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장터길’ (보물 527호, 39.7×26.7cm,1745~1816년 이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한 무리의 가마 행렬을 그린 것이다. 앞서 가는 소와 가운데에 있는 말등에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장터에서 물건을 다 팔고 돌아가는 길인 듯하다. 장사가 잘되었는지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한 느낌이다.
사람 냄새 가을 냄새 넉넉한, 시장의 재발견
가을은 후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서늘하게 잘 말라 향기로운 흙냄새에 온갖 과실이 농밀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가득하고, 들판에 지천인 곡식도 알이 통통하게 차올라 구수한 냄새를 피운다. 신이 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오곡백과 둘러메고 장바닥에 모인다. 가을의 냄새에 사람의 냄새가 더해지는 곳, 우리의 시장 풍경이다.
장, 시대를 진열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을 사고판다는 점에서 시장의 기능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같다. 하지만 그 모양새는 생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의 궤도를 회전하며 끊임없이 변해왔다. 그래서 시장의 역사에는 그 시절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과 풍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장은 시대를 진열하는 창인 것이다.
시장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 시대 이후부터다. 고구려에 시장이 있었다는 것은 6세기 중반 평강공주와 온달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와 소·말, 기물 등을 사니, 필요한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 공주는 온달에게 “아예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 말고 반드시 나라의 말을 선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온달이 그 말대로 했다.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강해졌다."
위의 <온달전>을 보면 시장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토와 집, 노비 등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만큼 다량의 귀금속 거래가 가능하고, 많은 말 중에 골라서 구입하려면 우마 시장의 규모도 대단했을 것이다.
백제 가요 ‘정읍사’에도 시장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행상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온 시장을 다니고 계신가요”라고 걱정하는 내용이 노래에 담겨 있다.
이외에도 삼근왕 2년(478)에 반란을 일으킨 연신의 처자를 ‘웅진시장’에서 목을 베어 처단했고, 의자왕 20년(660)에는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인 것을 보고 사비의 시장 사람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넘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에도 대규모 시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라 소지왕 때는 국가에서 시장을 제도적으로 운영했다. 사방의 물품을 통용시키기 위해 수도인 경주에 시장을 열고, 여기에 관리를 배치해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고려 때는 사농공상을 모두 국가의 중요한 경제적 토대로 보았기에 상업을 적극 장려했다. 고려의 이념적 중추였던 불교도 상업에 호의적이었다. 시장은 번성했고, 이곳에서 재물을 모은 사람도 늘어났다. 이들 상인들에겐 피지배층이 짊어져야 했던 국가에 대한 역역(力役)과 세금 납부 의무도 없었다.
이 때문에 부를 더욱 집적할 수 있었던 상인들은 곡식을 바치고 관직을 얻는 납속보관제와 혼인 등을 통해 신분 상승을 했다.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부상(富商)의 딸을 소실로 삼는 풍조가 유행하기도 했다.
때를 맞추어 시장엔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 외국에서 수입한 물건도 많았다. 상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국에서 수입한 화려한 옷감으로 사치를 부렸다. 얼마나 사치가 심했는지 “길에는 제왕의 의복을 입은 종이 많고, 여염에는 후비의 장식을 한 종이 널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양인, 그중에서도 하층이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 시장은 좀 더 활성화됐다. 조선은 수도 한양의 종로와 남대문로 구간에 행랑 2,000여 칸을 지어 관설 시장인 시전을 조성, 왕실과 관청의 수요품, 외교적 공물, 도성민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토록 했다. 이때까지도 상인의 사회적 위상은 극히 낮았다. 상업이 백성의 생업으로 인정되기야 했지만 말업(末業)이라고 천시되어, 천민과 노예, 무당과 박수, 광대, 기생 등과 동급으로 치부되었다.
당대의 지배층이 상인을 천시한 이유는 “오로지 재화를 유통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농단해 시장의 이익을 독점하기 때문” 이었다. 지배층은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 아래 상인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했다. 상인이 벼슬 자리에 나가는 것을 금하는 것은 물론, 화려한 복식도 규제해 가죽 신발도 신지 못하게 했다. 간혹 재력 있는 상인들이 자녀의 혼사에 네 사람이 메는 교자를 이용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상품 화폐 경제가 활발해지면서 경제적 가치가 증대하자 “시전 상인들은 나라의 근본 중의 근본”이라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전기만 해도 ‘노역 없이 이익만 좇는 존재’로 여겨진 상인들이, 후기에는 ‘힘써 일하는 자’로 비쳐졌다는 것이다. <태종실록>, <정조실록> 등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높아진 위상을 등에 업고 상인들은 민간 시장인 ‘칠패’와 ‘이현’을 통해 외곽까지 상권을 확장했다. 난전으로 시작한 민간 시장은,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지하는 권리인 ‘금난전권’의 압박에도 승승장구했고, 상거래의 주도권을 장악해갔다. ‘5일장’으로 불리는 장시 역시 이 시기에 정점을 이뤘다. 19세기 초에 발간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전국에 걸쳐 무려 1,061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한다.
개항 후인 1882년에는 마침내 외국인에게도 시장을 개방했다.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속속 도성에 점포를 열면서 자본제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시장 체제에 노출된 조선의 시장은 속수무책으로 상업의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때 외국 상인의 시장 침탈로 쇠락한 시장의 풍경은 1899년 <황성신문> 논설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남문을 초입해서 큰 길을 바라보니… 좌우를 두루 돌아본즉 큰 점포 진귀한 물건이 외국인의 상업이 아닌 것이 없고, 우리나라 상민은 왜옥 곁길에서 품질이 낮은 물품을 간략하게 늘어놓고 대가를 돌아보지 않아 판상에 앉아서 졸고 있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보건대 분탄의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고…."
전통 시장의 위상과 공간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도시 계획의 추진과 맞물려 관설 시장인 시전은 특권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걷다 근대적 상가로 변신을 도모했고, ‘칠패’는 남대문시장으로 재편되었으며, ‘이현’은 동대문시장으로 거듭났다. 반면 중국 상인 청상과 일본 상인 일상은 명동과 지금의 충무로인 진고개 일대에 진을 치고 조선인 시장을 잠식하면서 상권을 넓혔다.
이때 형성된 명동·충무로 상권은 일제 강점기에 핵심적 상권으로 떠올랐고, 오늘날에도 주요 시장으로 남아 있다. 남대문·동대문·종로·명동을 둘러 싼 금싸라기 상권의 골격은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시장은 숫자로 표시하는 식민 시장이 된다. 1~4호까지 숫자로 분류해 시장에 이름을 붙였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등 전통 시장은 1호 시장, 일제가 만든 이른바 ‘신식 시장’은 2~4호 시장으로 편성되었다. 2~4호 시장은 공설 시장, 경매 시장, 도매 시장, 곡물 현물 거래 시장 등이었다.
특히 이 무렵 최첨단 상권으로 등장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백화점’이다. 화신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조지아 백화점 등이 위용을 뽐내며 당시의 상계를 풍미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식민 시장 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곧이어 다가온 분단과 전쟁이라는 시련 앞에 공설 시장은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을 비롯한 사설 시장 30여 개만 시장을 이끌었다.
시장이 다시 발전한 것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경제 개발이 가속화한 1960년대 부터다. 1961년 모두 44개에 불과했던 서울의 시장은 1979년엔 무려 334개로 폭증했다. 새로운 형태의 슈퍼마켓이 등장하고 상가 붐이 인 것도 이때였으며, 백화점도 직영 방식을 취하면서 양적·질적으로 괄목한 만한 성과를 드러냈다.
김홍도 ‘행상’ (보물 527호, 39.7×26.7cm, 1745~1816년 이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낡은 벙거지를 쓰고 지게에 나무통을 진 상인과 광주리를 머리에 인 부인 모두 무릎의 행전(行纏)을 묶고 행상을 떠나기 위해 서로 헤어지는 광경을 그린 듯하다. 저고리 안으로 아이를 업은 아낙의 모습이 이채롭다.
유행과 소멸의 역사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을 “장 보러 간다”고 표현하는 우리. 시장은 생활 필수품을 사고파는 곳이지만, 종종 새롭고 화려하고 진기한 물건이 넘쳐나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신천지 같은 곳이었다. 저잣거리에 늘어선 물건만 구경하고 빈손으로 돌아와도 “장을 보고” 왔다고 자연스레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게다.
그런데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시장에 진열된 물건 중에는 시대와 함께 사라지거나 새로 등장하는 것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시장 안의 유행과 소멸의 역사다. 사라진 것 중에는 짚신과 나막신, 가죽신 등이 있다.
개항 이후 서양식 구두의 등장, 일제 때 널리 보급된 고무신과 운동화의 틈바구니에서 짚신과 나막신 등속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터. 물론 추억의 물건으로 거래가 아주 끊긴 건 아니지만 이들을 생활용품으로 사는 이는 거의 없다. 짚신을 시대의 뒤안길로 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고무신은 당시만 해도 신발의 혁명을 불러온 상품이었다. 물이 새지 않고 질긴 데다 가격까지 저렴해 선풍적 인기를 끌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고무신 역시 흘러간 옛날 물건이 되어버렸다.
전통 시대에 저잣거리에서 많이 사고팔던 물건으로, 땔나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땔나무는 난방과 취사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석유와 석탄, 그리고 성냥의 등장으로, 기존 연료 개념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편리함에 효율성까지 더한 대체 연료가 생긴 후 땔나무를 필요로 하는 집은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이는 곧 시장에서의 퇴출로 이어졌다. 또 언제 어디서나 불을 켤 수 있는 성냥은 불씨를 지키기 위해 마음 졸여 야 했던 여성들의 굴레를 벗겨주었다. 당시 생활상의 변화를 시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마다 특이한 물건이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시험지였던 시권(試券)이 시장에 장물로 나왔다. <정조실록>에는 “초시의 시권에 자호도 써놓지 않고 겉봉도 잘라놓지 않은 것을 훔쳐내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죽은 공자의 초상화인 유상(遺像)이나 호랑이 가죽 등이 매매되기도 했다. 가히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시장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다.
목각 족두리전 수세패 평시서 (나무, 8.8cm,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는 평시서(平市署)라는 관청을 두어 시장 거리에 있는 큰 가게[市廛]를 관리하고, 각종 물가 등에 관련한 일을 하도록 했다. 평시서에서는 시전 관리의 한 방법으로 몇몇 가게를 지정, 세금을 대신받도록 했으며, 수세패(收稅牌)를 만들어 세금을 거두면서 이를 몸에 달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민중의 광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은 광장으로서의 역할도 병행했다. 시장만큼 각종 정보와 소식, 풍문이 빠르게 전달되는 곳은 없었다.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 삼아 시장에 나오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지나 친척을 만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만나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나누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혼담이었다. 혼인은 무턱대고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인연이나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다른 마을에 살지만 같은 시장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만큼 큰 인연은 없었다.
시장은 또한 정치 공론의 장이기도 했다. 백성을 훈계하거나 설득하기 위한 조정의 방을 게시해 소식을 널리 전하기도 했고, 백성이 탐관오리를 비판하는 익명서가 나붙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3·1운동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으며,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격문이 게시되기도 했다. 소녀 유관순 열사가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곳도 천안 병천의 아우내 장터였다. 해방 이후에는 특정 정파를 비난하는 전단지, 일명 삐라가 뿌려진 곳도 시장이었다.
이렇듯 사람이 많이 모이고 의견을 나누는 공공의 장소였기에, 나라에 중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시장이 움직였다. 이시(移市) 또는 사시(徙市)라고 해서 가뭄이 들면 시장을 옮기는 것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풍습이었다. 근검 절약하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시장을 잠시 닫고, 작은 골목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 최소한의 생필품만 거래해 하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였다. 비가 오고 난 후에야 시장은 본래 자리로 옮겨와 예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물론 도성 주민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이시는 18세기 이후 점차 사라졌다. 왕실과 국가에 중대사가 발생하면 시장을 아예 닫고 영업을 하지 않는 철시(撤市)도 단행되었다.
왕과 왕족, 그리고 주요 대신이 죽으면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이성계에게 잡혀 참수를 당하자 “개경 사람들이 시장을 파하고” 슬퍼했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다.
일식과 월식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시장을 닫았다. 또 철시는 정치적 항쟁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때 상인들이 점포 문을 닫고 휴업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이 종로와 동대문 지역에서 활발했기 때문에, 이 지역 상인들이 철시하고 시위에 동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황한 일제가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가게 문을 열게 했으나 도통 소용이 없었다. 철시는 4월 중순까지 의연히 계속됐다. 이렇듯 시장은 민중의 가장 강력한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시장, 놀이와 축제의 장
때로 시장은 장터의 분위기를 북돋우고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놀이와 축제의 장으로 변모했다. 특히 장이 새로 서거나 장소를 옮길 때는 이 사실을 주민에게 알리기 위해 수일간 ‘난장’이 벌어졌다.
난장판을 벌일 때 한편에는 장이 서고, 다른 한편에는 씨름, 줄다리기, 남사당패 놀이 등 민속 행사가 펼쳐졌다. 과거에는 이만한 구경거리도 없었으므로 시끌벅적 흥이 난 저잣거리에 자연히 손님이 모여들었다.
송파장 같은 대시장은 거상이 많아 놀이판도 제법 컸다. 상인들은 얼마씩 기부금을 거두어 놀이패를 고용하고 7월 백중날 일주일에서 열흘까지 놀며 송파산대놀이도 함께 발전시켰다. 지방의 명연주자들은 모두 모였고, 씨름대회 같은 특별한 이벤트도 벌어졌다. 소금 배가 닿을 때마다 임시로 서는 목계장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부용 산신과 남한강 용신에 대한 별신제가 행해졌다.
제사는 신을 모셔오는 강신굿으로 시작해 줄다리기, 송신굿으로 이어졌다. 줄다리기는 대규모 놀이였다. 강을 경계로 동서 양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기는데 수줄이 되는 동편은 강원도 강릉에서까지, 암줄이 되는 서편은 서울에서까지 줄꾼이 동원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줄다리기에서 이긴 편은 그해 운수가 좋을 것이라 하여 잔치를 벌였다. 시골장에서는 간혹 나무꾼들의 장치기 놀이도 벌어졌다. 나무 장작이나 솔가지를 지게에 싣고 시장에 나온 나무꾼들이 무료해지면 편을 갈라 지게를 골문 삼고 지게 작대기로 공을 쳐서 넣는 놀이였다.
이와 비슷한 고급 스포츠로는 ‘격구’가 있었다. 단오 즈음에 채로 나무 공을 쳐 구문에 넣는 ‘격구’가 시장판에서 벌어지면 왕이 직접 시장에 행차해 관람하기도 했다. 특히 말에 올라타서 하는 ‘마상 격구’는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는 멋진 경기였다. 이때는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보통 때는 듣기 어려운 음악을 연주하는 자리를 마련해 넉넉한 시장 인심을 보이기도 했다.
글 전희영(방송작가)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도서 <시장의 역사>(박은숙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한국의 전통 사회 시장>(정승모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펴냄)
에누리와 덤
시장의 백미는 흥정이다. 여기엔 치열한 심리전이 따라붙는다.
그 과정에서 오가는 것이 바로 에누리와 덤이다.
에누리는 ‘더 부르는 값’이라는 의미와 ‘값을 깎는 일’이라는 상반되는 뜻을 동시에 지닌 묘한 용어인데, 대개는 후자의 의미로 널리 쓰인다. 그런데 이 에누리 풍습은 개항 이후 일본 상인과 중국 상인이 밀려오면서 우리 상권이 위협받게 되자 ‘거짓말하는 풍속’으로 지목되었다. 일제 때도 ‘비문화적인 악습’으로 간주되어 폐지 대상이 되었다. 에누리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 양상이 변화를 겪은 것이다.
덤 역시 마찬가지다. 물건을 살 때 거저 얹어주는 덤은 왠지 인정스럽고 싸게 사는 느낌이 들어 사는 사람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한다. 소금 장사들은 애초 덤을 담는 조그마한 되를 따로 갖고 다니며 제값의 물건 외에 덤을 얹어주어 장사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이미 상품 가격에 반영된 경우가 많다는 논리로 근대 이후 ‘유치한 시대’의 폐단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유독 정에 약한 한국인에게 에누리와 덤은 장 보러 가는 재미요, 사람 사는 이야기다.
감자 한 알, 생강 한 톨 더 쥐여주며 또 오라는 상인의 수더분한 인사말에 우리네 전통 시장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홍도 ‘장터길’ (보물 527호, 39.7×26.7cm,1745~1816년 이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한 무리의 가마 행렬을 그린 것이다. 앞서 가는 소와 가운데에 있는 말등에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장터에서 물건을 다 팔고 돌아가는 길인 듯하다. 장사가 잘되었는지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한 느낌이다.
사람 냄새 가을 냄새 넉넉한, 시장의 재발견
가을은 후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서늘하게 잘 말라 향기로운 흙냄새에 온갖 과실이 농밀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가득하고, 들판에 지천인 곡식도 알이 통통하게 차올라 구수한 냄새를 피운다. 신이 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오곡백과 둘러메고 장바닥에 모인다. 가을의 냄새에 사람의 냄새가 더해지는 곳, 우리의 시장 풍경이다.
장, 시대를 진열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을 사고판다는 점에서 시장의 기능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같다. 하지만 그 모양새는 생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의 궤도를 회전하며 끊임없이 변해왔다. 그래서 시장의 역사에는 그 시절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과 풍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장은 시대를 진열하는 창인 것이다.
시장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 시대 이후부터다. 고구려에 시장이 있었다는 것은 6세기 중반 평강공주와 온달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와 소·말, 기물 등을 사니, 필요한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 공주는 온달에게 “아예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 말고 반드시 나라의 말을 선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온달이 그 말대로 했다.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강해졌다."
위의 <온달전>을 보면 시장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토와 집, 노비 등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만큼 다량의 귀금속 거래가 가능하고, 많은 말 중에 골라서 구입하려면 우마 시장의 규모도 대단했을 것이다.
백제 가요 ‘정읍사’에도 시장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행상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온 시장을 다니고 계신가요”라고 걱정하는 내용이 노래에 담겨 있다.
이외에도 삼근왕 2년(478)에 반란을 일으킨 연신의 처자를 ‘웅진시장’에서 목을 베어 처단했고, 의자왕 20년(660)에는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인 것을 보고 사비의 시장 사람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넘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에도 대규모 시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라 소지왕 때는 국가에서 시장을 제도적으로 운영했다. 사방의 물품을 통용시키기 위해 수도인 경주에 시장을 열고, 여기에 관리를 배치해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고려 때는 사농공상을 모두 국가의 중요한 경제적 토대로 보았기에 상업을 적극 장려했다. 고려의 이념적 중추였던 불교도 상업에 호의적이었다. 시장은 번성했고, 이곳에서 재물을 모은 사람도 늘어났다. 이들 상인들에겐 피지배층이 짊어져야 했던 국가에 대한 역역(力役)과 세금 납부 의무도 없었다.
이 때문에 부를 더욱 집적할 수 있었던 상인들은 곡식을 바치고 관직을 얻는 납속보관제와 혼인 등을 통해 신분 상승을 했다.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부상(富商)의 딸을 소실로 삼는 풍조가 유행하기도 했다.
때를 맞추어 시장엔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 외국에서 수입한 물건도 많았다. 상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국에서 수입한 화려한 옷감으로 사치를 부렸다. 얼마나 사치가 심했는지 “길에는 제왕의 의복을 입은 종이 많고, 여염에는 후비의 장식을 한 종이 널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양인, 그중에서도 하층이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 시장은 좀 더 활성화됐다. 조선은 수도 한양의 종로와 남대문로 구간에 행랑 2,000여 칸을 지어 관설 시장인 시전을 조성, 왕실과 관청의 수요품, 외교적 공물, 도성민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토록 했다. 이때까지도 상인의 사회적 위상은 극히 낮았다. 상업이 백성의 생업으로 인정되기야 했지만 말업(末業)이라고 천시되어, 천민과 노예, 무당과 박수, 광대, 기생 등과 동급으로 치부되었다.
당대의 지배층이 상인을 천시한 이유는 “오로지 재화를 유통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농단해 시장의 이익을 독점하기 때문” 이었다. 지배층은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 아래 상인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했다. 상인이 벼슬 자리에 나가는 것을 금하는 것은 물론, 화려한 복식도 규제해 가죽 신발도 신지 못하게 했다. 간혹 재력 있는 상인들이 자녀의 혼사에 네 사람이 메는 교자를 이용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상품 화폐 경제가 활발해지면서 경제적 가치가 증대하자 “시전 상인들은 나라의 근본 중의 근본”이라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전기만 해도 ‘노역 없이 이익만 좇는 존재’로 여겨진 상인들이, 후기에는 ‘힘써 일하는 자’로 비쳐졌다는 것이다. <태종실록>, <정조실록> 등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높아진 위상을 등에 업고 상인들은 민간 시장인 ‘칠패’와 ‘이현’을 통해 외곽까지 상권을 확장했다. 난전으로 시작한 민간 시장은,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지하는 권리인 ‘금난전권’의 압박에도 승승장구했고, 상거래의 주도권을 장악해갔다. ‘5일장’으로 불리는 장시 역시 이 시기에 정점을 이뤘다. 19세기 초에 발간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전국에 걸쳐 무려 1,061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한다.
개항 후인 1882년에는 마침내 외국인에게도 시장을 개방했다.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속속 도성에 점포를 열면서 자본제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시장 체제에 노출된 조선의 시장은 속수무책으로 상업의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때 외국 상인의 시장 침탈로 쇠락한 시장의 풍경은 1899년 <황성신문> 논설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남문을 초입해서 큰 길을 바라보니… 좌우를 두루 돌아본즉 큰 점포 진귀한 물건이 외국인의 상업이 아닌 것이 없고, 우리나라 상민은 왜옥 곁길에서 품질이 낮은 물품을 간략하게 늘어놓고 대가를 돌아보지 않아 판상에 앉아서 졸고 있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보건대 분탄의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고…."
전통 시장의 위상과 공간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도시 계획의 추진과 맞물려 관설 시장인 시전은 특권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걷다 근대적 상가로 변신을 도모했고, ‘칠패’는 남대문시장으로 재편되었으며, ‘이현’은 동대문시장으로 거듭났다. 반면 중국 상인 청상과 일본 상인 일상은 명동과 지금의 충무로인 진고개 일대에 진을 치고 조선인 시장을 잠식하면서 상권을 넓혔다.
이때 형성된 명동·충무로 상권은 일제 강점기에 핵심적 상권으로 떠올랐고, 오늘날에도 주요 시장으로 남아 있다. 남대문·동대문·종로·명동을 둘러 싼 금싸라기 상권의 골격은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시장은 숫자로 표시하는 식민 시장이 된다. 1~4호까지 숫자로 분류해 시장에 이름을 붙였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등 전통 시장은 1호 시장, 일제가 만든 이른바 ‘신식 시장’은 2~4호 시장으로 편성되었다. 2~4호 시장은 공설 시장, 경매 시장, 도매 시장, 곡물 현물 거래 시장 등이었다.
특히 이 무렵 최첨단 상권으로 등장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백화점’이다. 화신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조지아 백화점 등이 위용을 뽐내며 당시의 상계를 풍미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식민 시장 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곧이어 다가온 분단과 전쟁이라는 시련 앞에 공설 시장은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을 비롯한 사설 시장 30여 개만 시장을 이끌었다.
시장이 다시 발전한 것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경제 개발이 가속화한 1960년대 부터다. 1961년 모두 44개에 불과했던 서울의 시장은 1979년엔 무려 334개로 폭증했다. 새로운 형태의 슈퍼마켓이 등장하고 상가 붐이 인 것도 이때였으며, 백화점도 직영 방식을 취하면서 양적·질적으로 괄목한 만한 성과를 드러냈다.
김홍도 ‘행상’ (보물 527호, 39.7×26.7cm, 1745~1816년 이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낡은 벙거지를 쓰고 지게에 나무통을 진 상인과 광주리를 머리에 인 부인 모두 무릎의 행전(行纏)을 묶고 행상을 떠나기 위해 서로 헤어지는 광경을 그린 듯하다. 저고리 안으로 아이를 업은 아낙의 모습이 이채롭다.
유행과 소멸의 역사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을 “장 보러 간다”고 표현하는 우리. 시장은 생활 필수품을 사고파는 곳이지만, 종종 새롭고 화려하고 진기한 물건이 넘쳐나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신천지 같은 곳이었다. 저잣거리에 늘어선 물건만 구경하고 빈손으로 돌아와도 “장을 보고” 왔다고 자연스레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게다.
그런데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시장에 진열된 물건 중에는 시대와 함께 사라지거나 새로 등장하는 것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시장 안의 유행과 소멸의 역사다. 사라진 것 중에는 짚신과 나막신, 가죽신 등이 있다.
개항 이후 서양식 구두의 등장, 일제 때 널리 보급된 고무신과 운동화의 틈바구니에서 짚신과 나막신 등속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터. 물론 추억의 물건으로 거래가 아주 끊긴 건 아니지만 이들을 생활용품으로 사는 이는 거의 없다. 짚신을 시대의 뒤안길로 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고무신은 당시만 해도 신발의 혁명을 불러온 상품이었다. 물이 새지 않고 질긴 데다 가격까지 저렴해 선풍적 인기를 끌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고무신 역시 흘러간 옛날 물건이 되어버렸다.
전통 시대에 저잣거리에서 많이 사고팔던 물건으로, 땔나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땔나무는 난방과 취사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석유와 석탄, 그리고 성냥의 등장으로, 기존 연료 개념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편리함에 효율성까지 더한 대체 연료가 생긴 후 땔나무를 필요로 하는 집은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이는 곧 시장에서의 퇴출로 이어졌다. 또 언제 어디서나 불을 켤 수 있는 성냥은 불씨를 지키기 위해 마음 졸여 야 했던 여성들의 굴레를 벗겨주었다. 당시 생활상의 변화를 시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마다 특이한 물건이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시험지였던 시권(試券)이 시장에 장물로 나왔다. <정조실록>에는 “초시의 시권에 자호도 써놓지 않고 겉봉도 잘라놓지 않은 것을 훔쳐내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죽은 공자의 초상화인 유상(遺像)이나 호랑이 가죽 등이 매매되기도 했다. 가히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시장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다.
목각 족두리전 수세패 평시서 (나무, 8.8cm,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는 평시서(平市署)라는 관청을 두어 시장 거리에 있는 큰 가게[市廛]를 관리하고, 각종 물가 등에 관련한 일을 하도록 했다. 평시서에서는 시전 관리의 한 방법으로 몇몇 가게를 지정, 세금을 대신받도록 했으며, 수세패(收稅牌)를 만들어 세금을 거두면서 이를 몸에 달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민중의 광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은 광장으로서의 역할도 병행했다. 시장만큼 각종 정보와 소식, 풍문이 빠르게 전달되는 곳은 없었다.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 삼아 시장에 나오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지나 친척을 만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만나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나누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혼담이었다. 혼인은 무턱대고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인연이나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다른 마을에 살지만 같은 시장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만큼 큰 인연은 없었다.
시장은 또한 정치 공론의 장이기도 했다. 백성을 훈계하거나 설득하기 위한 조정의 방을 게시해 소식을 널리 전하기도 했고, 백성이 탐관오리를 비판하는 익명서가 나붙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3·1운동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으며,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격문이 게시되기도 했다. 소녀 유관순 열사가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곳도 천안 병천의 아우내 장터였다. 해방 이후에는 특정 정파를 비난하는 전단지, 일명 삐라가 뿌려진 곳도 시장이었다.
이렇듯 사람이 많이 모이고 의견을 나누는 공공의 장소였기에, 나라에 중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시장이 움직였다. 이시(移市) 또는 사시(徙市)라고 해서 가뭄이 들면 시장을 옮기는 것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풍습이었다. 근검 절약하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시장을 잠시 닫고, 작은 골목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 최소한의 생필품만 거래해 하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였다. 비가 오고 난 후에야 시장은 본래 자리로 옮겨와 예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물론 도성 주민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이시는 18세기 이후 점차 사라졌다. 왕실과 국가에 중대사가 발생하면 시장을 아예 닫고 영업을 하지 않는 철시(撤市)도 단행되었다.
왕과 왕족, 그리고 주요 대신이 죽으면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이성계에게 잡혀 참수를 당하자 “개경 사람들이 시장을 파하고” 슬퍼했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다.
일식과 월식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시장을 닫았다. 또 철시는 정치적 항쟁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때 상인들이 점포 문을 닫고 휴업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이 종로와 동대문 지역에서 활발했기 때문에, 이 지역 상인들이 철시하고 시위에 동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황한 일제가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가게 문을 열게 했으나 도통 소용이 없었다. 철시는 4월 중순까지 의연히 계속됐다. 이렇듯 시장은 민중의 가장 강력한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시장, 놀이와 축제의 장
때로 시장은 장터의 분위기를 북돋우고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놀이와 축제의 장으로 변모했다. 특히 장이 새로 서거나 장소를 옮길 때는 이 사실을 주민에게 알리기 위해 수일간 ‘난장’이 벌어졌다.
난장판을 벌일 때 한편에는 장이 서고, 다른 한편에는 씨름, 줄다리기, 남사당패 놀이 등 민속 행사가 펼쳐졌다. 과거에는 이만한 구경거리도 없었으므로 시끌벅적 흥이 난 저잣거리에 자연히 손님이 모여들었다.
송파장 같은 대시장은 거상이 많아 놀이판도 제법 컸다. 상인들은 얼마씩 기부금을 거두어 놀이패를 고용하고 7월 백중날 일주일에서 열흘까지 놀며 송파산대놀이도 함께 발전시켰다. 지방의 명연주자들은 모두 모였고, 씨름대회 같은 특별한 이벤트도 벌어졌다. 소금 배가 닿을 때마다 임시로 서는 목계장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부용 산신과 남한강 용신에 대한 별신제가 행해졌다.
제사는 신을 모셔오는 강신굿으로 시작해 줄다리기, 송신굿으로 이어졌다. 줄다리기는 대규모 놀이였다. 강을 경계로 동서 양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기는데 수줄이 되는 동편은 강원도 강릉에서까지, 암줄이 되는 서편은 서울에서까지 줄꾼이 동원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줄다리기에서 이긴 편은 그해 운수가 좋을 것이라 하여 잔치를 벌였다. 시골장에서는 간혹 나무꾼들의 장치기 놀이도 벌어졌다. 나무 장작이나 솔가지를 지게에 싣고 시장에 나온 나무꾼들이 무료해지면 편을 갈라 지게를 골문 삼고 지게 작대기로 공을 쳐서 넣는 놀이였다.
이와 비슷한 고급 스포츠로는 ‘격구’가 있었다. 단오 즈음에 채로 나무 공을 쳐 구문에 넣는 ‘격구’가 시장판에서 벌어지면 왕이 직접 시장에 행차해 관람하기도 했다. 특히 말에 올라타서 하는 ‘마상 격구’는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는 멋진 경기였다. 이때는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보통 때는 듣기 어려운 음악을 연주하는 자리를 마련해 넉넉한 시장 인심을 보이기도 했다.
글 전희영(방송작가)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도서 <시장의 역사>(박은숙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한국의 전통 사회 시장>(정승모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펴냄)
에누리와 덤
시장의 백미는 흥정이다. 여기엔 치열한 심리전이 따라붙는다.
그 과정에서 오가는 것이 바로 에누리와 덤이다.
에누리는 ‘더 부르는 값’이라는 의미와 ‘값을 깎는 일’이라는 상반되는 뜻을 동시에 지닌 묘한 용어인데, 대개는 후자의 의미로 널리 쓰인다. 그런데 이 에누리 풍습은 개항 이후 일본 상인과 중국 상인이 밀려오면서 우리 상권이 위협받게 되자 ‘거짓말하는 풍속’으로 지목되었다. 일제 때도 ‘비문화적인 악습’으로 간주되어 폐지 대상이 되었다. 에누리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 양상이 변화를 겪은 것이다.
덤 역시 마찬가지다. 물건을 살 때 거저 얹어주는 덤은 왠지 인정스럽고 싸게 사는 느낌이 들어 사는 사람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한다. 소금 장사들은 애초 덤을 담는 조그마한 되를 따로 갖고 다니며 제값의 물건 외에 덤을 얹어주어 장사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이미 상품 가격에 반영된 경우가 많다는 논리로 근대 이후 ‘유치한 시대’의 폐단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유독 정에 약한 한국인에게 에누리와 덤은 장 보러 가는 재미요, 사람 사는 이야기다.
감자 한 알, 생강 한 톨 더 쥐여주며 또 오라는 상인의 수더분한 인사말에 우리네 전통 시장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