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명술 정읍 "죽력고"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평양의 감홍로(甘紅露)니, 소주에 단맛나는 재료를 넣고 홍곡(紅穀)으로 발그레한 빛을 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전주의 이강고(梨薑膏)니 뱃물과 생강즙과 꿀을 섞어 빚은 소주입니다. 그 다음은 전라도의 죽력고(竹瀝膏)니 푸른 대를 숯불 위에 얹어 뽑아 낸 즙을 섞어서 고은 소주입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유명한 우리나라 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그 중에서도 죽력고는 대나무가 많이 나는 전라도에서 빚어져 내려오던 독특한 술이다. 주(酒)자를 쓰지 않고 고(膏)자를 쓰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약으로 쓰였던 술
죽력고에 대한 기록은 『증보산림경제』 『임원십육지』 『동국세시기』등에 나와 있는데 ‘고'자를 쓰는 술은 마시기도 좋고 약효도 높아 그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쓰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엽 이후에 소개된 처방문에는 <소주에다 왕대를 쪼개서 불에 구어 스며 나오는 즙과 벌꿀을알맞게 넣어 그 그릇을 끓는 물 속에 넣고 중탕한다. 혹 사람에 따라서는 생강즙을 더 넣기도 한다>라고 기록돼 있어 그 활용도가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죽력고는 아이들이 중풍으로 갑자기 말을 못할 때 구급약으로 쓰였다.
원래 약으로 사용되던 죽력고는 술맛이 좋아 귀한 술로 탈바꿈해 전해졌지만 현재에 와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지난 달 열린 국순당 우리술 공모전에서 죽력고가 최우수상을 타면서 그 이름이 다시 알려졌다. 만드는 방법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죽력고를 세상에 다시 선보인 것은 정읍시 태인면 송명섭(46)씨.
그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빚었던 술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한약방을 하면서 약으로 중력고, 복분자주 등을 약용술로 빚었고 양조장집으로 시집을 온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그 술을 빚어 마셨다. 그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어머니의 술을 30년 넘게 빚어 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고생하던 아버지에게 술을 일절 못 드시게 했습니다. 하지만 죽력고만은 손수 빚어 마시게 했던 것으로 봐서 어머니는 죽력고를 술이 아닌 약으로 쓰셨던 것 같습니다."
죽력고를 만드는 방법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찹쌀과 누룩으로 전술을 빚는데 다른 술과는 달리 전술을 20일 정도 발효시켜 앙금이 가라앉을 때까지 놓아둔다. 이렇게 용수를 박지 않고 전술을 만드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방법이다.
전술이 다 되면 집 근처에 있는 대나무와 시누대의 마디를 잘라 항아리에 담는다. 대나무가 담긴 항아리는 뚜껑이 아래로 가게 땅에 박아두고 불을 지핀다. 처음에는 콩대 그리고 왕겨를 알맞게 땐다.
“시간과 온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 불을 세게 때도 안되고 너무 오래 불을 때도 안되죠. 얼마라고는 딱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 할 때마다 그 시간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실패도 많이 하죠."
불이 꺼진 항아리 뚜껑에는 진한 녹색의 대나무 진액인 죽력이 받아진다. 계량화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익혀진 30년의 감으로 죽력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죽력을 대나무 잎에 재서 대나무, 솔잎, 대나무 숯과 함께 소줏고리에 넣는다. 이 소줏고리를 이용해 술을 내리는데 낮은 불에서 오랫동안 내려야 은은한 풀색의 중력고가 만들어진다. 전술 3말이면 중력고 7되 정도를 내릴 수 있다.
청자의 고귀함 닮은 ‘살아 있는 연한 녹색’
술을 마실 때는 눈으로 마시고, 코로 마시고, 입으로 마시는 색(色)·향(香)·미(味)의 단계를 밟는다. 죽력고는 어느 한 단계에서도 소홀함이 없는 술이다. 빛깔은 연한 풀색이다. 대나무에서 나왔지만 대나무 빛도 아니고 청자 빛보다는 옅지만 그 은은한 색이 청자의 고귀함을 닮았다.
“이 색은 어떻게 말해도 적당한 표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살아 있는 연한 녹색'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맞지 않나 싶네요."
도대체 살아 있는 색은 어떤 색이란 말인가. 술의 향은 대향과 솔향이 누룩과 어우러진다. 하지만 대향기도 솔향기도 아니다. 솔솔솔 산에서 부는 산바람의 향기를 닮았다고 해야 할까, 그 향기는 미묘하다.
중력고의 알코올 도수는 20∼25도 사이. 그리 높은 술은 아니지만 술맛은 대나무의 곧은 성품을 닮은 듯 직선적이다. 입에서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퍼지는 술이 자꾸 술잔에 입을 대게 한다. 여기에 꿀을 섞어 마시기도 한다니 이 술과 함께 한다면 쉽게 술자리에서 헤어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
“많이 마셔도 깊게 취하지 않습니다. 깊게 취하지 않으니 술을 마신 후에 가뿐하게 깨어 날 수 있어 좋고 중풍이나 위염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마실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상품보다는 문화재가 되길"
이렇게 힘들게 빚는 술이고 실패하는 일이 자주 있어 그는 가까운 친구에게도 중력고를 쉽게 내놓지 않는다. 그에게는 술을 내리고 나면 득달같이 달려와 ‘좋은 술 좀 달라'고 하는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종종 실패를 봐 못 줄 때가 많다고 한다.
“버리느니 좀 덜 된 술이라도 달라고 하지만 절대 주지 않습니다. 양조장에서 빚는 막걸리도 술이 안되면 내다버리는데 가까운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술을 빚으면서 아까운 도자기를 깨버리는 도공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알았다니까요."
죽력고는 워낙 만들기 힘들고 고가에 판매돼야 하는 이유 때문에 다른 술과 가격경쟁을 할 수 없다. 상품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이 술을 상품화할 생각도 없다. 바람이 있다면 사라져 가는 이 술이 문화재가 돼 그 명성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도공의 마음으로 술을 빚는 그라면 그 바람이 어렵지는 않을 듯 싶다.
전라도닷컴 기사<2003-01-24>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전통술담그기,죽력고,2003.12.19.)로 지정되었음
첫댓글 함벽루는 저의 닉네임이고, 송명섭씨는 현재 태인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태인에 가면 꼭 죽력고를 먹어봐야겠습니다...!! 선배님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미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