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진다. 늘어나는 뱃살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침햇살에 잠이 깨도 온몸을 천근만근 짓누르는 피로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술과 담배, 스트레스에 찌들어 사는 40대가 며칠 밤을 새워도 팔팔한 열아홉 청년과 ‘맞짱’을 뜬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똥개도 호랑이 행세를 한다는 제 집, 홈링도 아닌 적진에서 혈혈단신으로 싸워야 한다면.
어쩌면 4월28일은 우리나라 프로복싱사(史)를 새로 쓰는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고령 한국챔피언 기록을 가진 ‘할아버지 복서’ 이경훈(43)씨가 이날 호주 멜버른에서 세계 챔프 후보로 손꼽히는 프라딥 싱(19)과 범아시아권투연맹(PABA)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늙다리 중년 세대의 어깨를 한껏 펴줄 영웅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시합 일주일을 앞두고 싱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경기가 무기 연기됐다.
당초 그와의 인터뷰는 경기가 끝난 후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할말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연기됐지만 언제 있을지 모를 시합 날까지 마냥 기다릴 필요는 없어보였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만으로도 그는 중년들에게 충분히 희망을 줬다.
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4월28일,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을 찾았다. 계속된 황사와 꽃샘추위에 잔뜩 움츠린 탓일까, 차창 밖으로 경춘가도에 늘어선 산들이 모처럼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살폿 잠이 들었다. 피가 튀는 격한 운동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봄날이었다.
하지만 봄 햇살의 나른함은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 탁, 탁, 탁, 탁 줄넘기 소리와 쉭, 쉭 뿜어내는 거친 숨결에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긴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사내 하나가 보인다. 러닝셔츠가 땀으로 푹 젖어 있다. 앞머리는 벗겨지고 이마에 팬 주름이 깊지만 불끈거리는 근육, 가벼운 발놀림과 날렵한 주먹이 함께 운동하는 젊은이들 못지않다.
“시합은 연기됐지만 운동을 쉴 수는 없죠. 언제 다시 날이 잡힐지 모르니까요. 나이도 많은데다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꾸준히 해야 해요.”
이경훈은 프로복싱 선수인 동시에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관장이며, 관원을 지도하는 코치다. 또한 방송통신대에 다니는 늦깎이 대학생이다.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기도 하니까 1인5역이다.
“하루 일과요? 아침엔 로드워크로 체력을 다지고, 오후 1시부터 체육관 업무를 보면서 틈틈이 관원들을 가르쳐요. 5시나 돼야 한두 시간 정도 제 개인훈련을 할 짬이 나죠. 저녁엔 복싱에어로빅 강의를 하고, 밤에는 방통대 수업을 들어요. 훈련량이 절대적으로 적으니 그저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현 동양챔피언 프라딥 싱은 나이는 어리지만 아마추어 전적이 108전 100승 8패에 이르며, 프로에 들어와서도 9전 9승 7KO승을 기록 중인 강자다. 불혹을 훌쩍 넘긴 이씨로서는 벅찬 상대임에도 “이번 시합은 자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7월 얼떨결에 동양태평양복싱연맹(OBPF) 챔피언전에 도전했다 실패한 후 많은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번엔 열심히 준비했죠. 상대가 빠르고 주먹이 강하지만 저도 주먹과 스피드에서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이번엔 제대로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산돼 아쉬움이 커요. 하지만 언젠가는 시합이 열릴 테니까 빈틈없이 준비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