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미션 only] 악보와 가사가 수록된 최초의 찬송가 ‘찬양가’ 출간
키워드로 읽는 한국 찬송가의 발자취 <2> 개척
2024. 9. 14. 11:30
언더우드(앞줄 왼쪽 두 번째) 선교사가 한국성경번역위원회에서 활동하던 모습.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할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하기 한 해 전인 1884년 6월 갑오경장이 일어나 친일 내각정부가 들어섰고 고종은 일본의 의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언드우드 선교사는 구한말 전개된 한국사의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의 한복판에서 한국의 비운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알려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종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을미사변 전부터 언더우드는 부인 릴리어스 호턴 선교사와 함께 고종 및 민 왕후와 수년간 이미 깊은 신뢰관계를 쌓아왔다. 을미사변 후 일본 세력의 암살을 두려워했던 고종의 요청으로 언더우드는 외국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순번을 정해 권총으로 무장한 채 약 두 달간 고종을 측근에서 밤낮으로 경호했다. 또 부인 릴리어스 선교사는 독살될 것이 두려워 궁중 음식을 일체 먹지 않던 고종을 위해 언더우드의 사택에서 만든 음식을 고종에게 전달했고 고종은 언더우드가 전달해준 봉인된 배달통을 직접 열어본 후에야 하루 두 차례만 음식을 먹었다.
이후 조선의 왕후가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이 처참히 무너지는 현장을 직접 목도한 언더우드는 복음의 전파자이자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사역을 전개한다. 이는 정교분리 원칙을 벗어난 것이었지만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와 교분을 쌓았던 사람으로서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 채 복음만 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역은 단순히 복음전파에 국한되지 않고 직간접적으로 한국역사의 한복판에서 강대국 미국 선교사로서 나름 외교적인 역할 또한 감당했음을 알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러한 강인한 면모는 선교사이자 실천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복잡한 조선의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의 선교 사역은 다방면에 걸쳐 매우 신속하고 진취적으로 전개되었다. 교육 분야에서 1886년 자택에 ‘언더우드학당’을 설립해 고아들을 모아 교육하기 시작했다. 고아원이 문을 연 첫 해 4살 나이에 들어와 성장한 아이 중 김규식이 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외동아들인 원한경과 친형제처럼 지냈고 영특하여 영어 외 5개 국어에 능통해 독립운동가로 활약하고 임시정부의 외무대신과 구미위원회 위원 등으로 크게 활약한다. 언더우드학당은 후에 ‘경신학당’으로 발전,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로 성장하게 된다.
교회 사역에서도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자신의 집에서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개척했다. 점차 교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당을 신축했고 이는 복음 전파의 중요한 거점이자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했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다방면에 걸쳐서 전개되었는데 기독청년회(YMCA)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봉직하며 귀족층 자녀들에게 복음의 접촉점을 만들었고, 1907년 장로교 독노회 첫 노회장에 이어, 1912년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설립되었을때 초대 총회장으로 섬긴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교육과 교회 개척이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면엔 복음 전도라는 궁극적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쳐 끊임없이 매진했다. 언더우드의 헌신적 선교 활동은 당시 조선 사회에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139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데 여러 방면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언더우드의 공헌은 교육과 교회 개척뿐만 아니라 찬송가 출판을 통해서도 한국교회 음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87년 정동교회를 시작한 그는 사경회에서 매일 한 시간씩 성도들에게 찬송을 가르쳤고 이 사역에는 허버트 선교사의 부인과 하이든 선교사(후에 기포드 선교사의 아내가 됨)도 함께했다.
1888년 12월부터 1월까지 약 한 달 동안 첫 번째 사경회가 정동교회에서 열렸다. 정동교회 예배당은 실상 언더우드의 사랑방이었다. 사경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성경공부와 찬송배우기, 예배인도법, 설교법, 기도법을 배웠다. 참석자는 서상륜 서경조 한석진 백홍준 양전백 등 대부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들이었다.
1901년부터 시작된 평양신학교의 준비 모임이 바로 언더우드의 정동교회 사경회였던 것이다. 신학반 사경회에 참석한 조사 권서 교사들은 한 달 동안 신학공부와 더불어 매일 한 시간씩 찬송을 배웠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족자찬송가를 통해 악보 없이 가사만으로 성도들에게 찬송을 가르쳤다.
당시엔 악보 없이 가사로만 된 찬송가가 주를 이뤘기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인 찬송가 편찬과 번역 필요성을 절감하고 1888년부터 악보찬송가 편찬에 착수하게 된다. 이 작업에는 감리교의 존스 선교사와 장로교의 모펫 선교사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 결실로 1894년 악보와 가사가 함께 실린 최초의 악보 찬송가인 ‘찬양가’가 언더우드 선교사의 친형인 사업가 존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당시 인쇄 기술이 발달한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판한 후 조선으로 배송했다.
1894년 악보와 가사가 함께 실린 최초의 악보 찬송가인 '찬양가' 표지 모습.
‘찬양가’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공식 찬송가집으로 선택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언더우드가 ‘하나님’ 용어 논쟁에서 하나님을 ‘상주’로 번역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은 ‘하나님’으로 번역되길 원했기 때문에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이런 대세를 따르지 않자 미운털이 박히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 용어 논쟁은 결국 1904년에 가서야 언더우드가 ‘하나님’이란 용어를 성경과 찬송에 사용하는 것을 수용하면서 일단락된다.
비록 ‘하나님’ 호칭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으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공식 찬송가로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117곡이 수록된 ‘찬양가’는 초기 한국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예배 때 당장 찬송가가 필요했던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찬양가’를 백분 활용했고 1898년까지 4판이 제작됐으며 1908년 ‘찬숑가’(262곡)로 증보되기 이전까지 10년간 서울과 전라도를 중심으로 북미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애용됐다.
‘찬양가’를 간략하게 분석하면 117곡 중 9곡은 한국인이 만든 곡이다. 117편 중 88편만 악보가 수록됐으며 88곡 중 미국 장로교 찬송집인 ‘The New Laudes Domini’에서 53곡이 차용됐고, 위대한 복음송 작곡자인 생키(Ira. D. Sankey)의 복음성가집 ‘Gospel Hymns 1~6권’에서 25곡이 차용됐다. 따라서 찬송가의 원자료는 19세기 미국의 보수 장로교에서 사용되던 찬송집과 부흥회에서 사용되던 찬송집에서 차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찬양가의 구성은 성부찬송(1-17), 성자찬송(18-54), 성령찬송(55-71), 신자생활(72-94), 성회찬송(95-117) 등 총 5부로 편집되었고 부록으로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색인, 영어 제목이 삽입되었다.
찬양가 117곡 중 많은 곡이 현재 우리가 쓰는 ‘21세기 새찬송가’에 수록됐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바로 ‘예수 사랑하심을’(563장)이다. 초판 번역과 후기 번역의 발전사를 살펴보기 위해 언더우드와 안애리 선교사의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 나를 사랑하오 셩경에 말씀일세/ 어린 아해 임쟈요 예수가 피로 삿네”
후렴)예수 날 사랑하오 예수 날 사랑하오/ 예수 날 사랑하오 셩경 말씀일세(언더우드 번역, 1894년판 찬양가)
언더우드의 초기 번역은 다소 어색한 번역에 운율도 4·4조로 맞추다보니 조화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1편에 잠시 소개했던 안애리(Annie Baird) 선교사는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한글 번역의 한계를 극복했다.
“예수 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만토다”
후렴)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셩경에 쓰셨네(안애리 번역, 1909년판 찬숑가)
안애리의 번역이 언더우드의 번역에 비해 훨씬 매끄럽고 운율감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찬양가’는 초기 번역 투의 아쉬움에도 한국 찬송가 발전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한국 찬송가는 꾸준히 개편, 확장돼 1908년 ‘찬숑가’, 1931년 ‘신뎡찬송가’, 1935년 ‘신편찬숑가’로 이어지는 찬송가 발전의 계보를 형성했다. 이처럼 한국교회 음악 뿌리에는 언더우드를 필두로 한 초기 선교사들의 땀과 열정이 스며 있다.
일제강점기와 격동의 구한말이라는 혹독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찬송가는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단순한 노래 모음집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통로이자 삶의 어려움 가운데 위로와 힘을 주는 영적 샘 같은 존재였다.
1894년 최초의 악보찬송가집 ‘찬양가’가 출판된 지 어느덧 130년이 지났다. 지금 한국 찬송가는 언더우드와 같은 개척자에 의해 뿌려진 작은 씨앗이 어느덧 열매가 되어 하나의 찬송가를 통해 예배하는 아름다운 전통의 시작점으로 역할하게 된 것이다.
김용남·한국찬송가공회 국장
기사원문 : https://v.daum.net/v/20240914113032102