38만 3천 명 정도이고 북한은 52만 명입니다. 연합군은 5만 8천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중공군은 13만 6천 명이 죽었습니다. 전체 110만 명 정도 희생되었고 실종자가 200만 명이 넘습니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미개인으로 취급받는 식인종도 부족끼리 싸움을 하면 웬만해선 죽이지 않는답니다. 죽여도 그들이 먹을 만큼만 죽인답니다. 식인종이 선교사들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질문한답니다. “당신들도 사람을 먹습니까?” 선교사가 “절대 안 먹는다”고 하니 다시 묻습니다. “먹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6월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달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나라가 망하면 개인의 평안도,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때에 그 은혜를 알고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눅19:44입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보살핌 받고 있다는 단어가 ‘에피스코페’인데 ‘감찰하다, 보살피다, 권고하다’라는 뜻입니다. 보살피시는 은혜를 알지 못하면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유대민족이 바벨론제국에 의해 패망하고(B.C586년) 바벨론은 다시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멸망했는데(B.C 538년) 자연스레 유대민족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제국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여인입니다. 성경에는 아하수에로라고 이름하지만 고대역사의 문헌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로 불리는 왕입니다. 그 유명한 살라미스해전에서(B.C 480년) 패한 왕입니다. 이보다 앞선 마라톤 전투는(B.C 490년)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리오스왕 때입니다. 에스더는 포로로 끌려간 아이가 이후에 대제국의 왕후가 된 것입니다. 왕후니까 물론 예뻤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쁘게 태어난 것도 그녀가 받은 큰 축복입니다.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도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태어날 때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아야 할 은혜가 참 많습니다. 더 많습니다.
에스더는 그녀의 일생에 세 번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먼저 2:17절을 보면 왕의 사랑을 받은 은혜입니다. 왕후가 된 것입니다. 당시의 표현대로라면 왕에게 큰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여인으로서 받은 은총중의 최고의 은총입니다. 혹시 그깟 왕후 자리 줘도 안 하겠다는 사람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전에 2:9을 보면 왕의 신하 헤개에게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왕후가 되기 위한 길에 그녀가 받은 은혜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좋게 여겨 함께 하자고 하면 분명한 은혜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랑을 받고 선대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처음부터 선입관을 가지고 본다거나 매사에 잘못된 점만 찾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만남의 축복!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부모를 일찍 여의였으나 모르드개로부터 딸 같이 양육을 받았습니다. 2:7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삼촌 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사촌동생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고 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사촌오빠가 앵벌이 안 시키고 딸같이 여겨 키워 준 것은 고맙고 큰 은혜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받고 은총 받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지나온 길마다 담을 쌓고 만나는 사람마다 원수가 되는 사람들보다 헤어지면 또 보고 싶어 그리워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잘 사는 것입니다. 높은 명예나 지위를 얻지 못해도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덕이 있고 어질고 인자하고 배려할 줄 알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합니다. 경우도, 예의도 없는 사람, 성질 다 부리는 사람, 할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관계가 불편하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총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십시오. 에스더가 왕의 사랑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고 하나님께 사랑받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사람에게도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16:7에 보시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은혜 받으면 사람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게 합니다. 요셉과 느헤미야, 다니엘과 에스더가 이를 증거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이런 은총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있을 때 그 민족에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총리 하만이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시비거리로 삼아 결국 모르드개만 아니라 그의 민족을 몰살시키려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후에게 민족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상황을 알리고 나서 이렇게 전합니다. 4장 13,14절입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지금 너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 예비한 자리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자리라는 게, 권세라는 게, 가진 것이 있다는 이것이 주님을 위해 쓰임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도리어 믿음을 떨어지게 만들고 하나님께로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거리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재물은 주께서 필요로 하실 때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주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있게 하는 최고의 걸림돌도 됩니다. 직장도, 사업도, 건강도, 자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통과해야 하나님이 더 큰 일도 맡기고 더 많은 것도 맡기고 더 귀한 직책도 맡기고 더 크게 쓰시는 것입니다.
ㄱ. 이때 에스더의 첫 번째 고백을 보십시오. 4장17절에 보시면 왕에게 나가기 전의 결심입니다. 왕이 찾지 않은데도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때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합니다. 죽음을 각오합니다. 민족을 살리는 일에 목숨을 기어이 걸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민족이 살 길이라면 기꺼이 자리도, 직위도,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겠다는 용기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러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ㄴ.그리고 두 번째 고백은 7장 3절에 보시면 에스더가 이제 왕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에스더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내 민족을 나와 함께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 위기를 얼마든지 모른 척 하고 혼자 살아남고 편히 살 수 있지만 그는 기어이 민족과 함께 살고 죽기를 같이 하기로 결심합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한 것처럼 에스더도 페르시아의 왕후로서 누리는 부귀와 영화보다 민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자기 형제와 자매, 동포와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애국, 애족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ㄷ.세 번째 고백은 에스더의 이러한 요구가 어디서 출발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8장 6절에 보시면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라고 합니다. 도무지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민족이 당하는 고통을 못 본 척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른 척, 못 본 척, 안 본 척 하고 지나갈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귀 막고 눈 막고 입 막고 살아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누가 이런 소리 저런 오해하고 흠담하고 비방해도 모른 척,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할 게 많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모른 척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나서야 할 때, 바로 잡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에스더처럼 민족이 멸망하게 되었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더는 이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당당히 나섰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자기 민족의 살 길을 찾아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민족을 향한 에스더의 사랑과 용기가 그녀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그녀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우연 같은 필연이 일어나고 마침내 상황이 역전되어 대적 하만을 이기고 민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에스더를 통해 민족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할렐루야!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에스더와 같은 고백이 성경에 몇 번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은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다 물이 다 떨어져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창21:15,16입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부르짖는 어머니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곱 번이나 기도합니다. 그 성에 조카 롯이 살고 있는데 그 성을 멸하시겠다니 아브라함도 차마 보고만 있지 못하여 엎드려 기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도 응답하셨습니다. 창19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말씀대로 소돔성은 멸하셨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를 듣고 롯은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죄로 말미암아 멸망으로 향해 가는 인류를 차마 볼 수 없어 이 땅에 기꺼이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만 아니라 죽음을 위해 오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질 것을 작정하시고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선한 목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자는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마20:28). 에스더가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내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빼앗기지 않도록 내 이름으로 보존하여 지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에스더의 정신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정신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듯 형제를, 자매를,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므로 무너지게 된 것을, 거짓에 물들어가는 것을, 시련과 고난이 닥치게 될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기도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나라를 우리 후손들에게 좋은 나라,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더 신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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