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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제 : 우리 앞에 두신 복과 저주
설교본문 : 요한복음 21:1~17(참고, 신명기 11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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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했던 큐티 중에서
두 가지 주제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그 죄를 용서받고 제자의 지위를 회복했는지에 관한 말씀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수리안전답에서 천수답으로 인도하시면서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 주제의 말씀으로 건강하고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 1 부 :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의 베드로, 우울과 공허감
1.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의 공허한 움직임
1) 공허한 열정 : 의미 없이 밤새 그물을 던지기만 한 베드로(요 2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쌍둥이)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노라” 하고 말하자
그들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불과 얼마 전에 예수께서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후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이니 한밤중의 바닷바람은 아직 차갑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옷을 벗고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후 주님과의 신령한 관계를 잃어버린 베드로는
그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했고,
그래서 한 일이 고기를 잡는 일입니다.
고기 잡는 일은 그가 평생 한 일이니
이처럼 공허하고 답답한 마음일 때에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도 몰두할 수 없습니다. 고기가 잡히는지 안 잡히는지도 모른 채
추운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그물을 던지기만 할 뿐입니다.
2) 절망과 좌절을 벗지 못한 제자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제자들은
아직도 좌절과 절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직접 뵈었으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은 갖고 있으나,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믿음은 지식에 머문 믿음입니다.
단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 아직 그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소망 없는 삶입니다.
2. 실패 속에서 발견한 은혜
1) 예수께서 그들 곁에 오셨으나 오직 요한 한 사람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요 21:4~7).
4. 날이 밝아올 무렵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나
제자들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한 마리도 못 잡았나이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주님이시다)” 하니
시몬 베드로가 옷을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라는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무기력한 삶이 더욱 심해져 좌절감을 경험하게 될 즈음에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얘들아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때였기에 그들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말씀대로 했더니
일곱 명의 장정들이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바로 그때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로 헤엄쳐 갔습니다.
2) 실패 속에서 만난 은혜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때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였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장본인임을 밝혔습니다.
실패 속에서 만난 엄청나게 많은 고기들은
삶 속에서 경험하는 작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그 기적을 통해 바닷가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나의 삶에 새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실패 속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실패 속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된 이유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보다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베드로의 죄가 훨씬 가볍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 본문에서 베드로가 다시 용서받고
예수님의 제자의 지위를 회복한 것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므로
가룟 유다와 똑같이 베드로도 예수님과 완전히 단절된 자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은 만 못한 멸망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복했고, 가룟 유다는 끝내 멸망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인지,
베드로는 영생의 사람이 되었고,
가룟 유다는 영원한 멸망의 사람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베드로가 실패한 후에도 믿음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었으므로
베드로가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이후 답답하고 공허한 중에도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 역시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령한 영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답답하고 공허한 상태가 매우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은 후 곧바로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특히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시켜달라고 간곡히 간구합니다(시편 51편 참조).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회복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2) 만일 베드로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갔다면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
공허하고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갔다면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은 것만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잠시 즐거움을 주지만,
그 즐거움 후에는 그 공허함과 답답함이 더욱 커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답답함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도 그의 답답함을 세상에서 해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일 제자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 부끄러움을 참고 그 제자들 틈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아무리 답답하고 공허하고 힘든 상태에 있더라도
결코 은혜를 받을 만한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것은
절벽을 오르는 자가 힘들다고 손에서 밧줄을 놓아버리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제 2 부 : 베드로의 회복
1. 예수님 안에서의 풍성한 삶(11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제자들이 매일 오늘처럼 153마리나 되는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된다면
이 세상을 풍요롭게 여유 있게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의미 없는 삶입니다.
예수께서 그날 그들에게 풍성한 고기를 잡은 기적을 보이신 것은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더 풍성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숯불을 준비하셔서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구워 주셨습니다.
1) 153마리는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153마리의 기적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153마리의 기적에만 집착합니다.
➠ 당신은 어떤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153마리의 고기를 잡는 풍요로운 삶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기를 153마리나 잡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까?
예수님 안에는 그보다 더 풍성한 기쁨의 삶이 있습니다.
나에게 더 풍성한 것을 주실 수 있으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2) 광야의 만나, 오병이어의 기적 때의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지날 때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더 좋은 만나와 더 맛있는 고기를 내려 주기만을 바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고
그 자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를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12 바구니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다음 날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반복되기만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물고기와 보리떡의 풍요만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을 피하십니다.
3) 물고기 153마리가 아니라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하는 요한의 소리를 듣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바다 위로 뛰어듭니다.
바다를 헤엄쳐 가려면 오히려 옷을 벗어야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니 옷을 다 갖춰 입고 헤엄을 쳐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머리에는 153마리는 그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보일 뿐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그 여인도 예수님을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의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모습입니다.
● 묵상 :
➀ 이처럼 주님을 바로 찾고 바로 만나는 자가 되십시오.
주님을 만나기 위한 도구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면 주께서 떠나십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주님의 호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십시오.
➁ 153마리의 영적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때 잡은 153마리에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지를 찾으려 합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무려 153마리나 잡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반한 후 마음의 공허감에 빠졌던 베드로가
이 일로 예수님도 만나고 그의 영적 위치도 회복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153마리나 잡았다고 한다든지,
153마리는 마지막 때의 어떤 징조라고 한다든지,
마지막 때의 153개국을 의미한다든지 하는 이런 해석을 하느라
본문에 담긴 중요한 영적 의미를 잃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예수님(9~14절)
9. 육지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매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생선과 떡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만 하시고
예수님이 잡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4:30에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저녁을 잡수셨고,
누가복음 24:42~43에서는 예수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다고 증명함으로써
예수께서 영이 아니라 육신으로 부활하셨음을 증거합니다.
● 묵상 :
이처럼 우리도 장차 영이 아니라 육신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물론 그때 우리가 입을 육신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신이 아니고
예수께서 부활 후에 보여주셨던 그 영광의 육신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려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큰 선물을 주신 주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4. 용서와 회복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 시몬은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기 전의 이름(요 21:15~17)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상태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을 때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영은 심히 피폐해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그의 영은 여전히 좌절과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2) 공허감과 좌절에 빠져 있었던 베드로
이런 상태였기에 예수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확인했음에도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고기 잡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밤새껏 한 마리도 못 잡았으나 그는 그 일에 몰두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의미 없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반복해서 질문하신 예수님
그런 베드로를 예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하신 것은
변절한 베드로를 다시 용서하시고
사도로서의 권위와 위치를 회복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진정한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베드로의 영이 회복되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비탄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비탄에 잠긴 상태가 바로 회개입니다.
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후 닭이 울 때 통곡하여 울었지만
그때는 자기 연민에 빠져 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비록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죄송함과 사랑과 안타까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세 번의 고백을 진정한 회개로 받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사도의 직책을 모두 회복시키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런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도록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고,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가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자
주께서 “내 양을 먹이라”하며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다시 주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신다는 선언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혹시 이때의 베드로처럼
좌절과 절망 속에서 무엇인가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기만 하고 있다면,
피폐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5. 네가 이 사람들보다(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15절 성경구절 위에)
‘이 사람보다’로 번역된 ‘투톤’은
남성복수 지시대명사, 혹은 중성복수 지시대명사가 모두 가능한 단어입니다.
남성복수 지시대명사로 번역하면 ‘이 사람보다’가 되고,
중성복수 지시대명사로 번역하면 ‘이것들보다’가 되므로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1)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투톤’을 남성복수 지시대명사로 번역하면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가 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전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라고 고백한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가 그렇게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해 놓고는
바로 그날 밤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그가 했던 고백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면서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고백을 새롭게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투톤’을 중성복수 지시대명사로 번역하면
조금 전에 잡은 153마리의 물고기나 그 배와 같은 물건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성공이나 즐거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과거에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지금은 어떠냐, 앞으로도 세상을 얻기 위해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나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 그대로 베드로는 후일 순교를 당할 때까지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 묵상 :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진 질문입니다.
나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만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장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부터 바로 하십시오.
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은
주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를 굳게 지키십시오.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 덕분에 누군가가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될 것입니다.
6. 사명의 회복(요 21:15~17)
(15~17절 성경구절 위에)
1)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렇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베드로에게 유일하게 강력한 교황권을 준 것이라고 말하지만,
변절한 베드로에게 잃어버렸던 사도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2) 여기서 말하는‘내 양’은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사역자들이 먹이고 치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가애교회의 성도들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도
다 그 교회 목회자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다만 일시적으로 예수님의 양을 맡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그 사명에 충성된 자를 주님은 참된 주님의 일꾼으로 여기십니다.
제 3 부 : 수리안전답인가 천수답인가
1.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가나안 땅(천수답)
1) 애굽과 가나안 : 수리안전답과 천수답(신 11:10~11)
10. 너희가 들어가서 차지하려는 땅은 너희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채소밭에 물을 줄 때처럼 파종한 후에 발로 물을 댔으나,
11.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흡수하는 땅이요,
12.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일 년 내내)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가나안 땅의 대부분은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天水畓)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삶의 필수 조건입니다.
비가 적절하게 오지 않으면
당장에 풀이 죽어 가축은 물론 사람까지 굶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은 물이 풍부한 나일강의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관계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물레방아처럼 생긴 작은 수차를 발로 밟아 물을 끌어들여서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이 많았습니다.
2) 하나님의 복의 비밀 : 왜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누가 보아도 천수답인 가나안보다
수리안전답인 애굽이 더 복된 땅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수답이 대부분인 가나안이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됩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복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천수답인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는 이유는
그 자연적 특성 때문에
가나안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연적 특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랑하는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수리안전답에서 천수답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얼핏 생각하면 관계시설이 잘 되어 있어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리안전답이
더 복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수리안전답은 한두 해쯤 비가 내리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만큼 신앙이 느슨해지기 쉬워 교만과 방종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더 풍성하게 보이는 수리안전답이 영적으로는 오히려 황폐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풍요로운 애굽에서 천수답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의 믿음 :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믿음(12절)
12.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일 년 내내)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아브라함이 처음에 살던 갈대아 우르 역시
바벨론의 으뜸가는 도시로서 당시 최고의 수리안전답입니다.
그런 풍요의 땅에 살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천수답인 황량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는 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비가 며칠만 안 와도 사막이 되는 그런 황폐한 땅으로만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어
평생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 묵상 :
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더 어렵게 사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때때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어렵게 살고,
믿음 없는 사람들이 왜 더 잘 사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부족하지도 않은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여유 속에서 건강한 영의 삶을 잃기보다
다소 긴장된 삶을 살더라도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➁ 수리안전답 같은 넉넉하고 풍성한 삶의 위험 : 나태함과 영적 건망증
그렇다면 그 풍성한 삶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항상 신실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한 영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영적인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삶의 여유가 찾아오면
필경은 영적 나태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넉넉하고 풍성한 살림살이로 긴장감이 풀어져 영적 건망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인도하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을 내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2. 이른 비와 늦은 비의 복
1) 가나안 농사에 필수적인 이른 비와 늦은 비
이른 비는 겨울이 시작되는 10~11월경에 내리는 비로 그 양은
여름 동안 극도로 건조해진 땅에 물기를 뿌려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른 비가 와서 마른 땅이 부드러워져야
농부들이 땅을 갈고 파종할 수 있습니다.
늦은 비는 봄비로 3~4월경에 내립니다.
늦은 비는 겨울 동안 자란 농작물을 잘 여물게 합니다.
그러므로 늦은 비는 결실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2)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우리에게 필요한 때에 적절하게 내리는 주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나지도 않고,
비가 너무 적어서 흉년이 들지도 않는 아주 적절한 정도의 비는
너무 부자가 돼서 교만해지지도 않고,
너무 가난해서 시험에 들지도 않는 적절한 정도의 복입니다.
3)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는 과자를 많이 쌓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필요하면 엄마가 알아서 더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세상 것을 많이 채워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하면 주께서 더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우리를 항상 지키시고 돌보시리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자,
주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이런 복을 내려주십니다.
● 묵상 :
우리도 어린아이가 엄마를 신뢰하듯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구하고 또 구합시다.
결 론 : 우리 앞에 두신 복과 저주(신 11:26~28)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오늘(this day) 우리의 삶 속에 복과 저주를 두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나의 삶의 결과에 따라 내일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내가 날마다 오늘의 삶을 복되게 하면
그 삶이 계속해서 복 있는 삶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이 삶이 풍요롭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지키기를 게을리하면
오늘의 삶이 바르지 못한 것이 되어
그에게 다가오는 내일의 삶이 계속해서 저주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삶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고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내일을 만드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오늘의 삶을 신실하고 건강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건강한 내일을 만드십니다.
오늘 당신이 한 선택이 당신의 내일을 만듭니다.
당신이 오늘 한 선택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내일을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식만 갖는 믿음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신령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풍성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을 더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거처하는 땅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안식처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