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합니다,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
(시편65,5).
기도자들은 용서받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살도록 선택받았다.‘하느님께 가까이 오도록 뽑힌 이들’은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로 판명된 신앙공동체의 사람들이다.‘하느님의 뜰 안에 사는 것’은 사제 신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하지만 그것은 거룩한 성전과의 유대로 인해 하느님께 가까이 있었던 경험을 나타내는 은유로 더 적합하다.성전의 거룩함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7)라고 말했다.
용서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뜰 안에서 살기 위해 가까이 오도록 선택받고 하느님 집의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친교의 복을 누리게 된다.“좋은 것”은 축제에 참여하고 전례의 선물인 제사 음식을 먹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성전에서 제사 음식을 나누는 것은 영적 교제를 상징한다.암브로시우스에 따르면,하느님의 좋은 것들과 거룩한 덕행을 지닌 자는 삶의 모든 환경에서 행복해하고 만족한다.
시편 65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65편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한다.하느님은 죄를 용서하고 모든 세상을 구원하며 비를 내려 땅을 풍요롭게 하시는 분으로서 찬양받으신다.첫째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다(3절).우리는 우리의 죄가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께 기도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실수나 잘못으로 죄책감을 느낄수록 하느님께 더 기도해야 한다.시인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하느님 가까이 사는 사람은 복되다고 한다(5절).그는 성전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산다.하느님의 집에서 살고자 하는 즐거운 희망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상들 가운데 하나다.‘하느님의 집에서 산다’는 은유는 열심한 기도자가 하느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하고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행위에 계속 참여함을 표현한다.둘째로 하느님은 창조와 역사 안에서 놀라운 행적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6절).하느님은 크신 힘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혼돈의 세력을 지배하며 세상의 질서를 세우시는 분이다(8절).이에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이가 놀라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한다(9절).셋째로 하느님은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려 땅을 강복하시는 분이다(10절).시인은 인간과 짐승에게 필요한 것을 풍부히 내려주심(10절-14절)에 대해 감사드린다.풍부한 물로 땅은 풀을 자라게 하여 양 떼가 불어나고 골짜기들에는 곡식이 넘쳐흐른다.하느님의 복은‘넘치고 풍요롭고 가득하다.’이런‘넘침’의 표현들은 그분의 은혜로운 돌봄과 큰 힘 덕분이다.하느님은 비를 내림으로써 땅 위에 생명이 넘쳐나게 하신다.예수님은“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고 말씀하셨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42-89편/바오로딸)
Ⅳ.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
84.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내세울 때에 모든 피조물이 각기 기능이 있고 그 어느 것도 필요 없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물질세계 전체는 하느님의 사랑,곧 우리에 대한 무한한 자애를 나타냅니다.흙과 물과 산, 이 모든 것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하느님과 우리의 우정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지니는 특정 장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우리는 모두 좋은 추억이 깃든 장소를 마음에 담아 둡니다.산속에서 성장하거나 어릴 때 냇가에 앉아 물을 마셔 본 이들,또는 동네 공터에서 놀아 본 이들이 그 추억의 장소로 돌아가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되찾으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85.하느님께서는 소중한 책을 쓰셨습니다.이 책의“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디양한 피조물들입니다.”캐나다 주교들은 하느님의 이러한 계시에서 배제된 피조물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표현하였습니다.“가장 뛰어난 장관에서부터 가장 작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경탄과 경외의 끊임없는 원천입니다.이는 또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계시입니다.”일본 주교들도 매우 시사하는 바가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은 하느님 사랑과 희망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피조물에 관한 이러한 관상은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합니다.“믿는 이들에게 피조물에 관한 관상은 메시지를 듣고,역설적인 무언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우리는“성경에 담겨 있는 고유한 계시와 더불어,작렬하는 태양과 드리워진 어둠 안에도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이루는 관계 안에서 자신을 깨닫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나는 세상을 표현하면서 나 자신을 표현합니다.나는 세상의 거룩함을 헤아려 보면서 나 자신의 거룩함을 살펴봅니다.”
86.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세상 전체는 하느님의 다함없으신 풍요를 보여 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다수성과 다양성이“제1원인의 뜻”에서 나온다고 현명하게 강조하였습니다.그 제1원인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시고자 각 사물 안에 부족한 것이 다른 것들로 보충되기를 바라신 분”이셨습니다.하느님의 선하심은“단 하나의 피조물이 적절하게 반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그 다양한 관계 안에서 피조물의 다양성을 이해해야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전체 계획에서 성찰할 때 모든 피조물의 의미와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하기 될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이 서로 의존하기를 바라신다.해와 달,전나무와 작은 꽃 한 송이,독수리와 참새,이들의 무수한 다양성과 차별성의 장관은 어떠한 피조물도 스스로는 불충분함을 의미한다.이들은 다른 피조물에 의존하여 서로 보완하며,서로에게 봉사하면서 살아간다.”
87.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주님께 대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피조물과 함께 주님을 흠숭하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이러한 찬미와 흠숭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노래에서 나타납니다.
“저의 주님,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특히 형제인 태양으로 찬미받으소서.
태양은 낮이 되고 주님께서는 태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나이다.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내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나이다.
저의 주님,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달과 별들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달과 별들을
맑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지으셨나이다.
저의 주님,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바람과 공기로,
흐리거나 맑은 온갖 날씨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길러 주시나이다.
저의 주님,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물로 찬미받으소서.
물은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고 순결하나이다.
저의 주님,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불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불로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불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활발하고 강하나이다.”
88. 브라질 주교들은 자연 전체가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현존의 자리임을 강조하였습니다.모든 피조물 안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살아 계시며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십니다.이러한 현존의 발견은 우리가“생태적 덕목들”을 키워 나가게 합니다.이는 하느님의 충만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 세상 만물과 하느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피조물들을 잘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우리가 그들에 적합한 고유한 자리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결국 우리는 피조물들이 워낙 작아서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을 무리하게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영화 이야기
-리플리:더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알랭 들롱이 출연한 ‘태양은 가득히’2000년 맷 데이먼,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리플리’가 있으며,넷플릭스에서 새로 드라마로 개봉된 심리 스릴러 영화. 줄거리는 톰 리플리의 기만,사기 그리고 살인까지 남의 인생을 탈취하는 복잡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또한 16세기 종교적 분열을 작품 속에서 통합시켰던 위대한 화가이며 살인을 저지르는 이중성의 살인 미학을 보여준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도 화면에 나오며, 1960년대 이탈리아의 모습을 미술적 구도의 흑백 화면으로 보여주어 색다른 맛으로 8부작이지만 지리함을 모르고 본 것 같다. 리플리 증후군과 화가 카바라조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공부하는 계기 로,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말하며 리플리 효과 혹은 리플리병이라고도 하며,거짓이 탄로 날까 봐 불안해하는 단순 거짓말쟁이와 달리,이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는다. 카라바조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16세기 후반 종교화가 추구했던 이념의 핵심은 가톨릭 교회의 회복이었다.이 시기의 미술품들은 신앙심 고취를 위한 종교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카라바조의 생애와 작품 속에는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던‘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표현 되어 있다.또한‘가톨릭교회의 전통과 일곱 가지 성례전,그리고 개인의 선행을 통한 구원’이라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신학적결정까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는 가톨릭교회를 위한 예술가였지만,카라바조는 16세기의 종교적 분열을 작품 속에서 통합시켰던 위대한 화가였던 것이다.”
(이중성의 살인미학 카라바조 26쪽/김상근 著/21세기북스)
“일반적으로 가톨릭은 생태적으로 보수적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톨릭이 진보와 보수의 중간쯤 혹은 심지어 일부는 매우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건 한국의 정치와 사회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민주화운동을 통해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이 보여준 태도가 그런 인식에 한몫했다.그리고 가톨릭교회가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건 상대적으로 개신교회의 친정부적이고(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그런 성향이 강하다)자기 교회 중심적인 태도에 대한 반발 심리적 태도도 한몫했을 것이다.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회들이‘교회 중심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그리스도 중심적 포괄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보수와 진보의 잣대가 맞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316쪽/김경집 著/시공사)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 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류시화)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