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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
김인국(청주교구 광혜원천주교회 주임신부)
I. 잃어버린 길, 열어야 할 길
하지만 아담이 지은 죄마저 "오 복된 탓이여!" 라고 노래할 만큼 역설의 지혜를 갖춘 교회는 절망 한가운데서 축복의 징표를 읽을 줄 알고 있다. 환멸이라는 요괴가 우리 사회 곳곳을 나돌고 있지만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준비하며 희년의 전망을 내놓는다. 참된 예언자는 사람들이 절망의 늪에 빠져있을 때 오히려 희망을 노래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절망의 본질을 우리보다 앞서 꿰뚫어 보고 고통스러워했던 한 시인은 우리에게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갇힌 몸이 오히려 담장 밖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으니 그는 예사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절망할 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교회는 마땅히 절망의 현실을 복음의 눈으로 분석할 줄 알아야겠다. 오늘의 사태를 긴 안목에서 볼 때 이는 건국기의 진통에 다름 아니라는 혜안은 일단 우리를 진정시킨다.1) 곧 고려와 조선의 건국에 이르는 긴 고투의 과정을 상기해 보면 구체제의 부분적 혁신에 그친 왕조의 개창에도 엄청난 진통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하물며 주변 4강의 이해가 교착하는 세계사적 모순의 결절인 한반도, 그것도 분단이라는 열악한 조건에서 남북을 아울러 창조적인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할 역사적인 국면에서 보자면 오늘의 모순과 불안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인 과제인 것이다. 교회는 이런 건국기나 세기말의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한편 지난 해 정초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에 저항하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서울의 명동성당과 청주 내덕동성당 등 대개 각 교구의 주교좌 성당에 들어와 저항과 보호의 천막을 친 일은 우리 교회의 대 사회적인 발언권과 신뢰도를 가늠하게 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노동자들은 전국민에게 지지를 받는 자신들의 저항을 보호해 줄 자리로서 하나같이 천주교회의 성소를 선택하였다. 오만방자한 공권력도 아무런 물리적 보호장치를 갖추지 못한 성당을 감히 침탈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 결과를 예의 주시하며 국민적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노동자, 공권력, 시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응은 일맥상통한다. 이는 우리 교회가 한국사회 안에서 발휘하는 도덕적인 힘과 신뢰도의 정확한 반영인 것이다. 여전히 우리 교회는 시민과 정치가들의 양심에 발언할 호소력을 갖고 있으며 한국사회 안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과 협조해야 할 분야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이제 겨레의 운명과 함께하기 위해 그렇지 못했던 자신의 과오를 겸손히 고백하고 과거 청산이라는 통과의례를 의연히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
구체적으로 우리 교회는 세기말의 절망적 현상을 겪는 우리 사회에 어떤 전망을 제시하고 어떤 희망을 이끌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교회는 온 국민이 합의하고 공유하는 보편 가치를 만드는 일에 자기 에너지를 집중하도록 해야겠다. 독일 국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래도 쓸만한 벽돌을 골라 교회를 재건한 것이었다. 사회가 고난에 빠져있다는 것은 혼란에 빠져있음이다. 혼란 중에 필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이 서야 할 좌표를 찍어주는 일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먼저 교회를 재건한 독일 국민의 처신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경탄할 만한 뜻이 담겨있다. 삶의 규범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동물처럼 변하게 되어있다. 일시적인 고난 앞에서도 서로 물고 뜯는 적이 될 수 있다. 전쟁을 치른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가계 소득이 반으로 줄어든 현 국면은 참으로 극단적인 상황이다. 삶의 질을 따지던 어제는 그래도 느긋한 편이었다. 오늘 우리는 삶의 질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국채를 보상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애틋한 노력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금 모으기'식의 일회성 캠페인으로 대응할 때가 아니다. 금 모으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국민들이 공유할 건전한 가치를 모으는 일이다. 멀리 내다보고 깊게 생각해 보는 대응이 없었기에 번번이 막대한 손해를 본 것이 우리 역사였다. 장기적으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마땅히 생략되어야 할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국민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당해 온 것이 오늘까지의 근대 역사였다. 더 이상 잘못된 그림 위에 덧칠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적인 것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 교회는 국민들이 스스로 의식의 개선과 발전에 대해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으로 고민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물질이 넉넉해지면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아야 마땅한데도 우리는 왜 향락과 분수에 넘치는 소비에 탐닉하여 더 비참해졌는지 질문하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온 국민이 가난과 싸워야 했다. 기나긴 군사정권의 개발 독재는 국민들의 가치관을 결정적으로 오염시켜 버렸다. 쿠데타 주동세력들이 서구의 '근대화'를 모방하면서도 서구의 근대화가 민주주의 혁명을 포함한 공업화라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한 탓이었다. 특히 "하면 된다."는 구호는 무엇이나 하기만 하면 된다는 가치관으로 변질되어 절차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문제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정돈되지 않은 물질중심의 가치체계 위에 일단 이윤만 발생하면 과정에서 발생한 비윤리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천민자본의식이 장려된 것이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평생 분단교육에 시달리면서 자기 동족에 대한 극도의 미움을 키워온 것도 엄청난 불행이다. 이기적인 이윤과 비이성적 미움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당연히 우리 심성은 망가졌고 공동체 문화는 상실되었다. 공동체의 기본 원리는 나눔과 섬김인데, 이윤이 나눔의 복음적 가치를 폐기시켰고 미움이 섬김의 의미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였다. 야만적인 경제물신주의와 반이성적인 적대주의로 공동체는 붕괴하였으며 교회는 이런 거대한 흐름에 무력하게 빠져 들어갔으며 이렇다 할 저항도 보이지 못했다. 한마디로 사회 구성원이 정신적 의식적 가치를 확립하는 과정을 갖지 못했으므로 저마다 법이고 저마다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정신적 공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합의가 도출될 수 있는 공동체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날을 멀리 내다보면서 보편적이고 세계와 나눌 수 있는 삶의 의식의 방향과 기준을 설정해야 하는 일이 우선의 과제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한국사회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세기에 교회가 제시할 전망과 희망도 여기에 있다. 그 동안 사회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교회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나갔던 현대사의 경험과 정신적 자산은 바로 지금 활용되어야 한다.
III. 교회가 보여줄 전망 세기말의 암울한 공간에서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신흥종교들이 있다. 이른바 뉴에이지의 범주에 드는 여러 가지 현상과 천존회 등 350종에 이르는 근래의 신흥종교들은5) 이전과는 달리 평등이나 인권과 같은 인류의 보편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면서 철저히 탈역사적,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변화는 삶의 질을 공동체보다 개인적 차원에서만 고려하는 경향에 편승하거나 그런 기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맞서 교회가 대항해야 할 악은 먼저 안락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자기 계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비주의, 무위도식주의 성향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정한 경제력을 가진 계층을 보수화로 이끌고, 반면에 빈부의 격차로 생긴 소외계층을 소수의 사회적 탈락자로 남게 할 것이 분명하다.6) 그리하여 사회정의에 대한 무감각을 구조화하고 삶의 진실에 대한 뿌리깊은 냉소주의가 활개를 치며, 사회적 약자와 인간생존의 근원적 토대인 자연 생태계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우리 사회 경제 현실의 기본 문법이 강화될 것이다. 또 공동체의식, 민족, 통일문제과 같은 진보적 관심은 주변으로 물러나게 된다. 삶의 질을 이처럼 왜곡된 방향으로 이끌다 보면 오늘의 절망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분단, 지역 패권주의, 계층 갈등, 소비주의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경향을 거슬러 교회가 제시해야 할 전망은 공동체 삶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이기적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이 요구하는 삶의 양식은 공동체이다. 오로지 이윤과 발전 그리고 소비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신앙에 함의된 나눔과 공존 그리고 청빈의 논리를 삶의 전망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 준비없는 희망에는 미래가 없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계약궤가 백전백승의 묘약인 줄 착각하였다(1사무 4,3), 불레셋도 그 효험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계약의 궤가 승리를 담보해 주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무기는 주님께 충실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전략 무기는 없다. 오늘날 교회가 준비할 무기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복음이 권하는 기본 덕목과 세례의 근본 정신에 충실하면 된다. '삶'이 없는 일곱 가지 성사는 효험없는 '빈 궤짝'이 되고 만다. 한겨울 삭풍 속에 봄이 들어있다. 삶의 터전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가치가 싹틀 기운이 보이고 있다. 힘센 자만이 살아남게 되어있는 정글의 법칙이 이른바 IMF 체제 아래서 폐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미약하나마 의미있는 변화는 복음적인 회개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정글 법칙의 구성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맹수가 활개칠 정글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움과 경쟁을 토대로 하는 경제 성장 물신주의가 '지속 가능한 미래의 발전 모델'일 수 없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삶 자체'이지 '생활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일어났다. 코앞에 닥친 대량 실업사태 앞에서 감원보다는 감봉을 감수하면서라도 동료들과 일을 나누어 갖는 것을 택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 동안 이기주의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관행을 생각할 때 매우 의미있는 변화이다. 여기에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로서의 본능적인 연민이 다소나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냘프나마 우리 사회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공동체적인 감각과 서로 감싸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국민정신개혁 운동본부를 차려놓고 도덕재무장을 운운한다고 이런 공동체 감각이 살아나지 않는다. '당위'(當爲)니까 따르라고 훈계할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만이 공동의 생존과 참다운 삶을 보장하는 현실적 모델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누라고 해도 남에게 덜어주면 내 몫이 텅빌까 두려워 나누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섬기라고 해도 남을 받들어주면 자기가 무시당할까봐 두려워 섬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여기에다 교회의 무기인 부활의 신비가 개입해서, 나누면 풍성해지고 섬기면 높아지는 것이 복음적 현실임을 선포하려면 역시 교회는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둔 가난이라는 겸손한 외투를 꺼내 입어야 한다. 교회마저 성장의 논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자기 확장에만 힘쓴 전력을 반성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천년기의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먼길에서 오시는 신랑을 눈앞에 두고야 겨우 남에게 기름을 빌리겠다던 그 미련한 처녀보다 '더 미련한 처녀'의 소행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살리는 희망의 기름은 가난이다. 가난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일자리든 무엇이든 남들과 나누어 갖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런 귀한 깨달음은 차고 넘치는 부가 준 것이 아니라 가난이 준 선물이다. '위로부터' 형성된 우리 교회의 기존 소공동체는 '말씀 나누기'부터 할 것이 아니라 '체험 나누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체험을 나누고 그 다음에 말씀에 비추어 체험을 반성해야 한다. 말씀만 나누고 한 발자국도 못나가고 멈춰버리니까 말씀이 삶을 교정하거나 독려하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체험이 없는데 말씀이 응답하실 리가 없다. 자연히 말씀 나누기는 지루하고 형식적이며 어려운 절차로 끝나게 되어있다. 종은 때리는 자의 힘만큼 울려 퍼진다고 했다. 말씀은 체험의 깊이와 넓이만큼 울려 퍼져 나간다. 말씀이 삶을 규정하지 못하는데 부활의 신비가 삶으로 구현될 턱이 없는 것이다. 말씀은 주님의 길을 따르라고 실천을 충동하고, 체험은 말씀의 에너지로 새로운 방향을 잡고 힘차게 나아간다. 이런 순환이 살아야 물질주의 소비주의 자본중심주의 사회에 도전할 발판이 생긴다. 1886년 병자수호조약 이래 교회가 제대로 신앙을 고백해 보지 못한 척박한 땅에 부활 신비의 빗물이 촉촉이 스며들어 비로소 묵은 씨앗이 긴 숨을 내쉬고 싹을 틔울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과 체험을 함께 나누는 소공동체들이 그물망(network)을 만들어 본당 단위를 이루고, 본당은 자본주의의 공세에도 의연한 인간형들이 집결하는 거점이 되어야 한다. 그 어느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조직보다 훨씬 치밀한 거점을 가지고 세례를 통해 결단한 동일한 신념으로 튼튼하게 짜여진 조직이 바로 가톨릭교회이다. 이 신념을 형성하는 첫 번째 사건이 세례인데 교회는 예수님의 세례가 요르단 강에서 시작하였지만 갈바리아 산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뜻을 잘 알고 있다(마르 10,38; 루가 12,50 참조). 교회는 삶 전체가 바로 세례를 완성시키는 과정임을 고백하고 가르쳐왔다. 세례 사건과 십자가 사건이 동일한 부활 체험을 위한, 하나는 시작이요 하나는 완결이라고 고백하였다. 곧 세례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시작이요, 십자가 사건은 세례 사건의 완결편이다. 교회가 자신의 강고한 거점과 토대 위에 세례와 십자가의 정신을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구현한다면 예수 운동은 부활할 것이며, 이로써 교회는 희망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IV. 계약의 궤를 다시 찾자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이런 역사적 과업 앞에서 교회가 분단체제 아래 미움과 경쟁을 극대화한 수구 세력을 회개시키고 기존 질서의 오랜 피해자이면서도 또 가해자 역할을 해온 국민들의 마음을 통합하는 희망의 구심점이 되기 위해 교회 스스로 다음과 같은 갱신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갱신이야말로 계약궤를 되찾아 주님께 충실하고 백성에게 기쁨을 나누어주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다(2사무 6,12-19). 첫째, 교회가 먼저 '낮출 것'은 낮추어야 한다. 교회야말로 삼위일체 신비의 담지자로서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나중 계심도 없어 온전히 같으신" 하느님의 신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니 교회의 여러 권위와 역할이 평등과 겸손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어야겠다. 우리 사회에 권력과 권위가 국민에게 봉사하는 모델이 어느 한 구석이라도 있어야 이를 따를 수 있지 않겠나. 둘째, '일으켜 세울 것'은 치켜 세워 모두 보게 해야 한다. 교회는 오랫동안 됫박으로 덮어둔 등불을 이젠 등경 위에 올려야 한다. 등경 위에 올려야 할 것은 우리 교회가 2천 년 간직해 온 영적인 보화들이다. 현대교회의 손으로 들어 올린 영적인 전통은 정신적인 삶의 가치를 몰라 불행해진 이 사회가 앞으로 나갈 길을 밝혀주는 조명탄이 되고, 우리는 우리대로 성령이 계시는 곳이 어딘지 예민한 감각으로 알아차리게 해줄 것이다. 셋째, 교회가 가난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가르친다고 깨닫는 것은 아니다. 건물은 시대 정신의 고체화라는 명제를 떠올리면서 오늘날 교회 건축이 반영하는 교회와 사제의 삶이 어떤지 똑바로 보자. 가난의 기쁨을 모르는 교회는 이익 집단으로 몰락하고 사제는 한낱 직업인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비둔한 몸집을 버리고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임께서 계시는 해방과 자유의 자리, 눌리고 묶인 이들의 자리로 민첩하게 달려가자. 성령께서는 주님의 혼이시니 성령을 모시는 교회는 언제나 희망이다! 주) |
김연범(서울대교구 방배동천주교회 보좌신부) 이야기 하나 그 작은 들판 가득히 발디딜 틈 없이 온갖 새들과 동물들이 모여있었다. 그러나 들판을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운 숲들은 텅 비어있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새들과 동물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함께 모여있는 것일까? 왜 하늘이나 나뭇가지들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것일까?' 새들과 동물들은 좁은 장소에 너무 많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매우 긴장되고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전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친구 집에 도착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새들과 짐승들이 그곳에 모여있는 까닭을 물었다. "그들에게 무슨 불행한 일이 닥친 걸까?" 친구가 대답했다. "나도 전해 들어서 잘은 모르는데,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네. 이곳에 지주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무척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나봐. 그는 들판 가장자리에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곳곳에 경비원을 세워두면서 새나 짐승이나 이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명령했다네. 그리고 수천 마리 새와 짐승들을 그 들판 안으로 몰아넣었지. 그 들판은 그들에게 감옥이 된 거야. 그리고 수년 동안 그런 상황은 계속되었고 탈출하려는 새나 짐승은 모두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네. 결국 그들은 그들의 갇혀있는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었지. 그들에게 자유는 두려움과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그렇게 포악하게 굴던 지주가 죽었네. 당연히 경비원들도 사라지고 울타리도 없어졌지. 이제 새와 짐승들이 그곳을 떠나는 것을 막을 것이 어디에도 없었네. 그런데 이상하게 울타리 안에 있던 새들과 짐승들 가운데 아무도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는 거야. 어느새 새들과 짐승들에게 정신적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나봐. 그들은 울타리가 여전히 그들을 가두고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영원히 탈출할 수 없게 되고 오늘도 그렇게 있는 것이라네." 친구에게 설명을 다 들은 그 사람이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누구도 그들에게 달라진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지?" 친구가 말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 몇 번이고 말했다네. 그런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지. 더 큰 문제는 새끼들까지 똑같은 생각을 갖고서 태어나는 거야. 그들 주위에 울타리가 있다고. 그런 생각은 그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버렸고, 새끼들까지도 그렇게 태어났다네. 아직까지도 많은 선한 사람들이 그들을 깨우치려고 시도하고 있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럴 때마다 새들은 무척 화를 내고, 짐승들은 그 선한 사람들을 공격하기까지 한다네. 그들은 혼란을 원치 않는 거야. 실제로 그들은 자유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들판 밖의 세계는 부자유라는 철학을 만들어내기까지 한 것이지. 지금도 선한 사람들이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자유로운 그들에게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고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는 불가능한 듯하네." 고3 학생도 청소년사목의 대상인가? 그런데 이러한 청소년사목이 과연 고3 학생들에게도 해당되고 있는가? 일선 본당의 중·고등부 주일학교 운영을 살펴보자. 대부분 본당에서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재를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만 준비해 놓았고, 중·고등부 주일학교 졸업을 고3으로 올라가는 고2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키고 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고3 학생들은 중·고등부 주일학교 미사에 나오지 않고 청년 미사나 다른 미사에 나오며, 더욱 안타까운 경우는 많은 학생들이 성당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러면 고3 학생들은 주일학교를 졸업한 청년사목의 대상인가? 하지만 청년사목은 '청소년 시절을 벗어나 대학교 또는 전문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생활을 하는 20-30대 젊은이들'인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3 학생들은 누구인가? 고3 학생들은 청소년도 청년도 아닌, 어느 사목에도 관계가 없는 '정체불명'의 신자들이란 말인가? 어려움은 희망을 부른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대학 진학을 위한 엄청난 노력과 경쟁들. 진정 20년도 채 살지 않은 어린 자녀들에게 미지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는 대학뿐이라고 가르치는 부모, 학교 사회의 분위기. 그래서 대학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마치 낙오자처럼 느끼게 하는 세상의 시선들. 그리고 우리 나라를 지배하는 서울대학교, 일류대학. 이미 끝난 일이지만 작년 대선 이전에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일곱 명 후보가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인 나라. 이러한 입시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그들에게 교육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다음은 한 고등학생이 국민교육헌장에 빗대어 풍자삼아 썼다는 ‘우울한 고교교육헌장’의 내용이다. "우리는 명문대 입학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난 입시 성적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이기주의적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친구의 타도에 이바지 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입시의 지표로 삼는다. 영악한 마음과 빈약한 몸으로 입시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무시하고 우리의 성적만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아 찍기의 힘과 눈치의 정신을 기른다. 시기심과 배타성을 앞세우며 능률적 찍기 기술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완전히 타파하며 메마르고 살벌한 경쟁정신을 복돋운다. 나의 눈치와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성적이 향상되며 남의 성공이 나의 파멸의 근본임을 깨달아 견제와 시샘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남의 실패를 도와주고 봉사하는 척하는 학생 정신을 드높인다. 이기주의에 투철한 이기 전략이 우리 삶의 길이며 명문대 입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배에게 물려줄 영광된 명문대 입학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눈치빠른 학생으로서 남의 실패를 모아 줄기찬 배타주의로 명문대에 입학하자." 또한 한때 유명한 광고였던 "세계일류-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 광고는 좀더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위해 '일류'가 되어야 하고 '일등'이 되어야 한다고,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기에 남을 짓밟고서라도 일등이 되어야 한다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나'만을 위해 남들을 내리밟고 저 높은 일류의 자리에 올라가야만 한다고, 이것만이 살 길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러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과연 희망이란 무엇이고, 교회는 진정 그들에게 어떤 배려를 할 수 있는가? 하늘 보고 바다 보고 나를 보고 희망이란, 글자 그대로 '기대하고 바람',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한 소원'이다. 물론 희망은 눈앞에 있을 수도, 저 멀리에 있을 수도 있다. 앞의 이야기처럼 고3 학생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 너머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정말 하늘 한번 올려다 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갖는 것이 고3이라는 어려운 시간을 헤쳐나가는 지혜일 것이다. 교회가 그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사목적 배려 역시 안으로만 밀어넣지 않고,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다가서야 한다. "아플 때는 약보다 사람의 손길이 그립다."는 어느 환자의 시처럼 말이다. 사랑의 손길은 펼쳐져야만 한다 첫 번째, 고3 학생도 주일학교 학생임을, 청소년사목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알려주어야 하겠다. 앞에서 기술한 대로 많은 본당이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면 주일학교를 졸업시켜 주변인으로 겉돌게 하여 '고3은 공부하는 기계의 대열'에 그들을 밀어넣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고3 교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비록 고3 교리 교재는 없으나 다행히도 서울대교구 교육국에서는 1993년 5월부터 취업과 입시를 앞두고 내일의 빛을 찾는 학생들의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주님 가까이」라는 소책자를 월보 형식으로 발행하고 있다. 이 소책자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다른 계획을 잡아서라도 그들을 신앙의 소외지역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고3이 공부해야지.' 또는 '애들이 어울리면 또 놀기 시작한다.'라는 생각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교회의 기능이 무엇인가? 교회가 세상이 가는 방향대로만, 세상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그것만 좇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세상이 물질 만능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로 흘러 수단이 목적이 되어가는 그런 상황에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를 외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한다. 곧 교회는 '역기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고3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저 앞도 보지 않고 뛰어가는 상황에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교회는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네 인생이 죽음의 시점에 도달하는 것만을 위해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에 의미가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또한 이 고3 교리에 사목자가 함께할 수 있다면, 밥 한끼라도 그들과 같이 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있어준다면 그들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학생 미사에 고3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소속감과 자신들의 자리를 펼쳐주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본당들이 학생 미사 때 학년 표지판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학년 표지판에 고3을 포함시켜 학생 미사에 그들이 참여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고2 때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고3 학생들에게도 그들이 주변인이 아니라 중심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고3이 되면 많은 부분에서 면제되는 - 고3은 상전(上典) 대우를 받는 -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고3이 신앙에서도 면제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고3이라고 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장에서 소외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세 번째, 입시생들과 더불어 그 부모님들을 위한 배려를 생각해 본다. 몇몇 성지에서는 입시 전 100일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조금은 기복적인 모습이 있지만, 부모들의 그 바람을 교회가 저버릴 수만은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적으로 특별히 의미가 없는 100일보다는 54일 기도를 본당 자모회나 다른 단체가 주관하여 기도모임을 하면 좋겠다. 더불어 이 기도모임이 기복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도록 사목자는 관심을 가져야겠는데, 그 한 방법으로 54일 기도 시작 미사나 말씀 전례등을 통하여 54일 기도가 '우리 자식 합격시켜 주시고 다른 집 자식 떨어뜨려 주십시오.'가 아니라는 점을, 이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입시생들과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자녀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에게 열어주시는 길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를, 그들이 내일의 빛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저 빌고 복을 받는 식의 신앙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으면 한다. 또한 이때에 그 동안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진정 자녀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부모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또한 진정한 교육열이었는지 자기 체면을 위해서, 아니면 대리 만족을 위해서였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도록 이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54일 기도 동안 사목자도 자주 참여하여 입시생 부모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함께 이 문제에 동참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네 번째, 54일 기도와 더불어 사목자가 입시생들에게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 물론 전화 통화가 되는 시간을 맞추기도, 통화를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54일 기도에 나오시는 분들에게 또는 공지 사항을 통해서 그들과 통화 가능한 시간을 접수 받아서 연락하면 효과적이다. 통화 시간대는 주로 밤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다. 전화를 걸어보면 많은 경우가 성당을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고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도 간절하다. 그들에게 전화를 통해 많은 것을 줄 수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없겠지만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와 사랑을 담은 관심을 그들에게 건넨다면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까지도 체험하는 좋은 시간들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전화를 거는 일이 사목자에게는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과 대화하며 사목자는 더 많은 것을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54일 기도 동안 부모들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기도하여야 함을 가르쳐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문을 짧게 작성해서 함께 기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하느님께 절실히 의탁하여야 함을 알려주어야 한다. 기도문 가운데 한 가지를 예로 든다면 테제기도의 'O Lord hear my prayer'와 같은 짧고 반복되는 기도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하면 좋겠다.
또한 부모들에게는 '입시생을 위한 기도'나 D. 맥아더의 '아버지의 기도' 같은 기도문 등으로 진정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어떠해야 할지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여섯 번째, 많은 본당들이 하고 있는 것인데 입시 전 주일 '학생 미사' 때 입시생들에게 안수로 축복을 해주는 것이다. '학생 미사'라고 규정지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중·고등학생 공동체이고 한 공동체는 함께 기도하여야 함을 다른 학년 학생들에게도 알려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입시 전날 미사를 드림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느끼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도 좋겠다. 그 밖에 찹쌀떡이나 엿을 주는 것은 그저 연례행사로서가 아니라 의미를 살려 마음의 여유를 주는 시간으로 잘 고려하여 행할 수도 있겠다. 또한 상본에 위안과 평화와 힘을 줄 수 있는 성서 구절을 적어 나누어주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곱 번째, 입시날에 입시생 부모들을 위한 피정을 본당에서 마련하였으면 좋겠다. 입시날 입시생의 부모들은 사실 다른 일도 제대로 하기 힘들며, 하루 종일 불안하고 초조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대중매체에서 잘 볼 수 있듯이, 교문 앞에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떨며 기도한다. 물론 본당에 와서 혼자 기도를 할 수도 있으나 많은 경우에 입시생 부모들은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성지를 찾아가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절에 가서 탑돌이를 하거나 불교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러한 마음들을 교회가 잘 헤아려서 이날 입시생 부모들을 위한 피정을 한다면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위로와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피정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들에게 공동체를 체험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끝으로, 입시가 끝난 다음 고3 학생들을 위한 피정을 하면 좋겠다. 이 피정을 준비하며 교리교사들이나 다른 이들이 고3 학생들에게 편지나 카드를 보내어 그 동안 많이 힘들었던 그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며 그들을 피정에 초대한다. 피정의 시기도 매우 중요한데, 기말고사가 끝난 뒤 시험 성적이 발표되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분심과 걱정 때문에 피정에 임하는 그들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피정 시기는 보통 대림시기 시작과 비슷한 때가 되므로 전례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피정에서는 주로 그 동안 공부밖에 모르고 달려온 자신들의 과거의 삶을 돌아보며 현재의 자신을 보고, 공동체와 가정을 바라보며 미래를 설계해 보는 좋은 시간을 갖게 해준다. 그 시간에 고3 학생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들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희망을 거슬러 희망한다 고3, 그들은 이 시대를 사는 특수한 사람들이다. 다른 모든 것에서 분리되어 오직 '경쟁'과 '통과'라는 것에만 매달려야 하는 특수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 그 1년이 가장 어렵고 힘든 고통의 시기라 생각된다. 하지만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고통의 순간일 것이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고통이란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번제물"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어려움의 시간들이 하느님을 뵙게 되고, 하느님께 한 발 더 다가서는 시간들이 될 것이다.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죽지 않으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에서도 다시 일으켜지심에 있는 것이다. 고통과 어려움, 어둠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빛으로 걸어 나가게 되는 그 희망 말이다. 고3 학생들에게도 교회는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는 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것만일 수도 있으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더 큰 희망이 있음을 전해 주는 것 또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될 때 그들 모두가 기쁨과 웃음을 늘 간직하며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분께서 주시는 희망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존재하지도 않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