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 교수의 역사칼럼(88)
권 중 달 (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미온적 대처가 가져온 화란(禍亂)
초봄 중국에서는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가 열렸다. 이번 회의를 거치면서 중국 정치의 권력 구조는 다시 한 번 시진핑 중심의 체제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동시에 차기 지도자에 대한 분명한 후계 구도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러한 흐름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권력은 어떻게 안정적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권력이 한 지도자에게 집중되는 현상 자체를 단순히 긍정이나 부정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지도력이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 한 사람에게 모일수록 그 다음 단계, 즉 권력의 승계 문제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후계 구도가 명확하지 않을 때 권력의 공백은 정치적 갈등과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중국 역사 속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거론되는 인물은 중국 최초로 천하통일을 달성한 진시황(秦始皇)이다. 그는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진나라를 기반으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 업적은 분명 위대한 역사적 성취였다. 그러나 통일 제국의 기반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진시황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제국은 빠르게 무너졌다. 사람들은 흔히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하지만, 통일 체제를 안정적으로 이어가지 못한 후계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편이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바로 서진(西晉)을 세운 사마염(司馬炎)의 경우이다. 후한 말 이후 중국은 위·촉·오의 삼국으로 나뉘어 오랜 분열과 전쟁을 겪었다. 사마염은 먼저 촉한을 멸망시킨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사마씨 가문을 이어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를 세웠고, 이어 강남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오나라까지 정복하였다. 이로써 후한 말 이후 약 70~80년에 걸친 분열과 혼란을 마무리하고 다시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마염의 업적은 진시황에 못지않은 역사적 성취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 창업자의 업적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후계 체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점에서 사마염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큰 문제를 남겼다. 사마염은 자신의 아들 사마충(司馬衷)을 태자로 세웠다. 하지만 사마충은 당시에도 판단력이 부족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리숙하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 때문에 조정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충신 화교(和嶠)는 “태자는 순수한 인물이지만 어려운 시대의 나라를 맡기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이는 사실상 태자를 교체해야 한다는 충언이었다.
그러나 사마염은 이러한 충언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대신 그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자신의 손자 사마휼(司馬遹)에게 기대를 거는 방식이었다. 사마휼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으로 알려져 있었다. 궁궐에 불이 났을 때 어린 사마휼이 할아버지 사마염을 불빛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끌었다는 일화는 그의 총명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전해진다. 사마염은 이러한 손자의 재능을 보며 장차 그가 진나라를 이어갈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하였다.
따라서 사마염의 구상은 이러했다. 아들 사마충이 잠시 황위를 이어받고, 이후 손자 사마휼이 황위를 계승하면 왕조는 안정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는 후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현실 정치와 타협하며 문제를 미루어 둔 방식에 가까웠다. 권력 승계의 원칙을 분명하게 정하지 못한 채 상황에 의존한 결정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바로 사마염이 사마휼과 현명한 사마휼의 친모인 사구(謝玖)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장치를 만드는 대신 진나라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 가충(賈充)의 정치적 세력을 고려하여 그의 딸 가남풍(賈南風)을 태자비로 맞이한 것이다. 가남풍은 질투심과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런 성격은 후계구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그녀가 임신한 태자의 시첩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만약 사마염이 이를 엄하게 처벌하였다면 그가 구상한 후계 구도는 제대로 작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젊으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며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 이러한 미온적인 태도는 훗날 큰 정치적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사마염은 또 하나의 정책을 마련하였다. 황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마씨 친족 약 서른 명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고 군사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과거 위나라가 황실의 힘을 약화시킨 결과 권력을 잃었던 일을 교훈으로 삼은 조치였다. 그러나 중심 권력이 약해질 경우 이러한 장치가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이 황제가 되자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가남풍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태자 사마휼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권력 다툼 속에서 지방의 왕들을 중앙 정치에 끌어들였다. 그 결과 진나라를 뒤흔든 8왕의 난이 일어났다. 황실을 지키기 위해 마련했던 군사력은 오히려 서로 싸우는 무기가 되었고, 제국은 오랜 내전에 빠졌다.
내부가 이렇게 흔들리는 사이 외부의 위협도 커졌다. 북방 민족들이 남하하면서 국경 방어는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진나라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통일 제국을 세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통일의 성과는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는 권력의 집중과 승계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될수록 다음 단계인 권력 승계의 안정성이 더욱 중요해진다. 승계의 원칙과 준비가 분명하지 않으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은 갈등과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인공지능 기술과 디지털 시스템을 활용하여 사회 전반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의 행동까지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가능해지면서, 마치 소설 속 ‘빅브라더’를 연상시키는 사회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러한 기술적 통제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강력한 권력 유지 장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시대든 중앙 권력자는 그 시대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통제 수단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그 체제가 흔들릴 때에는 바로 그 효과적인 장치들이 의도와 상반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늘의 중국 정치를 바라보면 역사 공부의 좋은 사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권력의 집중, 후계 문제, 그리고 통제 장치의 활용이라는 요소들이 역사 속 여러 장면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