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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성복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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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여유 스크랩 (2) 실크 로드 여행기
jose 추천 0 조회 206 09.08.19 21: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신강 위구르 자치구

 

     우리 일행이 실크 로드로 간 것은 1999년 8월, 10박 11일 간의 여행이었다. 중국 서안에서 신강항공사의 새로 도입한 에어버스를 타고 바로 우루무치로 향하였다.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의 구도(區都)인 우루무치를 거점으로 하여 서쪽 국경지대에 있는 카스칼(카스)과 투루판을 관광하고 감숙성(甘肅省)으로 나와 돈황(敦煌) 난주(蘭州) 서안(西安)을 거처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이 지역은 북으로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이 뻗어 있고 남으로는 곤륜산맥(崑崙山脈)과 청장고원(靑臧高原) 그리고 히말라야산맥으로 이어지는 세계의 지붕을 끼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다크라마칸사막 다림분지 등으로 넓은 평원지대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

     중국이 이 지역에 최초로 진출하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 때이었다. 즉 전한(前漢)의 무제(武帝)는 흉노(匈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하였다. 기원전 138년 장건은 100여명의 수행원과 함께 대월저국(大月?國)을 목표로 하여 떠났으나 곧바로 흉노에 의해 포로가 되어 13년을 지내다 간신히 탈주에 성공하여 귀국하였다. 이때 비로소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지게 된다. 기원전 119년 장건은 오손국(烏孫國)과 연합하여 흉노를 칠 계획으로 재차 서역으로 나아갔으나 연합세력을 얻는 데는 성사하지 못한 대신 여러 나라와 접촉하여 서방과 교역로를 터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 루트는 후에 실크 로드라고 불리게 되는 길이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치세 때에도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명장 고선지(高仙芝)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거점으로 하여 멀리 천산산맥 서쪽까지 서역 평정을 도모하였으며 한대(漢代)보다 더 많은 동서교역을 일으키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고선지 장군은 뒤에 안록산(安祿山)의 반란군을 정벌하라는 현종의 명을 받고 중원으로 돌아와 반란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현종이 파견한 감독관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처형되는 비운을 맞게 되지만 이 지역에 가면 곳곳에서 고선지 장군의 활동상을 듣게 되며 고구려인의 높은 기상을 되 새겨 보게 된다.

    바다길이 열리기전에는 동서양의 문물교역은 주로 이 실크 로드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 멀리 로마 페르시아 인도 지역의 문화 과학 종교와 향료 생약 유리 보석 등이 중국을 비롯한 동방제국으로 들어왔으며 주로 중국의 견직물과 도자기 황금 종이 등이 서쪽으로 팔려 나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경전들이 이 길을 통하여 동방으로 전래된 사실은 특기 할만하다. 후한(後漢) 초기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으로 전래된 것도 이 길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며 서안(西安)에 지금도 남아있는 대안탑(大雁塔)은 유명한 현장삼장(玄?三藏)이 627년 이 길을 통하여 인도로부터 많은 불경을 가져 와 이를 번역하고 또 편찬 보관한 곳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혜초 스님 등 고승들이 천축국(天竺國)으로 불교를 연구하고 경전을 구하러 간 것도 물론 이 길을 통해서이다.

    비단을 비롯한 물자의 교역은 뒤에 청대에 와서 더욱 활발하여졌다. 청나라 강희(康熙) 황제는 1698년 몽골계의 준갈왕국을 평정하고 이 지역을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로 신강(新疆)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지역은 광활한 황무지로서 사람이 살기에는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히말라야산맥 곤륜산맥 등이 남쪽에서 넘어오는 비구름을 가로 막아서 그런지 비라고는 연중 50밀리도 내리지 않아 건조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라 밤낮의 기온차도 심하고 여름에는 섭씨 40 도 이상 오르는가 하면 겨울에는 영하 20 도 안팎으로 내려가는 혹한이 휘몰아치기도 한다. 겨울에는 높은 산에 눈이 내려 쌓이고 여름이면 눈 녹은 물이 젓줄처럼 대지에 흐른다.

    차를 타고 들판을 지나면 가도 가도 지평선만 보이는 넓은 광야에 수목도 풀도 자라지 않는 자갈밭만 이어진다. 흙과 모래는 황사가 되어 모두 날아가 버린 탓인가. 가끔 보이는 식물이라고는 낙타만이 먹는다는 줄기에 가시가 달린 낙타풀과 몇 가지 이름 모를 관목이 가끔 눈에 뜨일 뿐이다. 산골자기나 오아시스 근처라야 수목도 자라고 사람들도 살 수 있다.

 

천산산맥 천지에서 

 

    신강위구르자치구에는 인구가 약 1700만 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은 주로 천산산맥과 그 지맥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과 그것이 지하로 스며들어 오아시스가 되어 분출하는 물을 마시고 또 이 물로 농사를 지어 살고 있는 것이다. 투루판 지역에는 호수나 오아시스의 물을 지하 수로를 파서 수 백 킬로 끌어다가 이 물을 길러 농사를 한다.

이 지역의 인구 중 주된 종족은 우리가 흔히 회골족이라 부르는 위구르족인데 전체의 약 48% 즉 814만명 가량 되고 있다. 그들의 조상은 원래 알타이계의 유라시아 유목민족이었으나 현대 위구르족은 순수 몽고족과도 다르고 순수 코카서스 인종과도 다른 황인종과 백인종이 혼합된 특징을 갖고 있다.

     11세기이후 이스람교가 이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회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들은 아랍계 문자인 위구르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주요 공공건물이나 간판에는 한자와 함께 위구르문자를 병기하고 있다. 이밖에 동쪽에서 들어 온 한족과 중앙아시아계의 카자흐족 킬키스족 타지크족 우스배크족 타타르족 몽골족 그리고 러시아족 등 실로 다양한 민족들이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갖고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다.

 

                                                 천산산맥 보그타봉 

 

(2) 우루무치(烏魯木齊)

 

    일행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신강(新疆)위구르 자치구(自治區)의 구도(區都)라는 우루무치였다. 우리는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홀리데이 인 호텔(新疆假日大飯店)에서 여장을 풀었다. 건축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고 서비스도 훌륭한 5성급 호텔이었다.

    우루무치는 옛날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요충이며 인구 약 150만이 사는 대도시이다. 높은 빌딩들도 많고 외국자본과 합작으로 지은 일류 호텔도 여럿이 있다. 북경과는 해지는 시각이 두 시간이상 차이가 있어 저녁 열시가 넘어 어두워졌으며 해떨어진 후의 인민공원에는 수 백명의 남녀가 나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서양춤을 즐기고 있었다. 도착 후 처음 보는 평화스러운 광경이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이 이곳 오지까지 흘러 들어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수출 공단을 조성하고 외자유치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신발 의류등 제조업이 일어나고 있다.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상대로 하는 무역거점으로 발돋움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루무치는 천산산맥의 고봉들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풍부하여 주변에 농토도 많고 사람도 많이 사는 하나의 거대한 오아시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루무치는 몽골말로 ‘아름다운 목장’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때 몽골 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성을 쌓고 도시의 기초를 마련한데 기인한다.

 

천지(天池)

    다음 날 우리 일행은 천산산맥 지맥의 하나인 보고다산계에 있는 산중호(山中湖) 천지(天池)를 보러 갔다. 보그타(普格達)산은 이 근처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서(5445 m) 한 여름에도 만년설을 이고 있으며 따라서 멀리서도 잘 보이는 산이다.

   천지는 우루무치의 동쪽으로 약 100 km 되는 곳에 보그타 산계 북록 해발 2000 m 정도의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가는 데는 버스로 약 두 시간 가량이 소요되었다. 길옆으로 큰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길가에는 포푸라 나무들이 줄 지어 자라고 있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상당한 수량이었으며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다.

천지 근처에 다 가서는 버스가 약 1000 m 이상 되는 급경사 길을 힘겹게 올라갔다. 산길이 끝나고 하차해서 바라 본 천지는 장관이었다. 멀리 보이는 보고다산의 눈 덮인 모습이 호수의 수면에 비치고 있다. 호수 주변에는 전나무와 같이 보이는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 서 있다. 온통 황무지 밖에 없는 대지에서 드물게 보는 푸른 광경이다.

   이 호수는 옛날 빙하시대에 산중턱이 빙하로 깎이고 그 흙이 아래로 밀려 내려와 자연적으로 제방이 만들어져 생긴 호수라 한다. 길이 약 3 km 폭 1 km 둘레 약 11 km 라고 하는데 호수 안쪽 끝은 산으로 가로 막혀 보이지 않는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백두산의 천지와 같은 이름이다. 그러나 호수의 규모는 백두산 천지보다 작아 보인다.

   이 호수에도 전설이 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 고대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우루무치 근처의 모든 물을 이곳에 끌어와 천지를 만들고 서왕모의 목욕탕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산비탈 길을 오르면서 본 작은 연못 소천지(小天池)는 서왕모가 발을 씻었던 곳이란다. 서왕모는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여성 최고신이며 곤륜산 정상에 있는 궁전에 사는 절세 미인으로 만능의 선약(仙藥)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천지는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이라 길가에 행상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3000m 이상 되는 고산지대의 눈 속에서 꽃이 핀다는 설연(雪蓮)을 따다 말려서 팔고 있는 여인들이 많았다. 설연은 티벳트 청해 신강지방의 높은 산에서 자생하는데 특히 여성들에게 좋은 약재라고 한다.

 

 

 

남산목장(南山牧場)

다음날에는 남산목장이라는 카자흐족의 마을에 갔다. 천산산맥 북쪽 편에 있는 여러 개의 골자기에 풀이 나 있어 일종의 자연 목장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천산산맥 근처의 대부분의 산들이 메마른 흙을 드러내는 민둥산들인데 이곳 남산 일대의 골짜기들에는 물이 있고 풀이 나 있는 것은 드물게 보는 광경이라 할 것이다. 마을이라 해도 천막촌과 같은 것이다. 카자흐족은 본래 유목민족으로서 초원을 따라 일 년에도 몇 번식 장소를 이동하며 ‘파오’라고 하는 펠트 천막집에서 사는 민족이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말 타기를 잘하며 심지어 안장도 없는 말 등에 올라 비호 같이 달린다. 유라시아 기마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기 때문인가. 사내들은 제각기 말 타는 기술을 뽑내고 경쟁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안내자를 따라 한 천막 집안에 들어가 보았다. 카펫이 깔린 방바닥에 둘러앉았더니 안주인이 양젖 차를 내 왔다. 막걸리 같이 보였으나 술기는 없었다. 이곳 천막 마을은 아마 관광객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카자흐 마을에서

 

 

카자르족 천막 내부

 

 

(3) 카슈칼((喀什, 카스)

 

    우루무치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약 한 시간 반 가량 서쪽으로 가서 카슈칼이라는 위구르족 냄새가 물신 나는 중국 극서(極西) 지방에 위치한 소도시에 도착했다. 인구 약 30만 명중 80%이상이 위구르족이라 한다. 사람들의 얼굴 모습에서 벌서 중국 사람 같지 않은 분위기가 풍긴다. 고원지대의 강한 자외선 때문인지 사람들의 얼굴색이 거무스레한 구리빛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스람교를 믿고 있는데 이것은 11세기부터 전래되어 온 이스람교가 특히 16세기 말 아파크 호자라는 저명한 종교지도자의 영향으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라 한다.

도시 이름 카슈칼은 ‘옥이 모이는 곳’이라는 고대 페르시아 말에서 나왔다는 점으로 보아 이곳이 옛날부터 동서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카스(喀什)라고 하는 것은 중국식 표현이다. 지리적으로 카슈칼은 남 북의 실크 로드가 이곳에서 교차하고 여기서 파미르고원을 거쳐 인도와 아프간,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각국으로 갈라져 나가는 중심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도 위구르족뿐만이 아니고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 서로 섞여 있다.

 

카슈칼 현지인들과 함께

 

문화적으로도 동 서양 문명이 교류하는 십자로이다. 일지기 불교가 전래되어 1000년 가까이 불교문화를 꽃 피웠던 적이 있으며 고대 그리스 문화가 카슈칼에 미친 영향이 오늘날 까지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곳 위구르족의 생활 양식을 간단히 살펴보면 우선 음식 문화는 양(?)이라는 넓게 구운 밀떡 빵, 양고기, 차, 그리고 과일의 네 가지가 주류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양이라는 빵이 주식이라 할 수 있다. 깊은 옹기속에 불을 피우고 그 속에서 양을 구워낸다. 의복은 주로 색채가 선명하고 각 종의 꽃 무늬를 수놓아 만든 것이다. 위구르인들은 꽃무늬 옷에 꽃무늬 신발을 신고 꽃무늬 두건을 두르고 꽃무늬 모자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시내에서 가 볼만 한 곳으로는 청진사(淸眞寺)라는 이스람 사원, 아파크 호자의 묘, 그리고 실크 로드 박물관 등이 있는데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하였다.(이스람이 중국 서역으로 들어 올 때 중국인들은 이를 청진교(淸眞敎)라 하고 그들의 사원들을 청진사라 하였으며 현재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아직 사람들의 일자리가 충분하지 못한 때문인지 시내에 많은 사람들이 별 볼일 없이 오락 가락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내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금속세공품 꽃무늬를 수놓은 옷가지 이스람 모자 등 선물 가게가 많이 있었지만 아직 이곳까지 오는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고 기념품으로 살 만한 물건도 보이지 않았으며 장사도 잘 되는 것 같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동 중국해와 황해 연안의 여러 산업화된 도시에서 흔히 보는

시장경제의 활기가 이곳까지 미치기에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더 흘러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고 세계속의 오지 중 오지라 할 카슈칼을 떠났다.

 

 

 

                                                카슈칼 청진사 앞 광장

 

 

(4) 투루판(吐魯番)

카슈칼로부터 우루무치로 돌아와 1박하고 다음 날 버스로 투루판 지역으로 향하였다. 투루판 지역은 우루무치에서 약 200 km 떨어진 곳인데 평균고도가 해발 30m 안팎의 저지대이며 천산산맥 등 주위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분지지대이다. 우루무치지역이 해발 800 m 정도 되는 높은 지대라 버스는 계속 저지대를 향하여 내려가는 것이었다. 길은 새로 건설한 직선 포장도로이고 차가 거의 없어 달리기 알맞은 길이었다. 길가에는 풀 한 포기 없는 건조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고 가끔 물이 말라버린 건천이 보이기도 하였다.

연간 강수량이 20 밀리도 안 되는데다가 기온은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7 8월에는 낮 기온이 40도를 넘는 것이 보통이다. 이리하여 중국에서는 흔히 화주(火州)라 불리기도 한다. 지나면서 보니 멀리 염호(?湖)가 가끔 식 보이고 군데 군데 소금에 저린 뿌연 땅이 펼쳐져 있다. 투루판분지에서 가장 낮은 곳은 아이딩글 염호로서 해수면보다 마이너스 147m나 된다고 하나 멀어서 가 볼 수는 없는 곳이다.

이렇게 건조하고 기온이 높은 곳에 투루판이라는 2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 형성된 이유는 대체 무엇일가? 뒤에 다시 설명하게 된다.

막상 투루판에 도착하니 여기저기 넓은 포도밭이 있고 하미 멜론 석류 옥수수 수수 등 여러 가지 농사를 하고 있었다. 햇볕이 좋아 포도농사가 잘 되고 그것이 주된 생업인 것 같다. 생산된 포도는 일부 포도주도 만들고 있으나 대부분은 말려서 먹기도 하고 유럽 등지로 수출도 한다고 한다. 지나는 길가에 포도 말리는 벽돌집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다. 벽돌들을 엉성 엉성 쌓아 통풍구들을 만들어 둔 포도 말리는 집에 잠시 들어 가 보았다. 푸른 청포도를 줄로 묶어 천정에서 늘어뜨리고 처녀가 한쪽에서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켜 포도를 말리고 있었다. 포도는 그늘에서 말려야 하는 것이란다.

 

 

 

건포도 말리는 아가씨들

 

교하고성(交河故城)

 

교하고성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4세기에 이르기까지 비록 단속적이었기는 하나 이 지역의 정치 군사 중심지로서 역할을 한 곳이다. 즉 기원전 1세기경 차사전국(車師前國)이 교하고성을 도성으로 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뒤에 이웃 고창성(高昌城)에 성립한 고창국(高昌國)이 흥하면서 정치 중심지는 고창으로 옮겨갔으나 군사 요새로서의 중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교하고성이 이름 그대로 두 갈래의 하천으로 둘러 싸여 침식된 수직 단애가 성벽 역할을 하는 자연 요새(要塞)였기 때문이다. 고성의 넓이는 폭 약 600m 길이 약 1600m 되는 지역이다.

현재는 흙으로 된 벽과 언덕밖에 남아 있지 아니하나 유적을 조사하여 입구에서부터 주거지역 행정지역 고루 사원 등의 흔적을 확인해 두고 있다. 고루(鼓樓) 우측에 우물이 남아 있는데 깊이가 30m에 달한다고 하며 옛날에는 이러한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서 지하로부터 찬물을 길러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나무 한 포기 없는 교하고성을 찾았을 때는 정말 더운 날시였다. 따가운 햇빛이 그대로 내리쬐고 있었다. 40도를 훨씬 웃도는 더위다. 텅 빈 옛 성터에서 서둘러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교하고성

 

 

카레이스

연간 강수량이 20mm도 아니 되는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투루판지역 지하에 파둔 카레이스 즉 지하수로를 보고서 단번에 풀리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워낙 저지대인지라 지하수는 매우 풍부하다. 그래서 예부터 사람들이 살고 취락과 도시를 이루었던 곳이다.

천산산맥 그리고 그 지맥들에서 내려오는 눈 녹은 물은 땅 밑으로 스며들어 투루판지역으로 모여들고 때로는 호수를 이루는가 하면 오아시스로 분출하기도 하고 또 지하에 머물러 있기도 한다. 이 물을 육상으로 끌어 올 방법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지하에서 水源보다 낮게 수로를 파서 물을 옆으로 이동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카레이스는 투루판분지에 사방으로 수 백 개 뻗어 있으며 이를 모두 합하면 총 길이가 3000 km는 족히 될 것이라 한다. 카레이스는 만리장성(萬里長城) 경항운하(京杭運河)와 함께 흔히 중국 삼대역사(三大役事) 중 하나로 곱히고 있다.

 

                                                카레이스(지하수로) 

 

카레이스는 사람이 사는 동네에서는 지상으로 그 모습을 들어낸다. 이 곳에서 물을 길러 농사도 짓고 생활용수로 쓰기도 하는 것이다. 수로의 넓이는 겨우 사람 한 둘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수년전 월남 호지민시 근처에 있는 구치 지하통로를 가 본 일이 생각난다. 베트콩들이 지하에서 주둔하고 이동하던 요새였다는데 굴의 넓이가 조그마한 사람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되는데 이곳 카레이스 지하수로는 그것보다 넓게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물 귀한 줄을 잘 모르고 사는데 이곳에 와보니 정말 물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귀한 물을 필요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고대 중국 사람들의 지혜와 노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화염산(火焰山)

시가지를 벗어나 동쪽으로 약 20분간 달리니 왼쪽방향에 화염산이 보인다. 앞에 펼쳐져 있는 들판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온통 자갈밭이다. 화염산은 붉은 색 황토 산으로 날씨가 워낙 더우니 마치 불꽃이 이글거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양을 하고 있다. 동서로 뻗어 있는 약 100 km 쯤 되는 조그마한 산맥이다. 가장 높은 지점은 850 m 정도라고 한다. 간단히 기념촬영만 하고 뒤 돌아 섰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마에 땀방울이 절로 흐르는 혹서이다.

 

  

 

                                                                                      화염산

 

 

(5) 돈황(敦煌, 둔황)

 

우루무치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가서 돈황 공항에 내렸다. 조그마한 시골 공항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돈황 자체 인구는 2만명 정도 밖에 아니 되며 순전히 관광객들만 출입하기 때문이다.

돈황은 감숙성 서쪽 끝에 위치한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며 동서교역의 중계지로서 실크로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요지이다. 이곳은 고비사막의 남쪽에 자리한 메마르고 건조한 지역이나 당하(黨河)라는 작은 강이 멀리 기련(祁連)산맥의 설산에서 눈 녹은 물을 끌어 와 일직부터 사람들이 사는 성읍을 이루었던 곳이다.

이 지역은 전한(前漢)의 무제가 기원전 111년 황하 서쪽 하서회랑(河西回廊) 지대에 설치한 하서사군(河西四郡 즉 武威, 張掖, 酒泉, 敦煌)의 하나이며 서역 방위를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돈황은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한나라 국가권력이 미친 마지막 지점이었다. 따라서 돈황 교외에 양관(陽關) 옥문관(玉門關) 등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대(宋代)에 와서 동남 아시아에서 인도양과 아라비아 해협으로 나가는 바다길이 열리면서 실크로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지만 동서를 잇는 육로 교역로의 요충으로서 돈황의 역할은 청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한편 정치적으로도 이 지역이 늘 중원의 지배를 받았던 것은 아니며 때에 따라서는 티벳트계의 서하(西夏),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匈奴)와 돌궐(突厥), 몽골의 징기스 칸 등이 이곳을 지배 내지 석권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돈황은 동서의 사람들이 가져온 문화가 꽃피운 실크로드의 교차점으로 늘 남아 있었다.

돈황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중국 삼대석굴 중의 하나인 막고굴(莫高窟)이다. 이밖에도 명사산(鳴沙山) 월아천 등 볼만한 곳과 양관 옥문관 등 역사적 유적이 많다.

 

명사산 

 

막고굴(莫高窟)

막고굴은 시내 동남쪽 약 25km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명사산 줄기의 사암(沙岩) 단애(斷崖)에 조영된 무수한 석굴군(石窟群)이다. 당나라 중종 때(698년) 이극양(李克讓)이 수찬한 막고굴불감비(莫高窟佛龕碑)에 의하면 전진(前秦) 건원 2년(서기 366년) 낙준(樂?)이라는 승려가 수행하던 중 홀연히 1000여 불상을 대면한 뒤 절벽에 감실을 파고 불상을 모신 것이 최초의 석굴조영이며 그 뒤 북량(北凉) 북위(北魏) 수(隋) 당(唐) 송(宋) 원(元)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석굴이 조영되었다. 도합 1000여개의 석굴이 만들어졌으나 모래 바람에 의하여 메꾸어 졌거나 허물어진 것이 많아 지금 494개의 석굴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석굴들은 대체로 보존상상태가 좋은 편인데 이것은 그동안 여러 민족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지나갔어도 석굴들은 크게 파괴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막고굴 대불전

 

막고굴에 현재 남아 있는 불상은 약 2400여체라 하며 벽화의 총 면적은 45,000 평방미터가 되고 벽화의 벽면을 모두 연결한다면 그 길이가 16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막고굴을 관광하기 위해서는 현장 사무실에서 그룹별로 배치하는 전문 안내자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관광객이 워낙 많이 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문화재 보호라는 명분으로 자기네들이 교육시킨 사람들을 쓰기 위한 것이기도 한 것 같다.

배치된 안내자는 열쇠를 가지고 중요한 굴에 잠겨 있는 출입문을 열어서 우리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준다. 따라서 모든 석굴을 다 볼 수는 없고 안내자가 선택해서 열어주는 곳만을 볼 수 있다.

 

                                                       막고굴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북대불(北大佛)이 모셔진 9층 누각이다. 그 안에는 무려 35.5 m 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북대불은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그 남쪽에 역시 당나라 현종때 만들어진 높이 26 m의 남대불이 있다. 그 밖에도 257굴 57굴 428굴 16굴과 17굴 등 보존상태가 좋고 중요한 석굴들은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이 워낙 건조하기 때문에 불상과 벽화의 훼손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옥에 티라 할까. 일부 석굴에서는 불상이 훼손되고 사람들이 불을 피워 벽화가 변색된 곳도 있다. 이는 19세기까지만 하여도 이 지방 유지들 사이에서 이 석굴의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유지 보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98굴 각국왕자도 

80년대 이후 중국이 대외로 개방되면서 석굴 보존을 위하여 적지 않은 투자가 이루어져 왔는데 처음에는 일본의 유수 기업체들이 많이 협찬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홍보하는 현판들이 현장에 세워져 있었다. 돈황의 석굴과 유물에 관해서는 일지기 일본에 잘 알려 졌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의 관심이 많고 돈황에는 일본 관광객들의 단체가 직항로 편으로 많이 오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에도 일본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이 보였다.

특히 초기의 석굴에 모셔진 불상과 보살 그림들은 인도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인상을 풍긴다. 벽화들은 대부분 불교 그림들이나 그 이외에도 수렵 농경 어로 등 여러 가지 일상생활상을 그리고 있으며 당시의 학교 병원 술집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어떤 벽화는 석굴조영을 후원한 지배계급의 인물도를 그린 것도 있고 공전을 기부한 지방 토호의 부인 소실 누이동생 등 여인들을 그들의 세력순으로 줄 지어 세워 놓은 그림도 있다.

석굴의 역사가 길기 때문에 중간에 여러 차례 보수한 흔적도 남아 있다. 즉 어떤 석굴에는 오래된 벽화위에 석회를 다시 발라 새 그림을 그리는 등 이중 삼중으로 그린 곳도 있었다.

인물 벽화를 보면 사람의 얼굴색은 그의 대부분이 새까맣게 변색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사용했던 안료가 주로 돌가루 등 천연 무기물질에서 채취한 것이어서 얼굴색에 포함되었던 철분이 산화되어 검게 변색했기 때문이다.

 

                                                      제45굴 보살상 

 

20세기 초 돈황 석굴이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 석굴에서 많은 고문서와 고미술품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우연히 16굴 입구 오른편 벽에서 17굴(장경동)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근처에 살던 왕원록(王圓?) 이라는 도사가 이 17굴을 발견하고 그동안 숨겨져 왔던 불경과 문서 및 역사 지리 문학 역법 등의 서적 그림 법기 등 보물 약 5만점을 여기서 찾아내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이 보물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러시아의 오브리체프,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 프랑스인 펠리오, 일본인 오오다니 등이 수년에 걸쳐 왕원록으로 부터 헐값에 그 대부분을 사가게 되었다. 이것들이 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으로 퍼져 나가면서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혜초(慧超, 704 - 787) 스님이 인도로 가서 불교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남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두루마리도 바로 그 때 이 17굴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화재라 할 수 있는 이 왕오천축국전은 당시 하노이대학 교수로 있었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페리오가 1908년 돈황에서 수집한 자료 중에 포함된 것으로서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17굴(장경동) 시녀공양도 

그러면 왜 이런 비밀 굴을 파서 경전 등 고문서들을 감추어 두었을까? 아마 이민족의 침략과 전란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 그런 지혜를 내었을 것인데 그로 말미암아 귀중한 자료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은 큰 다행이라 생각된다.

 

명사산(鳴砂山)과 월아천(月牙泉)

돈황에는 막고굴 뿐만 아니고 명사산이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시가지에서 어디서나 보일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명사산은 가는 모래로만 이루어진 산이다. 명사산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선과 각이 뚜렷한 절묘한 경관을 나타낸다. 바람이 불면 모래알끼리 서로 부디쳐 마치 동물이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명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여태 끝 실크 로드 곳곳에서 보는 황무지와 자갈밭과는 전혀 다른 모래 사막 경치이다. 신발을 벗고 명사산 중턱까지 올라가 모래를 타고 미끌어져 내려오는 데는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다들 즐거워 한다. 여기서는 작은 돌맹이 하나 구경 할 수 없다.

 

 

명사산 원경 

 

명사산 오른편에는 마치 초생 달 모양을 하고 있는 월아천이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물론 오아시스의 분출로 생긴 못이다. 그러나 모래바람에도 메꾸어 지지 아니 한 채 수 천년 세월을 두고 사막 가운데서 마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신비스런 호수다. 모래 산과 호수가 함께 이루어 내는 경관이 더욱 멋있다.

명사산은 달밤에 와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산 밑까지 들어가는 길은 낙타를 타게 되어 있다. 달밤에 낙타를 타고 월아천까지 가고 오는 풍치는 매우 낭만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녁 늦게 까지 문을 열어 두고 있다. 낙타 등에 몸을 싣고 별자리가 가르치는 대로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모습이 연상 된다.

 

                                                           월아천 

 

 

양관(陽關)

양관은 옥문관과 함께 한(漢)대에 설치된 관문의 하나이다. 정치적으로 한나라의 권력이 미치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오늘날의 국경지대 세관과 같은 역할을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통제하던 곳이다. 지금 관소의 흔적은 모두 없어졌으나 한대의 봉화대로 추측되는 흙벽돌로 된 언덕 하나가 남아 있다. 다만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이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건물을 지어두고 있으며 그 안에는 상점들도 있다.

이 곳에서는 “서쪽 양관을 나가면 옛 친구를 볼 수 없을 것이라”(西出陽關無故人)는 글귀를 마지막 구절로 하는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를 쓴 족자들을 팔고 있었다. 이 구절은 심청전에서 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부녀가 이별하는 장면에서 “서출양관무고인은 위성의 붕우 이별”이라는 유명한 대사로 나왔던 것이라 기억에 새로웠다.

참고로 그 왕유의 시를 여기에 옮겨 본다.

 

送元二使安西

 

渭城朝雨?輕塵     위성의 아침 비는 가벼운 먼지를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앞 버드나무는 푸른색이 새로워졌네.

勸君更盡一杯酒     그대에게 권하는 이 한잔 술을 다시 비우게

西出陽關無故人     양관 밖 서쪽으로 떠나고 나면 옛 친구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네.

 

이것은 왕유가 친구인 원이(元二)라는 사람이 안서(安西)도호부(투루판에 있었음)로 출장 갈 때 송별주를 기울이면서 읊은 시이다. 위성(渭城)은 장안(지금의 西安) 교외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지명이며 당나라 때 지방으로 나갈 때는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때는 황사가 일던 봄이었던 것 같고 황사 바람이 불 때 봄비가 촉촉이 내려주면 그 이상 상쾌한 것이 없을 것인즉 이러한 기분이 잘 나타나 있는 시이다.

 

양관 터에서

 

 

(6) 난주(蘭州, 란저우)

 

    돈황에서 비행기로 약 한 시간가량 걸려 난주에 도착했다. 난주는 감숙성(甘肅省)의 성도로서 인구는 200만이 넘는 서역 최대의 도시이다. 지리적으로만 보면 중국대륙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하서회랑(河西回廊)이나 청해성(靑海省)방면으로 나가는 교통의 요처이다. 시가지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시내 중심은 황하 남쪽에 있다. 난주는 상당히 높은 지대에(해발 1510 m)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름에도 심하게 덥지 아니한 것 같았다.

    청해성 야라다스오산(5242 m)에서 발원하여 장장 5464 km를 굽이치며 황해로 흐르는 대 황하(黃河)가 만나는 최초의 큰 도시가 난주이다. 중국에서는 황하를 흔히 모하(母河) 즉 어머니 강이라 한다. 중원지방을 흐르는 젓 줄이기 때문이다. 시내 강가에 있는 한 공원에는 붉은 화강석으로 조각한 거대한 어머니 상이 있었는데 양귀비를 모델로 하여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아기를 옆에 끼고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황하의 물은 붉은 황토 빛을 띠고 있었으며 이곳이 상당한 상류지대임에도 수량은 엄청난 양이었다.

   난주만 하드라도 외국자본의 유입과 공업화가 이미 상당히 진전된 곳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녁에는 시내 곳곳에서 양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사람들의 외모만으로는 생활수준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곳에도 위구르족이 꽤

많이 살고 있으며 시내 서쪽과 황하 북쪽 산록에 있는 그들 주거지역에 주로 모여 산다고 한다.

                                             황하가 모하라는 의미로 세운 강변의 어머니 석상

 

 

백탑산공원(白塔山公園)

시내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 황하 북안에 있는 백탑산(해발1700m) 절벽에 조성된 공원이다. 시내가 이미 1500m 쯤 되니까

강변에서 약 200m 높이의 산이다. 산위에 있는 높이 1m의 백탑은 티벳트에서 징기스 칸에게 파견된 한 라마승이 이곳에 이르러 병사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공원을 오르는 계단 길옆에는 화려한 누각을 많이 지어 두고 있으며 이곳에서 황하와 난주 시내를 내려다보는 경관은 매우 아름답다.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난주에서 서남쪽으로 약 70 km 되는 거리에 있는 석굴군이다. 대형 수력발전소가 있는 유가협(劉家峽, 류자샤) 댐 상류 황하변에 자리 잡고 있다. 버스로 유가협 댐까지 가고 거기서 배를 타고 다시 30분정도 가야 한다. 유가협 댐은 1954년에 시작하여1974 년에 완공된 길이 840m 높이 147m 저수량 57억 입방 미터의 대형 다목적 댐으로서 1,225MW 의 전력을 생산, 중국 서부지역 일대에 공급하고 있으며 하류에 450만 핵트아르의 농지에 관개를 하고 있다. 중국 자체 기술로 건설된 최초의 대형 댐이다. 황하하면 흔이 누른 황토물만 생각하게 되나 여기서는 토사가 침전되어 유가협 댐의 물은 새파란 맑은 물이라 인상적이었다.

유가협 댐으로부터 상류방면으로 배를 타고 약 한 시간가량 올라가면 병령사(炳靈寺)를 보게 된다. 병령사의 중국 발음 ‘빙링’은 티벳트 말로 천불(千佛)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곳에 불상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은 용흥사(龍興寺) 또는 영암사(靈岩寺)라고도 불리었던 것인데 현재는 허물어져 없고 절터만 남아 있다.

 

병령사 석굴 

계곡 단애에 183개의 석굴이 조영되어 있다. 이 석굴들은 서진(西秦)시대부터 청나라 때 까지 사이에 조각되었다고 한다. 일부 석굴들은 연대가 워낙 오래 되어 풍화 마모되어 부처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다. 그 중 171굴에 높이가 27 m 나 되는 대불 한 좌가 있다. 대불은 얼굴부위가 다소 훼손되었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다. 대불 위에 있는 작은 석굴 169굴에는 건홍(建弘) 원년(420)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으며 중국석굴 중 매우 오래된 석굴로서 연구대상이 되는 유명한 석굴이라 한다.

이 부근은 석굴뿐만 아니라 황하 강변의 퇴적층(堆積層)이 융기하여 매우 아름다운 특이한 산세를 이루고 있어서 강변 경치가 매우 빼어나기로 소문 난 곳이다. 계림(桂林)의 산세나 곤명(昆明)의 석림(石林)에 비할만한 특이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일행은 난주에서 2박하고 서안으로 나왔다.

 

                                                  병령사 대불 

 

 

                                                       

 

 

                                                                           유가협 상류지역 강변 풍경 

 

 

(6) 서안(西安, 시안)

 

서안은 중국 7대 고도의 하나이며 그 중 가장 오래된 도읍이다. 중원에서 보면 서안이 가장 서쪽에 위치하나 서역으로 가는 실크 로드의 시발점이 된다. 따라서 서안은 옛날부터 서로 다른 문명이 교차한 도시이었다. 일지기 주(周)나라를 비롯해서 한(漢) 진(秦) 당(唐) 등 12왕조의 도읍이었으며 1000년 이상 동안 크고 작은 나라의 수도가 되었던 도시이다.

서안에 도읍을 정한 최초의 왕조는 주(周)나라이다. 주나라는 원래 서쪽에서 일어난 나라이나 흉노의 잦은 침략과 약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고공단보(古公亶父) 때에 기산(岐山)의 산록 주원(周原)으로 나왔으며 여기서 그 지명을 따 주(周)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문왕(文王) 때에 풍수(?水)를 따라 동남으로 진출하여 풍(豊)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무왕(武王) 때에 다시 동쪽으로 나와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이전하였는데 호경은 서안 가까운 곳이다. 무왕은 여기서 중원으로 원정하여 은(殷) 왕조를 멸망시키게 된다.

다음 서안을 도읍으로 하였던 나라는 진(秦)나라였다. 진나라의 조상들도 서쪽 지금의 감숙성 진주(秦州) 근처에서 말을 많이 기르고 또 잘 기르는 것으로 이름났었는데 점점 강성해지면서 동쪽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시황제(始皇帝)의 6대조 효공(孝公) 때에 서안 서북쪽 함양(咸陽)으로 도읍을 옮겨 왔다. 진의 시황제는 전국시대 7웅(雄) 중 나머지 여섯 제후국을 병탄하여 천하통일을 이루고(기원전 221년) 함양에서 가까운 위수(渭水)남쪽에 아방궁(阿房宮)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천하의 부호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시황제가 지방 순시 중 갑자기 병사하자 진나라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고 제후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아방궁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나라가 망하게 된다. 먼저 진나라 함양으로 처 들어온 세력은 초(楚)의 패왕 항우(項羽)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항우는 함양을 도륙하고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을 죽이고 궁실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은 3개월동안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재화와 보물 및 부녀자들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항우는 병력으로는 오히려 열세였던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패하여 스스로 자결하니 천하는 유방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리하여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서안에 도읍하여 이를 장안(長安)이라 하였고 장낙궁(長樂宮)을 지었다. 그 뒤 북조(北朝) 수(隋) 당(唐) 나라들도 장안을 도읍으로 정하였으며 특히 당나라 때 장안의 번성한 모습은 이웃 나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지도를 보면 주(周)의 풍경 호경 진(秦)의 함양 한 수 당의 장안은 관중평원(關中平原)의 동서축 상에 서로 인접해 줄지어 있다.

당나라 때 장안은 장방형의 큰 성곽으로 쌓여 있었다. 성곽이 조영되기 시작한 것은 수(隋) 나라 초대 황제 문제(文帝) 때인데(582년) 그것이 완성되기는 당나라 3대 황제 고종 때로서(654년) 7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지금 서안에 남아있는 성곽은 명나라 때 조성한 것으로서 그 규모는 당나라 때 성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는 성곽 밖에 있는 대안탑(大雁塔) 소안탑(小雁塔) 청룡사(靑龍寺) 등은 당대에는 모두 성안에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때 장안에는 외국의 사신과 무역업자들 그리고 이란 등 서역에서 온 여자들까지 있어 외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실크 로드가 시작되는 서문(西門) 밖에는 서역 출신 위구르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서안에는 황궁도 물론 많았다. 시내에는 주로 당나라 때의 궁전으로 태극궁(太極宮) 대명궁(大明宮) 흥경궁(興慶宮)의 유적이 있다. 현종황제가 거처했다는 흥경궁 자리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현종과 양귀비가 놀았다는 심향정(沈香亭)이 재건되어 있다.

서안에는 사원도 많다. 불교 도교 이스람교 등 서로 다른 종교들이 공존하였다. 지금도 자은사 대흥선사 청룡사 청진대사등 유명한 절들이 남아 있다.

서안 근처에는 왕능이 많은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진시황능을 비롯해서 한나라와 당나라 때 황제들의 능이 많이 있다. 그중 한고조 유방(劉邦)의 장능(長陵)과 여후능(呂后陵) 당나라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侯)를 합장한 건능(乾陵) 양귀비묘 등이 유명하다.

서안의 음식 중에는 교자(餃子, 작은 만두)와 포자(包子, 큰만두)가 유명하다. 특히 시내 중심부에 있는 종루(鐘樓)근처에는 유명한 만두집이 많고 꼭 한번 들러 볼만한 곳이다. 큰 음식점에서는 만두를 먹으면서 가무를 구경할 수 있다.

 

서안 명대 성벽 

현재 서안은 IT산업의 메카로서 크게 발돋움하고 있다. 소위 Digital Silk Road(數字絲綢之路)를 표방하고 있으며 지난번 중국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의 로켓트 엔진도 이곳에서 개발된 것이다. 지금 서안은 다시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있으며 많은 외국 첨단산업체들이 몰려오고 있다. 남문 밖의 거대한 신시가지에는 8000 여 기업체로 형성되는 대형 첨단기술 클러서터가 형성되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되는 제 11차 경제계획이 표방하는 기술 집약형 지식경제 건설 대열에서 서안이 그 앞장을 서고자 하는 것이다.

서안에는 대학도 많아 멀리서 모여 던 학생 60만 명이 100여개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오래 된 고도 서안에는 가 볼 곳이 너무 많다. 필자는 서안에 네 번이나 갔으나 아직 못 가본 곳이 적지 않다. 아래에서는 몇몇 곳을 중점적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비림

 

비림(碑林)

이곳은 한(漢)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석비와 묘비 비문 약 2300 여점이 전시되어 있는 석비(石碑) 박물관이다. 이 비림은 북송 시대에 주로 당나라 때의 금석문들을 한곳에 모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 한다.

많은 석비 중 당 현종(玄宗)황제가 유(儒)가의 효경에 주해를 붙여 예서(隸書)체로 쓴 석대효경(石台孝經)이 유명하다. 또한 114개의 석비 양면에 주역(周易) 상서(尙書) 예기(禮記) 효경(孝經) 논어(論語) 등 유교 12경 65만 여 글자를 새긴 개성석경(開成石經)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대작이다. 이것은 당나라 문종(14대) 때에 5년에 걸쳐 제작한 것이라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처 중국으로 전래된 과정을 기록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밖에도 안진경(顔眞卿)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유공권(柳公權) 등 유명한 서가들에 의하여 휘호된 석비들을 비롯해 볼만한 것이 많다.

 

미림 내부 

 

 

                                                    

자은사(慈恩寺)와 대안탑(大雁塔)

자은사는 당나라 3대 황제 고종(高宗)이 어머니인 문덕황후(文德皇后)를 공양하기 위하여 648년에 세운 절이다. 자애 깊은 모친의 은덕을 추모한다 하여 사찰 이름을 자은사로 하였단다. 당대에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컸다고 하나 병화로 모두 불타고 없어졌으며 후대에 와서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이 사찰이 유명한 것은 당나라 때 고승 현장(玄?)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하여 지은 대안탑(大雁塔)이 있기 때문이다. 경내에 있는 높이 64m의 7층 4각 탑이 대안탑이다. 652년 건립 당시에는 5층 탑이었으나 그 후 여러번 허물어지고 중수되는 과정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현장은 여기서 산스크릿트(梵語)로 씌어진 불경들을 번역하고 출판도 했던 곳이다.

 

                                                     자은사 대안탑 

 

화청지(華淸池)

서안 교외로 나가 진시황능과 병마용박물관으로 가는 길가여산(驪山) 기슭에 화청지가 있다. 옛날부터 내려온 온천장이다. 역대 왕조의 이궁(離宮)과 욕탕들이 조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그 중 유명한 것은 당나라 천보년(天?年, 742 - 756)때에 조성된 화청궁(華淸宮)이다. 지금 화청지(華淸池)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 보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청나라 때 지은 건축물이다.

화청지는 특히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서려 있는 곳이라 더욱 유명하다. 양귀비(楊貴妃)는 이 온천에서 아름다운 몸을 씻었다고 한다. 정원 연못가에는 양귀비의 석상이 서 있다. 여러 욕탕들이 건물 안에 마련되어 있으며 양귀비가 사용했다는 해당탕(海棠湯)을 비롯해서 연화탕(蓮花湯) 태자탕(太子湯) 상식탕(尙食湯) 등 온천장 유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욕탕에는 물이 말랐으며 지금 일반인이 들어 갈 수 있는 온천탕은 가족탕으로 따로 한쪽에 마련되어 있다.

 

양귀비 목욕탕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楊玉環)이며 원래 현종 아들 수왕(壽王)의 비로 궁중에 들어 왔었는데 현종의 눈에 들어 현종의 귀비(貴妃)가 된 사람이다. 양귀비는 총명했고 특히 가무(歌舞)에 능하였으며 절세미인이라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친척인 불량배 출신 양국충(楊國忠)에게 정사를 맏겨 두고 방탕하니 이에 불만을 품었던 안록산(安祿山) 등이 755년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반군의 세력이 커지면서 장안 도성을 장악하게 되자 현종은 서쪽으로 피란하였다. 수행하던 장병들마저 일어나 양국충을 죽이고 양씨 일족의 제거를 요구하자 현종은 결국 양귀비의 죽음까지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비극으로 끝나는 러브 스토리이다.

화청지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으로는 1936년 장개석(蔣介石) 이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에 의하여 잡히는 소위 서안사건이란 것이 있다. 주은래(周恩來)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사건 때문에 공산당을 상대로 한 내전이 일단 종식되고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립되어 국부군과 공산군이 협력해서 항일(抗日)투쟁에 전념하게 된다.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있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당시 장개석이 거처했던 오간청(五間廳) 유리창에는 지금도 그 때 쏘았던 탄흔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화청지

 

진시황제능(秦始皇帝陵)

화청지에서 다시 임마공로(臨馬公路)를 따라 동쪽으로 10 km 정도 더 가면 오른편에 작은 산처럼 보이는 진시황제능(秦始皇帝陵)이 나온다. 요즘에는 이 능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또 오를 수 있게 해 두고 있다. 필자가 최초 서안을 방문했을 때 즉 북경에서 아시아개발은행 연차 총회가 열렸던 1989년 당시만 해도 이 능은 작은 산과 같았고 그저 석류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내 외의 관광객들은 발굴 된지 얼마 되지 아니한 병마용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었고 시황제 능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 능의 높이는 약 76m 이며 모양은 정방형이고 둘레는 약 2km가 된다. 그리고 능을 둘러싸고 내성과 외성의 두 겹 축대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지금은 기단의 형체만 남아 있다. 그것은 능은 궁성이고 내성과 외성은 궁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성의 성곽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능은 시황제 즉위이후 착수하여 천하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죄수 70만 명을 동원하여 사후를 위한 지하 궁전으로 축조했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역산(?山)의 시황제 지하궁전에는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시위(弓箭)를 만들어 놓고 그 곳을 파 접근하는 자를 쏘게 하였으며 수은(水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여 흘러가도록 하였고 위에는 천문(天文) 도형으로 장식하고 아래는 지리(地理)모형을 설치해서 인어(人魚)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불이 꺼지지 않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시황제는 13세에 즉위하였으며 최초의 능묘 공사는 즉위와 동시에 시작하였는데 치세 37년을 경과한 시황제 사망 시에도 다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유해는 2세 황제 호해(胡亥)에 의해 묻혔으며 자식을 낳지 못한 후궁과 궁녀 1만 여명이 동시에 순장되었고 묘실 입구를 폐쇄할 때에는 일하던 장인 3천여 명을 그대로 가두어버림으로써 내부의 비밀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따르면 항우는 진의 궁전 재물을 약탈한 후 방화하여 잿더미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황제의 무덤도 파서 재보를 가져갔다고 하는데 실제 이 능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지하 궁전에는 지금도 수은 기체가 충만해 있는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다. 도굴을 위해 파낸 흔적이 한 두 곳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모두 깊지 않았으며 아직까지 도굴되지는 아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000 여체의 병마용과 전차군단이 발견된 곳은 시황제능의 동문 밖 1.5 km의 지점이므로 그들은 이 지하궁전을 지키는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생전의 진나라 군대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공원으로 단장한 진시왕능  

 

병마용박물관(兵馬俑博物館)

시황제 능을 지나 계속해서 2km 쯤 더 나가게 되면 그 유명한 병마용이 발굴된 곳에 도착한다. 엽검영(葉劍英) 원수가 휘호한 ‘秦始皇帝兵馬俑博物館’이라는 편액이 건물 정면에 걸려 있다.

관내에 들어가면 도기로 만든 병사 말 전차들이 흙을 파낸 구덩이 아홉 개에 줄지어 서있다. 그 위로는 커다란 천정으로 덮어씌우고 사방은 벽을 처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소위 1호 갱(坑)이라고 하는 것으로 제일 먼저 발굴된 곳이다. 이 1호 갱 안에는 병사용과 마용이 약 6000체 들어 있다고 하는데 그 모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전체의 약 7분의 1정도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병마용보다 훨씬 더 많은 도용들이 땅속에 그대로 묻혀 있는 것이다.

이 병마용들은 1974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수의 도용(陶俑)이 묻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뒤에 2호갱 3호갱을 더 찾아 발굴해 보니 실제 크기와 같거나 약간 크게 보이는 7000여 병사용(兵士俑)과 100 여대의 전차용(戰車俑) 및 400 여필의 마용(馬俑)이 땅 밑에서 마치 살아 숨 쉬는 양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있음을 발견하여 세계를 깜작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2호갱과 3호갱은 일단 발굴했다가 모두 원상대로 다시 묻어버렸다고 한다. 이 병마용들을 시황제(始皇帝) 능 앞에 정렬시켜 사후에도 황제가 병사나 전차 군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사기’(史記) ‘한서’(漢書) ‘자치통감’(資治統監) 등 그 어느 역사서에도 시황제의 능묘에 관한 기록만 있지 이 병마용 배치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그 많은 도용들을 구워 만들려면 많은 도공과 일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작업하였을 텐데 전혀 기록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병사용들의 얼굴을 보면 기골이 장대하고 우리가 흔히 보는 한족의 모습과는 다르며 이국적인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 크기는 실물대보다 다소 크게 만들어 병사들의 위용을 과시하려고 한 것 같이 생각된다. 그리고 수염 머리모양과 두건이나 관을 쓴 모양도 제 각각 다른데 이는 출신지 직위 직책 등에 따라 다른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병사들이 투구나 군모를 쓰지 아니하고 대부분이 머리를 묵어 올린 것이 독특하다. 이들은 모두 중원(中原)을 향하여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그 모습에 기백과 박력이 넘친다.

지금 우리가 보는 병사용들은 손에 창이나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나 원래 발굴 당시에는 창 검 활 화살 등을 제각기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기 특히 창과 검은 모두 청동제의 실물이라 하며 따라서 현재 지하에 묻혀 있는 무기만도 엄청난 수량이다. 아무튼 진나라의 병사들의 모습으로 보아 강병이었던 것이 확실하고 전국 칠웅(戰國七雄) 증 하나였던 진이 다른 여섯 개의 국가를 능히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겠다. 이곳에서 출토된 말(馬俑)들을 자세히 보면 머리가 길고 귀가 쫑긋하며 몸집이 그리 크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서북방 기마민족들이 초원을 누비며 탔던 그런 말이 아닌가 싶다.

지금 박물관 안에는 시황제능 서쪽에서 발굴된 금은으로 장식한 청동제 마차 하나를 전시해 두고 있다. 이것은 병마용의 발굴로 자극을 받은 중국 고고학계가 시황제능 근처를 세밀히 조사한 결과 봉토(封土)에서 불과 18m 떨어진 곳에서 1980년에 찾아 낸 것이다.

발굴된 마차는 두 대였다. 땅속에 아직 네 대가 더 있다고 한다. 발굴 순으로 각각 1호 마차와 2호 마차로 명명하였는데 1호 마차는 사람이 서서 타는 입차(立車)이고 2호 마차는 앉아서 타는 안차(安車)이었다.

박물관에 전시해 둔 것은 2호 마차 안차로서 말 네 마리가 끄는 차이다. 실물 크기의 절반 정도의 크기로 보인다. 차실 앞에 앉아 말을 모는 사람은 단검을 차고 구리수염을 했는데 목에는 스카프를 감고서 그 양 끝을 가슴 앞으로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통 마부 같지는 아니하다. 이러한 안차는 보통 사람이 탈 수는 없었고 황제나 고관 대작이 타는 것이었다. 말이 네 필이라 황제의 마차는 아닌 것 같으며 아마 승상이나 대신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황제의 마차는 보통 말 여섯 필이 끌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 진나라 때 벌서 이렇게 화려하게 금은 장식을 한 청동제 마차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병마용 박물관 외부

 

                                                     1호갱 내부 

 

 

 

 

 

 

 

 

 

 

                                                              진시왕능 근처서 발굴한 동마차(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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